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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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모르겠고, 책에 그려진 탐스러운 복숭아는 영화 아가씨의 하정우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면 말고.


학창시절 국어와 문학 시간을 가장 좋아했지만, 고전 문장을 다루는 시간 혹은 시조를 읊는 시간만 되면 견딜 수 없는 따분함과 이해할 수 없는 외계 언어의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분명 국어시간임에도, 왜 따분하게만 들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한문을 읽는 방법, 예전 표기법을 외우는 방법 등등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막막함이 그렇게 만들었다.
오로지 재미나게 들었던 것들은 야사였다.

그리고 세월 지나 국립 중앙 박물관이나 덕수궁 미술관에서 당대 선비들의 그림과 글을 볼 수 있는 전시회를 했을 때, 친구들과 구경하면서 든 생각은 선비들도 덕질을 하는구나. 
선비들도 매란국죽만 그린 게 아니었구나. 
오늘날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해도 버금갈 정도의 아기자기한 그림이나, 문장의 내용들을 보면서,
조선을 사는 선비들의 일상이 늘 근엄하지만은 않았겠구나 싶었다.
인스타그램에서의 인증샷처럼 보이는 화려한 개인 물품들의 그림들, 화구나 진귀한 과일들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우리네 일상생활과 그들의 일상생활도 별다를 게 없었구나를 느꼈었던 전시회였다.


선비의 덕질 클래스를 잘 보여줬던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인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실은 그 이외에도 여러모로 멋진 전시)


조선시대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는지라, 그나마 열심히 읽었던 건 몇몇 손꼽히는 사람들의 책들뿐. 이덕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물론 기억하고 있을 리도 없고, 알고 있지도 못했다.
알아낸 사실이라곤,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라는 것과 유명한 책덕후에다가 단 음식을 좋아했다는 점이었다. 그의 호가 오죽하면 선귤당이겠는가. 단 귤을 좋아하는 선비라니, 왠지 공감 간다. 
(그래서 책표지가 탐스러운 복숭아인 것인가 수긍이 간다.)

문장의 온도라는 제목을 보고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책이 아닐까 하고 착각을 했지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자고로 최고의 글쓰기의 스승은 많이 쓰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좋은 문장을 많이 접하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늘 좋은 문장의 책을 읽는 것을 권장하셨고, 통신체와 줄임말 등이 만연한 유행 소설들을 읽는 걸 좋지 않게 생각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문장의 온도는 간결한 문장과 담백한 표현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일상을 표현한 그의 문장들은 참 아름답다.


어찌 보면 이 책은 책 덕후인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의 마니아인 한정주 고전연구가의 애정 어린 책이다.
책덕후를 책덕후가 소개하는 책이라니, 참으로 흥미롭지 아니한가.
수능세대라 원문으로 이덕무 문장의 아름다움을 직접 해석하고 공부하는 흥분을 함께 느낄 수 없는 아쉬움이 크지만, 책을 읽다 보면 정화되는 느낌이다.
그동안 얼마나 복잡하면서도 뜻이 잘 전달되지 않는 문장에 오염되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몇 번을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그렇기에 쫓기듯 이 책을 읽지는 마시라 권하고 싶다.
정말 고요한 어느 날 밤, 마음의 안정이 필요할 때 이 책을 소리 내어 읽는다면 더욱 좋겠다.

책은 이덕무의 소품문인 이목구심서와 선귤당농소의 문장들로 이목구심서의 문장들은 대부분 읽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선귤당농소의 문장들은 표현을 참 맛깔스럽게 잘했다. 
후자의 문장들을 읽으면 이덕무가 이 글을 작성할 때 당이 몹시 당겼나 보다 싶을 정도로 배가 고파진다. 
그만큼 문장의 표현력이 선명해서 그린 풍경이 눈에 확 떠오른다.

가장 공감 가는 문장들, 혹은 다정하게 토닥이는 문장들은 4장 '세상에 얽매이거나 구속당하지 않겠다'에 가득했다. 그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자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문체가 있어서 글은 귀중한 법이고, 

그런 글을 쓰기란 쉽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문장.


조선의 선비가 전하는 셀프 위로의 방법 책. 무언가 우아함이 느껴진다.


요즘 시대에 살았으면, 너무나 잘 살았을 시대의 선구자 이덕무. 

이미 최근 트렌드인 나 홀로 놀기의 달인이 아니던가.


독서와 가난, 웃음에도 등급과 품격이 있다니 역시 선비의 글답다.


인생을 이미 먼저 산 선배의 느낌이 드는 문장들.


유난히 춥고 사건사고가 많은 요즘, 잠들기 전 한 문장씩 아껴서 정독하거나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읽어도 좋은 문장들이 가득한 책이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귤차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면, 선귤당농소가 더 읽고 싶어진다. 이유는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 그렇지만, 표지의 먹음직스러운 복숭아를 보면서, 아가씨의 하정우를 떠올리는 나는 틀렸다. 


잘 익은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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