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시간을 그리다 - 풍경과 함께한 스케치 여행, 개정증보판
이장희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청계천이 지금의 모습이 아니던 시절.
사귀던 여자 친구와 데이트 후 그녀의 집에 바래다주기 위해 오가던 길은 늘 청계고가 (혹은 삼일고가)였다. 

늦은 밤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 길, 막히지 않는 도로 위 서울의 풍경은 잔잔하고도 평화로웠다. 그와 포개진 심야의 라디오 음악을 들으며 그런 모습이 서울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렇게 자주 지나다니면서도 발아래에 개울물이 흐른다는 상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청계천은 고가도로가 만든 그늘과 무질서, 주차전쟁이 난무하는, 태초부터 쭉 그래왔던 동네라고 여겼을 뿐 별 다른 생각이 없었다. 2003년 여름 어느 날 청계고가를 뜯어내자 그곳에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럴 수가, 이 아래 물이 있었다니. 마치 황야에서 수맥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 책 <서울을 그리다>는 서울 사대문 안에 수맥같은 물길과 그속에서 흐르고 있는 역사의 이야기들이 보물처럼 담겨 있다. 마치 100년 전 서울지도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책은 서울 곳곳에 숨겨진 시간을 담아낸 스케치 여행기이기도 하다. 화려한 도시 서울, 무심코 지나가던 서울을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우리의 600년 역사를 만날 수 있다. 5년 동안 서울이 가진 이야기에 귀 기울여 온 저자 이장희는 굳이 멀리 떠나지 않아도 역사의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서울 이야기를 소개한다. 조선시대의 건물부터 아련한 추억이 담긴 도심 곳곳, 역사가 숨어있는 터 위에 새롭게 지어진 건물까지. 섬세한 일러스트로 그려낸 서울 곳곳의 풍경과 역사적 정보를 곁들인 짧은 이야기로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서울의 풍경을 스케치로 담아내고 있는 보기드문 책이다.

종로, 명동, 동대문... 흔히 지나다니는 곳곳에 숨겨진 사연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먹먹해 지는 역사적 사실이 담겨 있는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흥미로움과 놀라움이 교차했다. 데이트, 쇼핑, 영화보러 자주 오갔던 서울의 대표 거리 명동 길거리에 '이재명 의사의 추모비'가 있다는 사실도 그런 것들 중 하나. 그의 이름은 모르나 매국노 이완용은 다 알 것이다. 이재명 의사는 이완용을 죽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현장에서 체포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이다. 만약 그의 암살 계획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누군가는 그들을 오래도록 기록하기 위해 추모비를 세웠지만 흘러버린 시간 속에서 잊혀져갔다.


덕수궁 골목의 별칭이 '덜덜골목'이 된 까닭

 

조선시대 서울에는 인왕산 호랑이보다 곶감보다 호환마마 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었다. '한양 호랑이는 수진궁 귀신이라야 쫓을 수 있다'라는 말까지 나온 종로에 그 터가 남아있는 수진궁 귀신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무척 흥미로웠다. 재미와 흥미로운 이야기외에 슬픈 역사의 이야기들도 몇 가지 가슴에 남는다. 그 중 '덜덜골목'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는 덕수궁 골목길에 대한 사연은 약소국의 서러움과 아픔이 절절히 서려있다. 

 

러시아 대사관에서 덕수궁으로 이궁까지 한 고종은 왕비 시해 사건 다음부터는 밤이 두려웠는지 새벽 까치 소리를 듣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훗날 상궁들은 전한다. 그리하여 고종 황제는 궁의 밤을 낮같이 환히 밝힐 목적으로 전기 사업을 명한다. 한 나라의 국왕이 자기 나라, 그것도 자기 궁 안에서 살해의 위협에 겁을 먹고 이사를 다녀야 하고, 밤이 무서워 불을 밝혀야만 했던 시대, 전깃불을 밝혀야 했던 이유, 덕수궁 골목에서 나는 요란한 전깃불 소리는... (본문 가운데)


더불어 전철을 타고 언제든지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좋은 여행지와 유서깊은 명소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많은 내외국인이 쇼핑을 목적으로 명동을 찾지만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내진•내화 설계가 된 한국전력 사옥을 비롯해 과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상징하는 명동예술극장, 유리를 외장재로 사용한 최초의 건물인 유네스코 회관과 그 옥상에 있는 작은누리 생태공원 등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다. 


걷고 싶은 서울 거리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정동길에도 상하이에서 직접 가져온 벽돌로 쌓은 옛 신아일보 별관, <장독대> <장밋빛 인생> 같은 조형물, 지금은 역사박물관이 된 배재학당, 덕수 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한 첫 방송터,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 등 다채로운 매력이 숨어 있다.  


권율, 김종서, 손순효, 이황, 정도전 등 우리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의 생가나 몇 백 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왔지만 동네 주민들조차 그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딜쿠샤 은행나무, 수풀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운강대 각자(刻字) 등 옛 흔적을 찾아다니며 저자는 개발에 밀려 역사적 유적지가 말없이 사라지는 현실을 저자는 몹시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마냥 옛 서울이 좋았지 하고 감상에 젖는 것은 아니다. 세종로 횡단보도나 광화문광장, 조금씩 옛 모습을 찾아가는 서울성곽,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비, 청계광장에 세워진 다슬기 모양의 ‘스프링(Spring)’ 같은 조형물 등 서울의 공간을 새롭게 채워가는 것들에 대해 다루면서 앞으로의 서울에 대한 기대감도 열어둔다. 

서울은 골동품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기체이기에 오늘도 자동차 내비게이션 회사에서는 지도를 수정하느라 분주하다. 많은 옛 건물이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사라져갔다. 둘러보면 한국전쟁 이후의 모습, 나아가 잘 다듬어진 신도시의 모습이 주를 이룬다. 역사도시 라기에는 초라할 정도다. 그래서 더욱 사라진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이제는 새로 지어진 고층건물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려진 옛이야기와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서울의 시간을 그려보고 싶었다. 내 스케치 속 서울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계속해서 변해갈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의 서울 스케치 여행 또한 내가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진행형이다. (본문 가운데) 


스케치가 가진 큰 매력 중 하나인 '느림의 미학'은 책장을 좀 더 느리게 넘기게 되고, 좀더 특별한 무언가를 선사한다. 저자처럼 서울을 스케치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멍하니 바라만 봐도 괜찮다. 그저 그 장소에 머물며 지나가는 사람들,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서울 여행은 충분히 알차다.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았지만 서울에 대해 잘 몰랐기에 서울 스케치 여행을 시작했다는 저자 이장희와 함께 서울 곳곳을 누비는 동안 분명 서울은 그전과 다른 의미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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