아들의 아버지 - 아버지의 시대, 아들의 유년
김원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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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시대의 정직한 작가다. 남들은 감추고 싶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드러내며 해방 전후의 굴곡진 현대사를 올곧은 필치로 증언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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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의 진실 - 독도는 우리 땅인가
강준식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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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한국과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말한다. 김포공항이나 인천공항에서 도쿄 하네다공항이나 나리타공항에 가는 비행기를 타면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만에 닿을 수 있다. 맑은 날 부산 태종대 전망대에서는 일본의 대마도가 가물가물 보일 정도로 일본은 매우 가까운 이웃 나라다.
이렇게 가까운 나라이지만 일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 자신도 60여 년을 살아오면서 일본의 실체를 잘 몰랐다. '일본' 하면 무조건 왜놈, 쪽발이 등 비어를 써가며 말해야 할 아주 고약한 민족으로,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할 백성들로 교육받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집집마다 일제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 한두 점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로 일제라면 무조건 좋아했던 이중성을 지닌 채 살아온 점이 없지 않았다.
사실 사람은 이웃을 잘 둬야 한다. 위급하거나 아쉬울 때는 먼저 이웃을 찾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것이다. 이는 비단 개인뿐 아니라 나라와 나라 사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안타깝게도 예로부터 좋은 이웃사촌을 두지 못했다.
역사책을 펼치면 아득한 옛날부터 왜구들의 노략질이 근세까지 거듭 반복되었다. 필자가 최근 10여 년간 일본을 여러 차례 역사기행하면서 공부하고 보고 들은 바는 옛날 일본은 물자 특히 곡물이 귀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없어 심지어 낳은 자식까지도 굶겨 죽여야 하는 식량난을 겪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연안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그런 그들의 부끄러운 취약점 때문이었다.
최근 일본 후쿠오카 박물관과 도쿄 국립박물관을 견학하고 느낀 바지만 일본 문화의 원류는 우리나라로, 일본에게 한국은 문화의 아버지다. 오늘날 일본 문화의 대부분은 한반도를 통해 받아들인 것이다. 그네들의 고대문화는 우리의 것과 거의 같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그런 일본이 근대에 와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룬 다음 지난날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근현대사였다.
도쿄 일본국립박물관
ⓒ 박도
독도의 진실
요 며칠 피서의 한 방법으로 강준식의 신간 <독도의 진실>에 빠졌다. 저자 강준식은 <손자병법>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를 빌어 철저한 고증을 통해 독도의 진실을 낱낱이 파헤쳤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섬 하나를 놓고 싸우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두 나라 사이에 자리한 탓에 100여 년 동안 맘 편할 날 없이 '뜨거운 감자'일 수밖에 없었던 바로 독도. 365일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독도는 아직까지도 어느 한쪽으로 명확한 결론이 맺어지지 못한 채 통한의 역사와 전쟁의 아픔을 끌어안고 시름하고 있다.
우리는 독도가 우리 땅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이유 같은 건 들어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빼앗길까 불안하다. 저들이 계속해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이유. 저들은 대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아직까지 우리와 국제사회를 상대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가. <독도의 진실>은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그것을 정밀히 추적했다.
저자는 무엇보다 먼저 상대를 잘 알아야 한다고 일본의 시각에서 독도 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신라, 고려 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철저한 자료 조사와 연구를 토대로 현재에 이르는 날까지의 독도의 진실에 대해 낱낱이 파헤쳤다. 어쩌면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그 분노가 희미한 미소로 바뀌며 완벽하게 감정 이완을 시켜준다. 이유는 간단하다. 왜 독도가 우리 땅인지를 사료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도 쉽고 재미있고 통쾌하게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 소담출판사 <독도의 진실> 소개의 글에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국제 관계는 영원한 적도 동지는 없다"는 말과 함께 우리 국민 모두가 독도에 대한 진실을 알고서 일본인들의 억지 주장에 이론적으로 맞설 정신 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국력이 강해야 이웃나라에게 침략을 당하거나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금과옥조와 같은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실 한 세기 전에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것은 그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조상이 아무리 큰 땅덩어리를 물려줘도 후손이 변변치 못하면 빼앗기게 마련이다. 아니 빼앗기기 전에 제 손으로 이웃 강자에게 갖다 바친다. 개인의 재산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후손이 못나면 조상이 물려준 땅을 남에게 다 팔아버리지 않는가.
사실 한 세기 전에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것은 그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가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조상이 아무리 큰 땅덩어리를 물려줘도 후손이 변변치 못하면 빼앗기게 마련이다. 아니 빼앗기기 전에 제 손으로 이웃 강자에게 갖다 바친다. 개인의 재산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닌가. 후손이 못나면 조상이 물려준 땅을 남에게 다 팔아버리지 않는가.
독도
모르면 당한다
1905년 일본이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를 우리나라 독도를 자기네 영토로 편입시킨 것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이승만 라인'으로 독도를 되찾았다. 그 뒤 박정희 정권의 1965년 한일회담과 김영삼 정부의 외환위기, 그 환란을 극복해야하는 김대중 정부를 겪으면서 1999년의 신한일어업협정으로 일본에게 독도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또 다시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 한 세기 전과 같은 무지 무능 부패로 나라의 살림을 거덜 내어 독도뿐 아니라 울릉도, 제주도까지 이웃나라에 팔아버리는 사태가 올까 걱정이 갔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조선조 말기나 대한제국 시절 때처럼 무지몽매하고 부패하기 짝이 없다. 강원 산골의 한 서생은 이 책을 읽은 후유증으로 간밤에는 잠을 설쳤다.
내가 겪어본 일본인들은 대단히 정확하고, 치밀하며, 친절하다. 몇 해 전 나는 일본 하카다 항 입국장에서 여권을 압수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일본 관리는 내 여권에서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여권발권자가 내 영문이름 'D'자를 'O'자로 오타한 뒤 칼로 긁고 그 위에 'D'자를 다시 타이핑한 것을 발견하고 나를 여권 위조범으로 몰아 한동안 조사실에 억류당하는 모욕을 당했다. 나는 그 여권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지만 유독 일본 입국 때에 저지당했다. 그들은 세계 다른 나라 사람보다 치밀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허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모르면 당한다.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여! 제발 공부 좀 하고, 국토 좀 제대로 지키고, 나라 살림 좀 튼튼히 하라. 한 세기 전에 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으며 두 눈 뻔히 뜨고도 내 나라 땅이 남의 나라에 편입되는 걸 보고도 입도 벙긋 못했던 그 치욕을 되새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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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는 살아있다 - 자유.민주의 탈을 쓴 대한민국 보수의 친일 역정
정운현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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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작품이 이룬 쾌거

전 언론인 정운현씨의 <친일파는 살아있다>라는 신간을 펼치면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지난 날에는 영화가 개봉되면 먼저 서울 유명극장에서 상영되다가 관객이 시들할 무렵에야 지방 중소도시에서 상영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서울 지방 중소도시가 거의 동시개봉으로 영화 문화만큼은 시공을 초월케 되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를 발끈 달구었던 영화 <도가니>를 지난달 하순 개봉 다음 날인 원주의 한 극장에서 보면서 경악과 함께, 내가 사람이라는 게, 내가 평생 교육계에 몸담았던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다.

곧 영화 <도가니>에 대한 관객들의 분노는 볕 좋은 봄날 산불처럼 번져 실제 도가니 사건이 일어난 인화학교의 폐교가 추진되는가 하면, 도가니 방지법이 국회에 제출되고, 광주경찰서는 도가니 사건을 재수사한다는 보도가 연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도배하다시피 덮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우리 사회에서 한 작가의 소설이, 한 영화감독의 작품이 큰일을 해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내 마음이 무겁고 우울한 것은 이 '도가니' 열풍도 시간이 흐르면 곧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식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점과 학교 사회의 비리가 비단 그 학교만이 아닐 거라는 점,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건은 자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지겹게 들어온 '친일파' 문제
 

'친일파는 살아있다'. 언제 적부터 들어온 말인가. 해방 후 67년째다. 지겹게 들어온 말이고, 지겹게 들어왔어도 늘 그때뿐으로 유야무야 넘어간, 단골 화두였다. 몇 해 전 친일문제를 연구해온 한 인사(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에게 "왜 아직도 친일파 척결문제냐?"고 시침을 떼고 물어보았다.

나는 오히려 그들(비판세력들)에게 "왜 해방 60돌이 되도록 친일파를 옹호하려고 하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친일파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재의 문제입니다. 민주화의 바탕이 될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언론, 문화 등 우리 국가와 민족의 모든 개혁이 친일파 청산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 문제까지도 친일파 청산 위에서만 가능합니다.

다시 그들에게 "친일파 청산을 하지 않고도 이 모든 문제를 다 개혁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 친일파 청산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 현재의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 사회의 도덕이 무너지고 정의감이 사라진 것은, 또 교육계와 검찰,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한 것은, 해방 후 첫 단추인 친일파 문제를 제대로 해결치 않은 데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99년 항일유적답사 길에 베이징에서 한 독립 운동가를 만났다.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기타 범죄는 범죄가 아닌 세상이다. 나라 팔아먹은 놈도, 왜놈 앞잡이 하던 놈도, 대를 물려가며 높은 벼슬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배고파서 도둑질한 사람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그런 나라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도의와 양심은 땅에 떨어져 버린다.

그때 그분(이명준 선생)은 93세의 고령임에도 서릿발 같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내 무딘 양심을 두들겼다. 평생 해외에 사시면서도 우리 사회의 부도덕을 단 한 마디로 진단하는 말씀이었다.

대책 없는 사람

정운현, 나는 그를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라는 책을 통해서 알았다. 그 책 속에서 나는 내가 다녔던 학교, 내가 몸담았던 학교의 전 교주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내가 즐겨 읽던 시의 지은이도,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분도,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도 친일에 발 담갔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글을 줄곧 써온 정운현을 2000년 여름, 내가 한 독립투사에 감명 받아 북만주를 헤매고 돌아온 뒤 한 대학연구실에 만났다. 그날 이후 그와 나는 기자와 작가로, 편집국장과 시민기자로, 심지어 학부모와 교사로, 요즘에는 같은 저술인(사실은 피차 백수로)으로 인연의 끈을 이어왔다.

그가 가정으로나 사회로도 한창 일해야 하는 49세 나이로 황당하게 직장에서 쫓겨난 이후 이따금 서울 가는 길에 만났다. 그의 집 가까운 독립문 공원 나무의자에서 음료수를, 인사동 주점에서 소주잔을 나누며, 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곤 하다가 입에 발린 내 위로의 말조차도 오히려 그의 아픔을 가중시킬 것 같아 올봄부터는 연락도 삼가한 채 적조하게 지냈다. 그런 가운데 어제 그의 인생에 족쇄가 된 친일파 문제를 또 다룬 신간 <친일파는 살아있다>는 책을 보내왔다.

연전에 그를 만났을 때 "이제는 전문 저술가로 밥벌이를 해야겠다"는 말을 들고서는 나는 반가운 마음에 다산도 유배시절에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 얘기나 이런저런 흥미진진한 세상 뒷골목 이야기책을 펴내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정체성을 속일 수 없었던 듯, 또 기득권층에 가시가 되고, 일반 독자들이 별로 눈길을 주지 않을 책을 펴낸데 대해 다소 역정도 났다. 정말 정운현, 그는 대책 없는 가장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날 바른 역사를 쓰다가 궁형을 당한 현대판 '사마천'이요, 우리 사회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은 의인이다.

우리 사회가 그래도 이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안일보다 나라와 겨레의 양심이나 정의감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의인들이 우리 사회에 보이지 않는 곳에 더러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성서에서 말한 "의인 열 사람이 없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다"는 이야기 속의 열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역할을 정운현 그가 지금 하고 있다.

친일파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제 나의 글 마무리로 '친일파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를 말하고자 한다. 나는 오늘 아침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는데, 문득 2010년 10월 안중근 유적답사 길에 하얼빈에 갔을 때 일이 떠올랐다. 그때 하얼빈 동포 사학자 김우종 선생은 이제는 동북열사기념관이 된 옛 하얼빈경찰서 지하에 재현 놓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고문 및 신문 장면을 안내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은 일제 폐망 후 전범(戰犯)과 한간(漢奸, 일제 협력자)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재판에 회부하여 처리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그들이 개전의 정으로 참회 눈물을 흘린 자는 모두 감형 등으로 용서하거나 석방했습니다. 가장 오랜 수형자가 25년 감옥에서 징역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황제 푸의까지도 처벌했습니다.

우리나라도 벌써 그렇게 처리했어야 했다. 해방 후 즉시 우리나라도 반민특위를 제대로 운영하여 민족반역의 무리를 처벌했다면 오늘까지 친일문제가 우리 사회의 갈등요인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이제 곧 해방 70년을 맞이한 오늘 사실 물리적 친일파 척결은 이미 그 시기를 놓쳤다. 대부분 친일 당사자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물리적 제재보다 더 무서운 바른 역사의 기록을 남겨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친일파 척결이 우리 앞에 숙제로 남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 속에 있는 외세 숭상 의식을 뿌리 뽑고, 우리 언저리에 남아 있는 일제 찌꺼기를 없애고, 최소한 우리나라 선출직 지도자만큼은 친일 세력의 고리에서 자유로운 사람을 뽑아야 그나마 흔들리는 나라의 바탕을 다질 수 있고 잦아진 우리 사회의 정의감을 되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 무리나 후손들도 자신 조상들의 친일 행위를 뼈저리게 반성 자숙케 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그들 가운데 깊이 참회하는 자에게 조상의 잘못에 면죄부를 주는 일련의 사회운동이 필료한 때다. 이러한 시민 사회운동이 우리 사회에 누적된 도덕 부재, 양심 불감증 등을 근본 치유하는 처방전이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제를 충족시키는 거룩한 사업이리라.

대한민국에서 펜은 칼보다 강한가? 이 명제에 오늘을 사는 잘난 사람 가운데는 콧방귀를 뀌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두고 보시라. 그 언젠가는 역사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사실을 증명할 것이다. 칼의 개혁은 일시적이지만 펜의 개혁은 영구적이라는 사실도.

우리나라 사회 구석구석에 치유 불능의 도덕과 양심 부재의 현상은 백성들 사이 자발적 의식 개혁과 같은 시민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남과 아울러 우리 모두가 코페르니쿠스식 발상으로 생각과 삶의 태도를 확 바꿔야 나라도 살고 우리 모두도 산다. 정운현의 <친일파는 살아있다>에는 우리 사회 도덕 양심 불감증의 원인과 그 처방전을 함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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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뒤에서 온다
문순태 지음 / 오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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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의 작가 문순태

문순태의 산문집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의 첫 장을 펴고는 한 자리에서 단숨에 읽다시피 끝장까지 읽었다. 그는 1941년 생이고 나는 1945년 생으로 거의 동시대를 살아온 탓인지 그가 태어난 광주 무등산 기슭과 내가 태어난 구미 금오산 기슭과는 공간의 차이가 수백 리 있음에도 마치 이웃 마을인 양 내 유소년시절을 되새기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그는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발 1187미터의 무등산만 바라보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유년시절에는 무등산을 바라보며 산 너머 넓은 세상을 동경했었고, 광주로 나가 살면서부터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고 했다.

그런 그가 교직(광주대)에서 65세 정년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지난 추억의 실오라기를 한 올 한 올 풀어내고 있다.

"나는 지금도 밥을 빨리 먹는다. 아내는 내 밥 먹는 속도에 맞추느라 위장병까지 생겼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나와 밥 먹는 습관이 같기에 동병상련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 . 25를 만나 한 동안 고향을 떠나 걸식하듯 떠돌음 했던 우리 가족은 4년 동안 외가에 빌붙어 산 적이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외가에 소꼴을 베어주고 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밥상 앞에 앉은 나는 늘 외삼촌 눈치를 보며 후닥닥 밥을 먹어치우고 방에서 뛰쳐나와야만 했다. 조금이라도 늦게 먹으면 "저 자식, 무슨 밥을 저렇게 많이 주었어"하고 외삼촌이 고함을 쳐댔기 때문이다.
- 19쪽'외갓집 가는 길'

정말 그 시절은 극소수를 빼고는 세 끼 밥 먹는 집은 없었고, 하루 한두 끼는 죽이나 수제비, 범벅, 국수요, 밥조차도 쌀이나 보리보다 배추나 무, 콩나물 등 나물을 더 많이 넣은 나물밥이 대부분이었다. 흰 쌀밥을 먹는 날은 명절 날이나 제삿날로 그래서 생겨난 속담이 "조상 덕에 이밥"이었다.

어머니 향기

농사꾼의 아내였던 어머니는 도시로 나와 살면서부터는 텃밭을 갖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오죽 텃밭이 갖고 싶었으면 집안에 있던 화분의 꽃들을 모두 뽑아버리고 고추나 가지 모종을 하셨을까. 오래전의 일이다. 내 소설집 <고향으로 가는 바람> 출판기념회가 열렸던 직후, 아내와 외출을 하고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축하화분의 난이나 꽃을 모두 뽑아 없애고 대신 고추와 가지를 심어놓으셨다.
- 22쪽 '어머니 텃밭'

그 어머니는 꽃은 들이나 산에 가면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하면서 난이나 장미보다 먹을 수 있는 풋고추나 호박, 가지 한 개가 더 소중하다고 그랬던 것이다. 아들집에 살면서 도시의 2층 슬러브 집 마당에 호박을 심어 온통 호박넝쿨로 집을 뒤덮어 놓았다고 했다.

그 어머니가 연로하여 병원에 입원하시던 날, 어머니는 당신이 다시 집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아들에게 저금통장과 도장을 맡겼다.

"나 죽으면 이 돈으로 관이나 사거라."

어머니를 입원 시키고 돌아온 아들은 그날 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서 원고지를 메웠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청국장 냄새가 난다
세월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쓰디 쓴 삶의 발효
사무치게 보고 싶은 오늘
그 향기 더욱 푸르고
빛이 바랠수록 그립다

이튿날 날이 밝은 뒤 아들은 돌집으로 달려가서 어머니 키 높이만한 오석에 <어머니 향기>라는 시비를 세웠다.

그의 거친 삶이 큰 작가로 만들다

문순태, 그는 6 . 25 한국전쟁을 몸으로 겪은 세대다. 그가 전남 담양군 남면 구산리 남면초등학교 5학년 여름이었다. 늦은 점심으로 삶은 감자를 먹고 있을 때였다. 붉은 별을 붙인 그물모자에 카키색 제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사격자세로 다발총을 들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날 이후로 소년 문순태는 끔찍한 동족상잔, 피의 제전 6․25 한국전쟁을 두 눈과 두 귀로 보고 들었다.

나는 요즈막 백아산에 자주 간다. 백아산 골짜기마다 6 . 25의 영혼들이 떠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6 . 25를 소리로 듣는다. 골짜기를 흔든 총소리며 아무도 없는 물방앗간에서 삐꺼덕거리며 돌아가는 빈 물레방아 소리, 때로는 피를 토하는 듯한 울부짖음과 죽어가면서 마지막 내지른 비명이 잠든 나를 벌떡벌떡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그때마다, 6 . 25 때 아무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뙤록뙤록 살아난다. 이제는 잊힌 그들의 이름을 찾아주고 떠도는 고혼에 안식을 주기 위한 진혼제를 올려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역사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되살려주고 떠도는 고혼을 달래주기 전에는 6 . 25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2쪽 '골짜기마다 떠도는 고혼들'

6 . 25로 인해 내 삶은 유년시절부터 순탄치 못했다.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인 내가 초등학교를 네 곳(담양군 남면 인안분교, 신안군 비금 중앙, 화순군 이서 서유, 광주 학강)이나 옮겨 다녀야만 했었고, 대학도 세 학교(전남대 철학과, 숭실대 기독교철학과, 조선대 국문학과)를 전전했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굴곡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211쪽 '나의 삶 나의 소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였다.

5월 21일, 정오를 알리는 애국가 소리에 맞춰 계엄군의 총부리에서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하는 장면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27일 도청에서의 마지막 밤, 새벽의 어둠을 찢는 듯한 가두방송의 애절한 목소리가 극장을 나온 후에까지도 귓전을 맴돌았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광주사람이라면 그날 새벽의 처절했던 그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177쪽 '<화려한 휴가>의 교훈'

문순태는 한국 현대사를 현장에서 보고 들으며 살아온 사람이다. 그의 삶이 고난의 길이었기에 그는 큰 작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산문집 <그리움은 뒤에서 온다>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감탄과 감동, 때로는 공감과 공분을 느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부러움을 느꼈다.

나는 일찍 어머니를 잃었고, 고향에도 돌아가지 못한 채 늘그막에도 타향에서 어슬렁거리는 데 견주어, 그는 당신 문학의 밑바탕이 된 어머니를 오래도록 모신 것과 퇴직 후 다시 고향 무등산으로 돌아간 점 때문이다. 지금 그는 고향 생오지 마을에 '생오지 문학의 집'을 꾸며놓고 당신 기억 창고에 가득 찬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음미하며 원고지에 옮기고 있다.

이 책 3부에서는 이성부, 한승원, 황풍년, 5부에서는 김현승, 김동리, 허백련, 김대중, 박현채, 유공희, 이청준, 진양욱, 신복진 등 질곡의 현대사를 꿋꿋하고 치열하게 산 여러 인물의 일화를 들을 수 있다.

볕 좋은 날 그가 사는 생오지 마을로 찾아가 무등산 산채에 막걸리를 마시며 미처 원고지에 토하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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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꽃
박도 지음 / 오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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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고교시절 친구와의 추억 담아 
 
 


뉴욕 허드슨 강 언덕에서 먼저 하늘나라로 간 친구를 추모하다. 왼쪽 친구를 인도한 이용호 목사, 오른쪽 필자.

   

늦둥이의 슬픔


피임법이 발달치 않았던 시절에 예사 부부들은 어쩔 수 없이 자녀를 낳을 수 있을 때까지 두었다. 그래서 여성인 경우는 폐경 직전인 쉰 살에 이르기까지, 남성인 경우는 일흔에 이르기까지 자녀를 낳았다. 내가 아는 한 할머니는 평생에 열다섯의 자녀를 뒀다고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늦게 낳은 자식은 '막내' '막둥이', 또는 '늦둥이'라 하여, 늙은 부모들은 애면글면 늦둥이에게 젖을 서당(학교)에 다닐 때까지, 젖무덤이 바짝 잦아질 때까지 먹이면서 눈물 속에 길렀다. 

막둥이에 대한 애정이 다른 여느 자식보다 더 한 것은 당신들이 다 기르지 못하고 세상을 뜰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만 해도 한국인의 평균수명이 37, 8세로 환갑(61세)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래서 막둥이는 곧 천덕꾸러기로 자라기 십상이었다.

실제 나의 어머니가 막둥이였는데 다행히 외할아버지 내외가 그 무렵에는 드물게 오래도록 사셨다. 하지만 이미 재산권을 아들에게 다 물려준 뒤라 못 살게 된 막내딸이 친정을 찾아오면 돈 한 움큼 듬뿍 주지 못해 눈시울을 붉히던 모습을 본 게 눈에 선하다.

고교 친구가 남긴 선물

나는 지난 6월 20일, 늦둥이를 탄생시켰다. 나의 은사였던 조지훈 선생은 48세에 돌아가셨는데도 주옥 같은 시와 숱한 저서, 그리고 학술저서를 남기셨다. 그런데 나는 둔재로 그 나이에 문단에 등단조차 못하고 주변인으로 어슬렁거리다가 쉰이 된 때에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라는 장편소설로 겨우 문단 말석에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소설은 쓰지 못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현직 고교교사로 장편소설을 쓸 만큼 시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틈틈이 항일 유적지를 다니면서 답사기와 사는 이야기를 써서 <오마이뉴스>에 송고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답사기나 산문집, 그리고 사진집을 책으로 펴내며 지냈다. 소설가가 소설을 못 쓰고 있는 걸 안타깝게 여긴 아내가 먼저 용단을 내렸다. 2004년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는 낯설고 산수도 선 강원 산골로 내려왔다.

외로운 산골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느 날 고교시절 나에게 온정을 베풀어준 친구가 그리워 2005년 1월 31일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기사를 한 인터넷 신문에 올렸다. 그 기사는 국내뿐 아니라 미국 뉴욕에까지 파문을 일으켜(미주 뉴욕 한국일보에 전재) 마침내 친구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10여 년 전에 이미 하늘나라로 떠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 비보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망연자실하다가 뒤늦게나마 그의 유해가 뿌려졌다는 뉴욕 허드슨 강 언덕에 찾아가 조문하는 게 살아있는 친구의 도리일 것 같아 그해 연말 뉴욕 행 비행기에 올랐다.

온라인으로 알게 된 제주도 백조일손 후손 이도영씨의 길 안내와 뉴욕에 있는 친구들의 인도로 허드슨 강변에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이 모두를 비디오로 찍듯이 원고지에 담아 장편소설 <제비꽃>에 담았지만, 나의 필력 부족으로 세상구경을 못하다가 지난 4월 광주 무등산 생오지 마을에서 태어난 뒤 처음 만난 한 출판인의 호의로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첫 소설집 이후 17년 만에 탄생시킨 늦둥이다.

이 소설에는 나와 친구, 그리고 이도영씨의 가슴 아픈 가족사와 그리고 끝내 이루지 못한 친구의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가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펼쳐지고 있다. 강원산골 외딴 아래채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썼다.

이 작품 <제비꽃>이 매우 힘들게 늦둥이로 이제 세상에 나왔지만, 이즈음은 중견출판사도 퍽퍽 힘없이 도산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 전통의 원주 시내 한복판 서점(동아서관)마저 매장으로 쓰던 1, 2, 3층을 모두 병원과 이동통신대리점에게 내어 주고, 정작 서점은 지하로 옮겨가는 세태이기에 나는 마치 옛날 노부부가 늘그막에 주책없이 늦둥이를 본 심정이다.

"나의 늦둥이를 살려주세요. 막장까지 다가온 대한민국 출판계를 살려주세요."

불황이라 해도 다른 산업은 그런대로 해마다 조금씩 성장했지만 오직 출판계만이 몇 년째 뒷걸음질이다. 그러다 보니 나라에 인문이 죽어가고 있다. 인문이 죽은 세상은 무지 무명한 사람들이 나라를 지배하고, 마침내는 폭력과 독재가 난무하고 부정부패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세상이 올 것이다. 

참고로 <제비꽃> 책머리 말을 덧붙이면서 한 주책없는 늙은 아비의 하소연을 줄인다.

 
그의 빚을 갚는 헌사

"젊은이들이 취직을 못해 아우성이에요. 이제 그만 후배를 위해 퇴직하세요."

어느 날 저녁 아내가 불쑥 한마디 뱉고는 이튿날 강원도로 훌쩍 떠났다. 그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몸으로 바르게 가르치는 훈장이라기보다 매달 꼬박꼬박 월급이나 챙기는 샐러리맨이었다. 보충수업비, 야간자율학습지도비, 어쩌다 학부모가 떨어트린 촌지, 그런 가욋돈을 지갑 속에 꼬불치고는 동료들과 어울려 소주잔을 나누거나 고스톱을 즐겼던 땟국에 찌든 교사였다.

언제부터 아내는 그런 남편을 마냥 바라보고 살기에 진력이 났나 보다. 아내는 강원도 산골 외딴마을에 다 쓰러져가는 폐가 직전의 집을 거저 얻고는 둥지를 틀었다. 그래도 나는 정년퇴직을 해야 한다고, 한 학기를 더 버티다가 마침내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는 앞으로 글이나 써야겠다며 아내가 마련한 둥지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 글이 동네강아지 이름으로 그리 쉽게 쓰이겠는가.

두어 해 동안 반거들충이 시골 농사꾼으로 지냈다. 산골 하루 일과 가운데 아침저녁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군불을 때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 마른 장작들이 '딱 딱'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 사이로 그리운 얼굴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어느 겨울날 장작 불꽃더미 속에서 불쑥 장지수가 나타났다. 나는 불타고 있는 장작들을 방고래 쪽으로 깊숙이 밀어 넣고는 아래채 내 글방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그의 영혼이 나를 일깨웠다.

1961년 봄, 나는 고등학교 신입생으로 입학금을 내지 못해 등교치 못하다가 개학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입학수속을 마쳤다.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쓴 담임선생님을 뒤따라 교실로 갔다.

"옆자리가 빈 학생, 손들어 봐!"
"선생님, 여기예요."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바로 그가 장지수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때 그는 가난한 시골뜨기를 감싸줬는데, 늘그막에는 추억의 친구로, 무능한 늦깎이작가의 글감을 만들어주고 있으니, 그야말로 그는 나에게 목숨이 아깝지 않는 문경지우(刎頸之友)다. 하지만 나는 이승에서 그에게 빚만 잔뜩 졌다. 그래서 이번 작품은 그의 빚을 갚는 헌사이다.

일찍이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독자는 저자가 피와 눈물로써 쓴 글만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나는 작품을 쓰는 동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숱한 눈물을 쏟았다. 이 작품은 나의 첫 작품집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이후 17년 만에 펴내는 장편소설이다. 
  

나는 이 작품을 취재하고 집필하는 동안 내내 행복했다. 지수 그 친구를 30년 만에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잠도 자면서 실컷 수다도 떨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탈고한 뒤 이 머리글을 쓰면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으로, 이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기에….

                                                                2011년 여름

                                                                원주 치악산 아래 '박도글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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