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 개정증보판
이장희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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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이 지금의 모습이 아니던 시절.
사귀던 여자 친구와 데이트 후 그녀의 집에 바래다주기 위해 오가던 길은 늘 청계고가 (혹은 삼일고가)였다. 

늦은 밤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 길, 막히지 않는 도로 위 서울의 풍경은 잔잔하고도 평화로웠다. 그와 포개진 심야의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그런 모습이 서울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렇게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발아래에 개울물이 흐른다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청계천은 고가도로가 만든 그늘과 무질서, 주차전쟁이 난무하는, 태초부터 쭉 그래왔던 동네라고 여겼을 뿐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2003년 여름 어느 날 청계고가를 뜯어내자 그곳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 아래 물이 있었다니. 마치 황야에서 수맥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 책 <서울을 그리다>는 서울 사대문 안에 수맥같은 물길과 그속에서 흐르고 있는 역사의 이야기들이 보물처럼 담겨 있다. 마치 100년 전 서울지도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서울 곳곳에 숨겨진 시간을 담아낸 스케치 여행기이기도 하다. 화려한 도시 서울, 무심코 지나가던 서울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우리의 600년 역사를 만날 수 있다. 5년 동안 서울이 가진 이야기에 귀 기울여 온 저자 이장희는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역사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서울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선시대의 건물부터 아련한 추억이 담긴 도심 곳곳, 역사가 숨어있는 터 위에 새롭게 지어진 건물까지. 섬세한 일러스트로 그려낸 서울 곳곳의 풍경과 역사적 정보를 곁들인 짧은 이야기로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서울의 풍경을 스케치로 담아내고 있는 보기드문 책이다.

종로, 명동, 동대문... 흔히 지나다니는 곳곳에 숨겨진 사연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 지는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는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흥미로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데이트, 쇼핑, 영화보러 자주 오갔던 서울의 대표 거리 명동 길거리에 '이재명 의사의 추모비'가 있다는 사실도 그런 것들 중 하나. 그의 이름은 모르나 매국노 이완용은 다 알 것이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현장에서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이다. 만약 그의 암살 계획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그들을 오래도록 기록하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지만 흘러버린 시간 속에서 잊혀져갔다.


덕수궁 골목의 별칭이 '덜덜골목'이 된 까닭

 

조선시대 서울에는 인왕산 호랑이보다 곶감보다 호환마마 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 '한양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라야 쫓을 수 있다'라는 말까지 나온 종로에 그 터가 남아있는 수진궁 귀신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무척 흥미로웠다. 재미와 흥미로운 이야기외에 슬픈 역사의 이야기들도 몇 가지 가슴에 남는다. 그 중 '덜덜골목'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덕수궁 골목길에 대한 사연은 약소국의 서러움과 아픔이 절절히 서려있다. 

 

러시아 대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궁까지 한 고종은 왕비 시해 사건 다음부터는 밤이 두려웠는지 새벽 까치 소리를 듣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훗날 상궁들은 전한다. 그리하여 고종 황제는 궁의 밤을 낮같이 환히 밝힐 목적으로 전기 사업을 명한다. 한 나라의 국왕이 자기 나라, 그것도 자기 궁 안에서 살해의 위협에 겁을 먹고 이사를 다녀야 하고, 밤이 무서워 불을 밝혀야만 했던 시대, 전깃불을 밝혀야 했던 이유, 덕수궁 골목에서 나는 요란한 전깃불 소리는... (본문 가운데)


더불어 전철을 타고 언제든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좋은 여행지와 유서깊은 명소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많은 내외국인이 쇼핑을 목적으로 명동을 찾지만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내진•내화 설계가 된 한국전력 사옥을 비롯해 과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상징하는 명동예술극장, 유리를 외장재로 사용한 최초의 건물인 유네스코 회관과 그 옥상에 있는 작은누리 생태공원 등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다. 


걷고 싶은 서울 거리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정동길에도 상하이에서 직접 가져온 벽돌로 쌓은 옛 신아일보 별관, <장독대> <장밋빛 인생> 같은 조형물, 지금은 역사박물관이 된 배재학당, 덕수 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한 첫 방송터,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 등 다채로운 매력이 숨어 있다.  


권율, 김종서, 손순효, 이황, 정도전 등 우리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의 생가나 몇 백 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왔지만 동네 주민들조차 그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딜쿠샤 은행나무, 수풀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운강대 각자(刻字) 등 옛 흔적을 찾아다니며 저자는 개발에 밀려 역사적 유적지가 말없이 사라지는 현실을 저자는 몹시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마냥 옛 서울이 좋았지 하고 감상에 젖는 것은 아니다. 세종로 횡단보도나 광화문광장, 조금씩 옛 모습을 찾아가는 서울성곽,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비, 청계광장에 세워진 다슬기 모양의 ‘스프링(Spring)’ 같은 조형물 등 서울의 공간을 새롭게 채워가는 것들에 대해 다루면서 앞으로의 서울에 대한 기대감도 열어둔다. 

서울은 골동품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기체이기에 오늘도 자동차 내비게이션 회사에서는 지도를 수정하느라 분주하다. 많은 옛 건물이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사라져갔다. 둘러보면 한국전쟁 이후의 모습, 나아가 잘 다듬어진 신도시의 모습이 주를 이룬다. 역사도시 라기에는 초라할 정도다. 그래서 더욱 사라진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이제는 새로 지어진 고층건물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려진 옛이야기와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서울의 시간을 그려보고 싶었다. 내 스케치 속 서울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계속해서 변해갈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의 서울 스케치 여행 또한 내가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진행형이다. (본문 가운데) 


스케치가 가진 큰 매력 중 하나인 '느림의 미학'은 책장을 좀 더 느리게 넘기게 되고, 좀더 특별한 무언가를 선사한다. 저자처럼 서울을 스케치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멍하니 바라만 봐도 괜찮다. 그저 그 장소에 머물며 지나가는 사람들,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서울 여행은 충분히 알차다.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았지만 서울에 대해 잘 몰랐기에 서울 스케치 여행을 시작했다는 저자 이장희와 함께 서울 곳곳을 누비는 동안 분명 서울은 그전과 다른 의미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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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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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런 길을 알려주는 책들은 만나기가 힘들다. 날마다 셀수없이 많은 종류의 책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풍요의 시대가 좋은 줄 알았는데, 너무 많은 작품들속에서 보석같은 수작이 묻히는 좋은 책을 읽기보다 발견하기가 더 힘든 아이러니라니... 풍요속의 빈곤은 책에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다. 

책을 고르는데 있어 신문이나 공공도서관등의 서평이나 양서 추천에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몇  년전 국방부가 선정한 23권의 금서들은 우리 시대에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많은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는데 요즘은 그런 발표를 안하는게 아쉽다.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계를 위해서라도 국방부는 매년 금서 발표를 했으면 좋겠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은 베스트셀러책을 사보았다가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 독자들의 마음을 아는지 '베스트셀러책은 2류다'라고 외치는 용감한(?) 작가 장정일의 독서일기다. 수많은 과작과 졸작으로 울창한 책의 밀림속을 헤쳐 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까칠하지만 믿음이 가는 가이드같은 책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 이르기까지 그가 읽은 83권의 독서를 통해 국내외 정치 상황과 사회 현상이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과 함께 버무러져 빛을 발하고 있다. 특유의 유머와 통쾌한 독설은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읽게 하는 큰 매력이기도 하다. 

당신이 책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인지 알아볼 수 있는 장정일식의 16가지 자가 진단법도 재미있다. 그 중의 하나가 '다른 데서는 모르겠는데, 유독 서점에서 예쁜 여자 (혹은 멋진 남자)를 보면 거의 심장이 멎는다'이다.  

읽은 책이 세상이며, 읽기의 방식이 삶의 방식

독서를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 길은 책 속으로 난 길이 아니라, 책의 가장자리와 현실의 가장자리 사이로 난 길이다 - 본문 중 

<아담이 눈뜰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등 소설가이기도 한 저자는 정작 한국 문학에 대해 매우 냉소적고 비판적이다. 우리나라는 문학이 너무 강한 사회라서 온갖 사회적 의제와 다양한 글감을 문학이란 대롱으로 탈수해 버린단다.

예를 들어 BBK 같은 사건이 터졌을 때 제대로 된 사회라면 거의 반 년 안에 스무 권이 넘는 논픽션이 쏟아져 나와야 한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종이 100만 부 이상 팔리고 그 사건이 시중의 화제가 되고 칼럼에 오르내리는 사회가 '엄마를 부탁해'같은 소설이 100만 부나 팔리는 사회보다 훨씬 바람직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무엇이든 빨리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이 사회속에서 독서의 속도마저 느린 것보다 빠른 게 좋은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현상에 한탄하고 있다. 때문에 이런 가속도의 사회에 살면서 책을 빨리 읽기 위해 조바심치는 사람과 느리게 읽겠다고 작심한 사람은 단지 책 읽기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인생관을 선택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한다. 300쪽짜리 책을 10여 분 만에 읽을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허세 속에는, 사고의 숙성을 본질로 하는 '책 문화'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야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을 소개하며 그는 말한다. 개그는 개그일뿐 따라하지 말자! 

이 책에 실린 많은 독후감을 읽고 파고들면 들수록 도통하는 게 아니라 그의 안내를 따라 현실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다. 책을 읽는 까닭이 책 속에서 위안을 찾고 책에 탐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서 세상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세속적 삶에 참여하기 위함임을 깊이 공감하게 된다.
 

책은 죽었다...책 문화는 죽었다

새로이 출현하는 미디어에 의해 죽어가는 것은 저자가 누구인지도 모를 유명인의 자서전이나 영화 개봉에 맞추어 곁다리로 키워 파는 책, 유명인사의 요리책과 같은 상업적인 책으로 사상이 담겨 있어도 사고를 촉발하지 못하는 책은 인쇄문화이지 책 문화에 속한 책은 아니다 - 본문 중 

셔먼 영의 <책은 죽었다>는 책을 '기능적인 책'과 '안티 책(=나쁜 책) 그리고 '책'으로 나눈다. 종이에 잉크를 묻혀 제본을 한 구텐베르크 이후의 발명품으로서 '인쇄 문화'의 말단에 속한 것이 앞의 두 경우, 마지막의 '책'은 숙성된 사고에 의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책 문화'에 속한다. 책 문화란 '숙성된 사고'의 동의어로 독자들에게 다양한 사상을 접하게 하고 깊이 있는 통찰을 하게 만든다. 이런 책은 인터넷이나 영상과 같은 새로운 미디어에 의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 전부터 떠도는 '책의 죽음'은 '인쇄 문화'에 속한 책이지, '책 문화'에 속한 책과 세계관은 몸을 바꾸며 살아 남는다.  

저자는 책의 죽음을 촉발하고 있다는 새로운 미디어 인터넷이 무서운 것은 인쇄 문화를 죽일 뿐만 아니라, 생각이 숙성될 시간을 빼앗음으로써 궁극에는 사고와 내적활동의 특징을 이루는 책 문화조차 파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을 사기보단 주로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내게 '산 책'의 목록에 넣고 두고두고 읽고 싶게 하는 책들이 많이 나온다. 공기, 물, 빛 같은 자연이 베푸는 무료의 공공재산까지도 끔찍이 혐오하는 신흥 봉건세력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장 지글러의 <탐욕의 시대>와  야구, 축구 등 엘리트 스포츠에 열광하나 자신은 정작 운동을 전혀 하지 않은채 스포츠 관람에만 넋을 빼는 사람들의 슬픈 관음증을 얘기하는  피터 페리클레스트리포나스의 <움베르토 에코와 축구>등 

내게도 작가처럼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는데 그건 바로 '독후감을 쓰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이다. 마음속에 남는 좋은 책을 되새김질하고 한 번 읽고나면 다시 넘겨보기 힘든 책의 책장을 또 한번  넘겨보게 하고, 책속의 어떤 글에서 생각에 빠지게 하는 좋은 습관이요 제2의 독서다. 그래서 저자도 책을 읽고도 책에 대해서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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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그리고 그리다 - 스케치가 있는 감성 걷기 여행
고영일 지음 / 나름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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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여행의 좋은 점은 '간단한 짐 싸기'에 있는 것 같다. 내가 즐겨하는 자전거 여행이나 오토 캠핑 여행 같은 건 겨우 하룻밤 묵고 오는 여행을 떠나는데도 웬 짐들이 그리 많은지. 삶의 무게에 눌려 여행이 덩달아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그런 면에서 걷기 여행은 짐이 단촐하니 발걸음도 마음도 가뿐하고 가볍다. 
 
<지리산 둘레길 그리고 그리다>의 지은이 고영일이 여행길에 가져간 것 중 특별한 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낚시용 접이식 의자. 만화가인 그가 걷기 여행 중 마음에 와닿는 풍경 앞에 앉아 간단하게 그림을 그릴 때 썼던 것으로, 책 속에 나오는 푸근하고 정감 어린 그림들은 모두 이 의자 위에서 스케치했단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난 10년간 만화를 그려온 지은이에게, 고갈되어간다고 느꼈던 상상력을 북돋아주었다. 하긴 좁은 작업실 책상 에서 벗어나 둘레길을 걸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새로운 경험일 것이다. 게다가 길 위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저자가 그리는 그림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은 얼마나 기꺼울 것인가. 
 
그는 지리산에 오고서야 그림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떤 건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친구 하나는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었는데 둘레길을 걸으면서 많이 호전됐다고 하니, 지리산 둘레길은 찾아오는 사람에게 값으로 환산되지 않는 많은 선물을 주는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의 800리(약 300킬로미터)를 둥글게 잇는 도보길이다. 현재 개방된 구간은 전북 남원시 주천면 장안리에서 경남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를 잇는 71킬로미터 5개 구간으로 옛길, 마을길, 숲길, 임도, 논두렁길, 강변길을 연결한 조용한 길이다. 저자는 각 구간을 마음, 나눔, 자아, 삶, 평온을 담는 길로 나누어 그만의 여행기를 그려가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과 아마존 조에족 

시골 어디나 그렇겠지만 둘레길에도 대문이 닫힌 집이 별로 없다. 대문이 아예 없는 집도 있다. 담도 낮아 살짝 까치발을 하면 집 안이 훤히 보인다. 손때 묻은 연장이 벽에 가지런히 걸려 있기도 하고, 파종을 하고 남은 작물들이 널려 있기도 한다.  

유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아마존의 눈물>을 보면 원시 부족인 조에족이 찾아온 낯선 외지인들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방어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 것에 놀라게 된다. 담당 연출자는 그런 조에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 자신이 누굴 의심하거나 공격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미국의 어느 도시에 있는 주택가를 구경하면서 지나가다가 "Don't Loitering"란 팻말을 보았다. "시끄럽게 떠들지 마시오" 정도로 예상했지만 들고 있던 전자사전에 입력해본 결과 "어슬렁거리지 마시오"로 해석되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떴던 기억이 난다.  

아마존의 조에족이나 지리산 둘레길 주민들의 마음이야 말로 인간이 그렇게 추구하는 문명의 최고 발전 단계가 아닐까, 그들은 이미 선진국이 동경하는 발전된 미래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둘레길 가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 앉아 쉬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의 재미있는 표현대로, "더위를 식혀줄 바람과 그늘이 즐겁다면 '여그가 천국'"이지 싶다. 

지금 걷는 한걸음이 행복한 이유

몇 시간을 걸어도 사람을 만날 수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외롭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것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지만, 그 빈 공간과 멈춰버린 시간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알게 된다. - 본문 가운데 

가끔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둘레길 여행이 화제에 오르면 "지리산 둘레길에서 어느 구간이 가장 좋았어?"라거나 "왜 둘레길을 가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말문이 막힌다. 어느 곳이 제일 좋은지 생각하며 걸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도 마찬가지로, 그래야 '지금'에 충실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 걸음 한 걸음에 집중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에 충실해야 하고, 길을 잃지 않고 잘 가는지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내 몸이 신호를 보낼 때마다 욕심내지 않고 충분히 휴식도 취해야 한다. 

걷기 여행을 비움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짐뿐만 아니라 일상의 잡념들을 받아주고 비워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도시의 삶은 나 자신과 마주할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내게 수없이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들, 분노·화·즐거움·감동·갈등을 정리하지 못한 채 방치해두고 만다. 걷는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자연과 스치며 긍정적인 힘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걷는 순간만큼은 방치된 나와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그런 시간은 지리산의 적막함이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곳이 많다. 하지만 길을 걷다보면 이 적막함이 적막인지도 모른 채 땅을 내딛는다. 지리산의 고요함 덕분에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니 조용하다고 생각할 겨를이 들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이런 책도 안 읽어보고 처음 전남 남원시 주천면에서 길을 나섰던 나는 초입부터 가파른 등산길을 만나고 '둘레길이 이렇게 힘든 곳인가' 하고 잔뜩 겁을 집어 먹은 나머지 한 구간만 걸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만 참고 더 걸어가면 너른 들과 산길, 마을길, 국도, 제방길 등 다양한 길에서 걷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지은이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둘레길의 첫 코스인 주천-운봉길을 거꾸로 운봉에서 주천으로 걸어보라고 권한다).    

어릴 적 시골에 친척집이 없어서 '전원일기'를 경험하지 못한 저자처럼 어린 시절의 한(?)을 풀고 싶거나, 어딘가로 다시 떠나고 싶을 때, 문 밖을 나서기 전까지의 두근거림과 빈 가슴으로 돌아올 기대, 그리고 오랜 시간 잃었던 상상력을 다시 찾고 싶다면 지리산 둘레길로 떠나보자. 더불어 돌아온 후엔 도보 여행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면 더욱 좋겠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고 부지런히 걸으며 정신을 집중하기, 소박하게 먹고 가진 것을 줄이기, 여행 중 받은 친절에 감사하고 이방인으로서 겸손해하기, 모든 것을 새롭게 보기…. 언젠간 멀리 길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내 삶의 자리에서 길을 걷는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본다.

덧붙이는 글 |

몇 년 전부터 지리산에 댐을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어 마을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이 반대해오고 있다고 한다. 엄천강, 용유담이 있는 금계-동강 지역에 댐이 생긴다면 지금의 지리산 둘레길은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4대강 개발에 댐까지. 자연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이제 깨달을 때도 됐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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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파는 스페셜리스트
데이비드 H. 프리드먼 지음, 안종희 옮김 / 지식갤러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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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예상했던 주가 추세는 장기적 투자 차원에서의 관점으로는 유효한 분석으로 보입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기 직전까지 투자 유지 혹은 추가 매수를 권유해 나같은 많은 주식 투자자들의 원성을 샀던 어느 재벌 그룹 계열 증권사의 유명 애널리스트가 얼마 전 TV 뉴스에 나와 말한 변명 아닌 변명이다. 그같은 전문가들이 신봉하다시피하는 미국의 거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나 S&P도 금융위기 직전까지 AIG 같은 부실덩어리의 금융기업들에게 최고의 평가 점수인 AAA를 주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일반 시민들의 생활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상청에서부터 의사, 펀드 매니저, 변호사 등현대문명은 전문가들의 조언과 지식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한다. 그렇기에 전문가라고 하는 이들이 잘못된 조언, 연구 발표를 하거나 의도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공공의 적'과 다름없다.  

최근에 벌어지는 약사와 의사들, 경찰과 검사들 간의 상호 주장과 대립, 4대강 개발 사업의 효과와 부작용을 둘러싸고 최고의 전문가라고 하는 학자들이 펼치는 정반대의 주장을 보노라면, 이렇게 사회적으로 큰 파장과 논란을 일으키는 쟁점을 둘러싸고 서로 상반되는 견해를 내놓는 소위 전문가 혹은 권위자라는 이들의 말을 도대체 믿어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기만 한다.  

과학과 기업 분야의 저술가인 저자는 이 책 <거짓말을 파는 스페셜리스트>를 통해 다수의 여론에 의한 것이 아닌 사실과 증거에 의해 입증되는 과학 분야조차도 '과학적 논란'이라는 이름의 오류와 의도적 조작이 횡행함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책의 초입부부터 일일이 사례를 들며 전문가란 사람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맛보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책장을 넘길수록 이 '수상한 전문가들'을 사기꾼으로 몰기보다는 왜 전문가들이 오류에 빠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더 신뢰할 만한 전문 조언을 찾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다루고 있다.   


오류와 모순 그리고 거짓말... 수상한 전문가들  

<네이처> <사이언스> 같은 유명 과학 저널에 게재되는 논문의 3분의 2가 엉터리다. 의사들은 6번에 1번 꼴로 오진을 한고 오진의 약 절반 가량은 '실제적인 피해'를 가져온다. 시장 평균 이상의 수익률을 확신하며 특정 금융 상품을 권유하는 재테크 전문가들은 평균 이상의 수익을 올린 적이 별로 없다 - 본문 가운데 

날씨를 잘못 예측하여 비를 쫄딱 맞게도 하는 기상청의 뉴스부터 전문가들의 엉터리 진단은 의학을 비롯해 첨단과학, 금융전문가, 여론기관 등 다양하기도 하다. 사실 이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빠지는 것은 거짓말이라기보다는 '오류'나 '모순'인 경우이고, 정말로 심각한 것은 그들의 의도적인 거짓말이다. 그것이 불특정 다수 국민들의 삶이나 국가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경우엔 더욱 그러하다. 

과학, 특히 의학 분야의 연구 논문이 제약회사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며, 의학 이외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도 승진이나 연구비를 타기 위해 정부나 기업의 '유령 저자'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리 자료, 잘못된 자료 측정, 원하지 않는 자료 폐기, 교란 변수 제거, 통계 조작 등의 방법을 이용해 얼마든지 정부와 기업이 원하는 연구 결과를 만들어낸다.

우리나라에도 천안함 사고, 4대강 개발사업의 경제적 효과, 원전의 안전성 문제 등에서 자신의 이익과 권력에 부역하는 수상한 전문가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바로 이 책에 나오는 거짓말을 파는 스페셜리스들이다. 이런 거짓 전문가들의 역사는 오래된 것이어서 소설 <1984>의 작가 조지 오웰은 지식인들은 권력의 노예, 미디어의 노예들이라며 "지식인들은 잘 훈련된 똥개"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우리는 왜 그들에게 번번이 속을까?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오즈의 마법사 효과' 탓이 크다. 우리는 부모, 선생님 등 세상에는 우리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며, 그들의 말은 무엇이든 옳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탓이다. 여기에 전문가들은 문제를 단순화하거나 만병통치 처방을 강조하는 등 솔깃한 제안을 할 줄 안다 - 본문 가운데  

저자는 사람들이 전문가의 조언에서 기대하는 특징을 명쾌함, 확실성, 보편성, 낙관성, 실행가능성, 파격적인 주장 등으로 요약한다. 현실은 다양한 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 제약이 있지만 명쾌한 답을 확실하게 내놓으라는 강박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전문가들도 이런 요구에 휘둘리기 쉽다. 

일반인들도 전문가들의 주장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알면서 어떤 치료법이나 재테크가 좋다는 말에 쉽게 현혹된다. 원 푸드(One Food) 다이어트로 빠르게 살을 빼준다는 비만 전문가가 인기이고, 주택가격이 바닥이기 때문에 집을 살 적기라고 확신을 심어주는 부동산 전문가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서도 항상 그들을 쫓아가게 되는가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전문가들의 거짓말에 덜 속을 수 있을까. 저자는 단순하고 확정적인 전문지식, 특히 단 한 건의 연구에 근거를 두었거나 놀랍도록 획기적인 연구 결과는 더욱 경계심을 갖고 살펴봐야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커피를 마시면 수명이 늘어난다' 거나 '수면시간이 6시간 이하인 사람은 비만이 되기 쉽다'는 식의 연구 결과는 여러 요인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인과관계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집단적 사고의 위험성 

요즘 전문가들은 혼자가 아니라 대학과 병원, 기업, 정부 기관 등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이들의 영향을 받는다. 집단은 편견을 증폭시키고, 소수의 관점을 무시한 채 다수의 관점을 밀어붙인다. 2008년 금융위기를 앞두고 로버트 쉴러, 누리엘 루비니 등 소수의 전문가가 주택 가격 거품에 대해 지적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 시스템이 탄탄하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전문가들의 말에 익숙해져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도 집단 사고의 한 예이다 - 본문 가운데 

저자는 집단적 사고가 사회에 끼치는 불행한 결과를 미연에 방지하는 방법으로 과학적인 마인드를 가진 프로페셔널리즘(전문가 정신)이라고 말한다. 과학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따르지 않으며, 다수의 여론에 의해 과학적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과학적 근거에 의해 입증되는가 아닌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 정부 당국이 먼저 투명하고 신뢰성 있는 정보를 제공해 일반인들이 충분한 정보를 얻게 한다면 잘못된 여론에 의한 위험성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이외에도 저자는 전문가들의 분석과 전망이 왜 틀리는지 6가지 요인을 들었다. 편견과 부패, 비합리적인 사고, 청중에 대한 고려, 능력 부족, 감독의 부재, 자동적인 반응…. 전문가 실패의 전형적인 패턴들을 상세히 풀어낸다. 더불어 무시해도 좋은 전문가 조언의 특징 7가지, 신뢰도가 더 높은 전문지식의 특징 7가지 등이 알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다.  

책 속 부록에 나오는 오류, 모순, 혼란이 드러난 전문지식의 사례들도 재미있게 읽힌다. '휴대폰에서 해로운 전자파가 발생하는가' '옥수수에서 추출한 바이오 연료는 환경에 도움을 주는가' '운동할 때는 물을 많이 마셔야 할까' '멋진 남자가 연애하기에 좋을까?'….

우리에겐 부끄러운 사건이지만 몇 해 전 황우석 박사가 줄기세포 연구를 조작했던 사례도 책에 나온다. 지은이가 우려한 집단적 사고의 위험성은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황우석 박사의 복제 연구가 조작되었음이 명백히 밝혀졌는데도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그를 지지하는 집단 서명운동까지 벌였던 우리. 책의 말미에 수상한 전문가들을 대하는 현대인의 가장 올바른 태도로 맹목적 추종을 피하라는 조언이 있다. 한마디로 '맹추'가 되지 말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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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도시가 아니다
이경훈 지음 / 푸른숲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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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게는 두 가지의 길이 펼쳐져 있다. 하나는 차도로 이어진 퇴근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전철역에서 내려 걸어가는 20여분의 길이다. 같은 퇴근 길이지만 풍경은 전혀 다르다. 차를 타고 가는 길은 말그대로 사무실에서 집 주차장까지 직진하듯 가거나 심심할땐 중간 정도에 있는 대형 마트에 들르기도 하는 길이다. 

반면 두번째 퇴근 길은 그야말로 다채로운 거리의 길이다. 대기업의 편의점들도 많이 있지만 주로 동네의 소규모 상점들이 대부분이다. 작은 슈퍼에 들러 주인 아저씨와 인사를 나누며 두부를 사기도 하고 반찬가게의 주인 아주머니와 서로 안부를 물어 보기도 한다. 이외에도 DVD·책 대여점, 세탁소, 떡집, 전파상, 철물점··· 이 길 양옆으로 도열해 있어 기웃거리며 걷다보면 하루의 피로가 풀리는 듯 하고 마음이 푸근해지곤 한다.    

건축학자이자 교수인 저자가 쓴 책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는 진정한 도시의 모습은 위의 두번째 길이며 거리라고 말한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룬 서울이 도시가 아니라니 도발적이기까지 한 제목의 책이다. 게다가 대한민국 대표 도시 서울을 매력 없고 불편하고 삭막하다고 느끼게 하는 데에는 역설적으로 '쾌적함'과 '자연'이 그 주요 원인이라는 주장은 내 상식을 되짚어보게 하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인도에 주차를 하는 야만적인 행위부터 규제하는 것이 디자인 거리 조성의 첫걸음'이라는 말에 속으로 '옳소!'하는 외침이 절로 터져 나오기도 했다. 

거리는 어떻게 우리를 걷게 만드는가 

(중략) 무엇이 시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도시를 걷게 하는가?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고 여기에 나무를 더 심고 벤치를 놓아서일까? 정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진정 도시를 걷게 만드는 것은 상점이다. 거리에 빠짐없이 채워진 상점 쇼윈도는 도시 생활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상점은 거리의 활력일 뿐 아니라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이며 보안등이자, 거리의 청결함과 쾌적함을 감시하는 거리의 파수꾼이다. 보행자들에게 볼거리와 잔재미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거대한 미술관이기도 하다 - 본문 가운데  

뉴욕이 로망의 도시로 다시 태어난 데에는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네 명의 전문직 여성들의 흥미로운 뉴욕 라이프스타일은 전 세계 시청자들을 사로 잡았으며 영화로도 두 편이나 제작되기도 했다. 특이한 점은 주인공들이 계속 걷는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물론이고 주변의 변호사, CEO들 마저도. 게다가 우리 기준으로 보면 유명 브랜드 쇼핑에 탐닉하는 이른바 '된장녀'들이지만 아무도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을 유혹하는 남자들 마저도. 영화속에 등장하는 교통수단이라곤 택시와 두 발로 걷는 것뿐이다. 애써 차려입은 주인공 캐리는 고가의 구두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계속해서 걷는다. 

서울은 '둘레길'이나 '성곽길'처럼 걷고 싶은 길은 많지만 정작 도시안에서 걷게 하는 거리는 드물다. 서울시와 지차체에서 만들어 놓은 '걷고 싶은 거리'들 마저도 대부분 산책이나 운동을 위한 걷고 싶은 길일 뿐이라는게 저자의 생각이다. 도시인을 걷게 만드는 걷고 싶은 거리는 공원이나 벤치를 들여 놓은 길이 아니라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선 곳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구경거리가 있는 있는 길로서의 거리가 도시를 살린다는 것이다. 

하긴 사진이나 영화 속 노천 카페의 낭만은 모두 거리가 낳은 것이다. 그런 거리가 있는 도시는 활기가 있다. 따라서 도시가 삭막하다는 것은 거리가 삭막하다는 뜻이겠다. 그런면에서 저자는 넉넉한 주차장과 쾌적한 공원이 없는 신사동 가로수길은 도시의 거리가 지닌 기본적인 역할과 그로써 형성된 도시적 공간의 전형을 보여주는 몇 안되는 진정한 거리라고 말한다. 

건축은 사회의, 시대의 거울  

가장 도시적인 주거 형태인 아파트가 서울에서는 오히려 도시를 해치는 주범이 되었다. 이은 아이러니이자 한국 도시의 최대 불행이다. 모든 세대가 남향일 것을 요구하고, 울창한 자연에 둘러싸여 있기를 원하며, 방음벽으로 도로와 차단돼 고요한 환경이기를 원한다. 도시의 문화적 경제적 혜택은 고스란히 누리면서도 도시의 번잡함은 멀리하겠다는 이중적인 태도가 주거와 도시를 모두 망치고 있다 - 본문 가운데  

새집증후군은 우리나라에서만 쓰는 용어라고 한다. 빨리빨리 짓다 보니 본드와 시멘트를 사용하는 공법을 사용하게 되고 그 결과 새로 만든 집에는 유해한 독소가 많이 발생해 거주하는 사람들이 여러 질환에 시달리게 되버렸다. 이러한 병적 증후는 더욱 심각한 병리 현상으로 발전해, 서울의 전체 건물 절반 이상이 지은 지 20년을 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렇게 한국의 집짓기는 끼워 맞추고 조립하는 정교함이 요구되는 건식 기술보다, 시공이 간편하고 무엇보다도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 없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습식 시공법을 채택한다. 공업용 강력 본드같은 접착제로 마루부터 화려한 인테리어까지 하는 바람에 사람뿐만 아니라 도시를 병들게 했다는 것. 유럽의 도시들과 달리 서울에 오래된 건물이 없는 것은 사회 경제적 문제도 있지만 이런 공법의 건축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늬만 건축이 서울을 유례없이 어린 도시로 만든 것이다. 6백년 역사의 도시 서울이라고 하지만 백 년은 커녕 50년 된 건물도 드문 현실이다. 어릴 적 살던 집은 헐려서 아파트로 다시 태어났고, 젊은 시절의 추억이 통째로 담겨 있던 동네 풍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재 진행 중인 서울시의 '뉴타운' 정책을 보건대 문제는 50년 후에도 자명하다. 우리의 아이들도 우리 세대처럼 어릴적 기억이 말소된 '장소와 추억 상실의 도시'를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 걱정스럽다.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엽서의 한 장면이 연출되는 유럽의 도시와 달리 서울은 어째서 항상 공사 중일까? 왜 나의 도시 생활은 항상 지치고 피곤하기만 한 걸까? 저자는 정말로 해야 할 일은 서울에 더 많은 가로수길을 만드는 것이다 라고 외친다. 벤치가 없어도 좋고, 작은 공원이 들어오지 않아도 좋다. 대신 모든 길에 인도를 만들고 자동차가 올라오지 않도록 한다. 유모차도 지나다닐 수 있는 가로수길과 같은 '우리 동네'에서 이웃들과 인사하며 지내는 삶을 꿈꾼다. 진정으로 걷고 싶은 거리, 진정으로 살고 싶은 도시를 말이다. 동감이다, 그런 도시는 외로움을 달래주고 사람들을 위로한다. 내가 사는 동네의 퇴근 길에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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