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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지음, 이영진 옮김 / 진명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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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치즈가 없어진 창고에서 헴은 중얼거린다. ‘아마 내일이면 누군가가 가져간 치즈를 가져다 놓을꺼야.’ 인내심을 가지고 열심히 기다려도 치즈는 나타나지 않는다. 치즈는 그 동안 헴과 그 친구들이 함께 먹었기 때문이다. 헴의 친구 스니프와 스커리는 치즈가 없어지고 있다는 변화를 알아차렸고 그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허는 뒤늦게서야 자기가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음을 알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난다. 하지만 달라진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헴, 텅 빈 치즈 창고에서 새로운 치즈가 나타나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다.

시대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주위의 변화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할 수 없고 결국 ‘치즈’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짧은 메시지가 내 마음을 울린다. 오래 전 다 먹어버린 치즈, 그 맛에 나도 취해 새 치즈를 찾아나서야함을 잊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치즈를 찾아야 함을 알지만, 미로 속을 돌아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서 멈칫 멈칫 헴처럼 텅 빈 치즈 창고 속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낡은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치즈를 찾아 모험을 떠나야겠다. 변화하려는 노력의 의지가 없다면 행복에 대한 권리도 없다는 저자의 메시지는 안정과 모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리라.

내가 가장 해야 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미련을 떨치는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새로운 치즈를 마음 속에 그리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치즈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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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 인생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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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그다지 많이 읽지 않는 편인데 요즘은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뇌>에 이어 <아홉살 인생>까지 눈길이 가는 것은 문학작품을 통해 내가 사는 사회와 문화의 관계를 현재 시점 속에서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두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어서 왜 사람들이 이런 책을 좋아하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토굴할매 이야기는 진짜 불쌍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케 한다. 가난한게 불쌍한 게 아니라고? 진짜 가난해서 불쌍한 사람을 많이 봤는데, 저자는 빈민굴에서 빵 몇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까? 물론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

월급기계로 표현한 선생이야기, '꾸물 대는 아이'가 '꿈을 따는 아이'가 된 것은 형편 없는 맞춤법 때문이라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최우수상까지 받게 된 사연, 모두 아홉살짜리 어린 애가 보는 세상이라서 세상의 아이러니를 더 역설적으로 꼬집을 수 있기에 저자는 이런 어린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았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빠짝 긴장하고, 핵심언어와 복선을 따라가야 하는 다른 소설과 달리, 각 장마다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좀 있다. 책 어딘가에서는 가끔씩 <어린 왕자>를 패러디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꼭 말로 설명해 주어야만 사람들은 내가 무엇을 그렸는지 비로소 이해하곤 했는데, 그건 매우 성가신 일이었다.'는 어린왕자의 조종사가 어렸을 때 '꼭 설명을 해줘야 어른들이 이해했다'는 보아뱀 이야기랑 흡사하다. 별, 외계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비오는 토요일 오후, 읽기 쉬웠던 책. 아홉살 인생. 별 느낌이 없다. 내가 아홉살이 되어 인생을 바라보기에는 너무 늙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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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를 믿는가
제람바즈 / 예영커뮤니케이션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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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독교를 믿는가? 가끔씩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면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기독교인이 된 것은 기독교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문제에 답해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약 기독교를 단순한 종교의 하나로 생각했다면 난 종교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가 아닌 인생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 진리라고 믿었기에 나는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10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과연 진리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답게 살고 있는가, 참다운 기독교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 원점으로 돌아가 기독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인간은 세상에 던져진 의미 없는 존재인 것일까. 지금 내가 기독교를 선택하지 않기로 한다면 인생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 없는 상대주의 가치관 속에서, 삶에 대한 무상함, 우주의 공허함, 내 속에 있는 소외감, 그리고 절망. 이런 것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분명히….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가파른 언덕으로 힘겹게 돌을 올리듯 내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찾아 헤맬 것이 분명하다. 헤밍웨이의 작품을 보고 그가 자신이 쓴 글처럼 일관된 삶, 생각과 행동이 일치되는 논리성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위해 비참한 인생을 자살로 마감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생의 의미를 찾던 그는 비굴하게 사느니 장엄하게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작품 속에서 말했었으니까.

이 책을 보고 나는 기독교인으로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세상과 분리되어 아주 기독교적인 용어를 쓰지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세상과 담을 쌓고 싶지는 않다. 기독교를 단순히 개인적인 사항에만 연결시킨다면, 과연 기독교가 어떻게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고통, 진보, 인생의 의미와 관련이 있는지 답해줄 수 없을 것이다.

또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난 진리’가 아니라 ‘가나안 신화 속에 나오는 하나님’으로서의 기독교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죽은 이후의 삶에 대해 믿지 않으면서, 단순히 현재의 삶에 대한 위안으로 신앙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결국 신약에 대한 기반을 잃어버린 기독교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내 삶의 전 영역 속에서 참다운 믿음,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적으로 성경이 실제로 인생에 대해 답하고 있는 부분을 보여주면서 살아야 하기에. 저자의 진솔한 대화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인간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성경, 그리고 그런 성경을 믿는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보다 진지하도록 나를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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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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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엇인 나로 하여금 아침마다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나는 어떤 일에 힘을 들이고 애를 쓰는 것일까? 나는 무엇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일까?

<뇌>의 줄거리 진행보다는 작가가 중간 중간 던지는 철학적 질문에 끌려 나는 이 책을 계속 읽어나간다. 고통을 멎게 하는 것,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생존의 욕구 충족, 안락의 욕구 충족, 의무감, 분노, 성애, 습관성 물질, 개인적인 열정 등 베르베르가 제안하는 행동에 대한 동기들 중 내가 제일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개인적인 열정 부분이다. 무언가에 열정을 불태우며 자아를 실현 하는 것, 나의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하며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열정은 돈이나 사랑이나 명예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난 개인적인 열정을 갖고 싶다. 독서를 통해 나를 계발하고자 하는 열정이 <뇌>라는 책으로 나를 이끌었다.

책 속엔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동기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뭐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원한다는 건 다 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사고가 많다. 자극에 무조건 반응하는 기계적인 존재로 인간을 파악하는 행동주의 이론도 눈에 들어와 왠지 시대 사조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나는 인격이고 싶고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는 독자에게 계속 생각의 꼬리를 이어가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린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지만 그 생각 중 표현되는 것은 너무나 적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 중에서 단지 그들이 표현하는 것만을 알 뿐이다. 독자들이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굵게 이탤릭체까지 한 이 부분에서 나는 삶을 표현의 진지함과 중요성을 생각하기 위해 멈췄다. 나는 얼마나 표현하는 사람인가? 표현하지 않고 마음만으로 상대가 나를 완전히 알고 받아들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표현하면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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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읍내 오세곤 희곡번역 시리즈 1
손톤 와일더 지음, 오세곤 옮김 / 예니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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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나서야 살아있는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다면 참 슬픈 일일 것이다. 나 자신에게 내 이웃에게 살아있는 동안 삶 자체를 기뻐하고 그 삶을 의미있고 풍요롭게 살아야 함을 깨우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읍내>의 주인공 에밀리는 내 질문에 대답한다. 인간의 삶 속에는 영원한 것이 존재하며, 죽음을 진정으로 이해할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사랑하는 아내, 에밀리가 죽은 후 그녀의 남편은 제대로 살 수 없었다. 술을 주체할 수 없이 마시고 에밀리의 무덤에 자주 찾아와 나뒹그러지며 우는 남편을 향해 죽은 에밀리는 안타까워 말한다. 자기는 하늘나라에 있으니까 죽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죽음을 슬퍼하며 가슴을 치다가 삶의 소중한 순간을 놓치는 것은 결코 자기가 기뻐하는 일이 아니니 이제 당신의 삶을 다시 새로이 시작하라고. 삶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이야기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았으니 더 이상 죽은 자기에 대해 슬퍼하지 말고 남편이 열심히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 에밀리의 마음이다.

난 가끔씩 손튼 와일더의 통찰력을 보며 감탄하고 생각에 젖는다. 에밀리의 말처럼, 살아있는 동안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고, 작은 것에 관심을 가지며 삶을 채워야 한다고… 그런데, 쉽지 않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 죽음의 문턱을 넘어갈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마치 영원의 시간이 주어진 것처럼 마음대로다. 웃음보다 인상을 더 많이 쓰는 것은 도시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일까. 아님, 아직도 삶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뜨거운 태양 아래서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을 안타까워하는 에밀리의 대사가 떠오른다.
'오 지구야, 너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아무도 네 아름다움을 볼 수 없구나.' 지구의 아름다움을 보며 오늘 하루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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