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지옥에서 왔습니다 - 방송월드에서 살아남은 예능생존자의 소름 돋는 현실고증
김주형 지음 / 북폴리오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을 본 순간 떠오른 크리스마스의 악몽

게임회사나 미술관에서 근무하면서 깨달았던 점이 있다.

타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일하는 건 고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즐기는 게임회사에서 운영파트에서 일했던 나는 3교대 근무를 했었다. 루틴이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은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줬다. 미술관도 마찬가지, 남들 놀면서 데이트하는 모습을 빨간 날 없이 주 6일 근무해야 했다. 최저 임금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미술관을 빨리 닫는 동절기에는 좀 더 일찍 끝났지만, 덩달아 수입도 줄었다.

그렇다면, 재미를 추구하며 최신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PD로 일한다는 건 어떨까?

평소에 노잼 캐릭터에다가 TV에서 가장 보지 않는 프로그램은 예능 프로그램이다.

주로 뉴스, 다큐멘터리, EBS 교육방송 애청자이고, TV로 지대넓얕의 지식을 쌓고 정보를 얻는 사람이어서인가. 예능을 보는 것이야말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고, 인기 있는 드라마 정도만 간혹가다 본다. TV로 가장 많이 보는 콘텐츠는 영화 관련 프로그램 정도다. 사람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나는 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나 유튜버와 SNS, 음성 기반 플랫폼으로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되는 시대.

주로 글쓰기 중심 콘텐츠를 작성하지만, 그 외에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으로 콘텐츠 제작이 기본이 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자신의 정체성과 기록이 브이로그로 대체하는 영상 시대 속에서 나만의 개성을 지닌 콘텐츠를 어떻게 제작할 수 있을지 다들 고민이 많다.

요즘은 유명 유튜버가 오히려 방송국 콘텐츠를 제작하는 곳으로 팁을 전수하기 위한 강연을 가고 있다. 역으로 치열했던 방송국 예능 PD로, 일명 재미지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경험담은 콘텐츠 춘추전국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날로그 시절의 끝자락 무렵에 공대를 졸업하고 방송국에 입사해서, 엄청난 변혁기를 몸소 20년간 겪어왔다. 카메라 한대 들고 촬영하던 시대는 가고, 프로그램 하나 찍을 때도 여기저기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시대가 왔다. 공중파 TV에서 케이블 TV 시대로, IPTV에서 OTT와 유튜브, 모바일 시대로 콘텐츠를 접하는 플랫폼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그 모든 걸 겪으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노하우가 뭘까 궁금해졌다.


 


책을 막상 읽어보니, 노하우 전수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대신 시시각각 변화하는 콘텐츠 시장에서 어떤 상황을 겪었고, 어떻게 헤쳐왔는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방송 PD라는 직업과 방송국이라는 직장에서 어떻게 생존했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뭔가 특별한 내용이 있을 거라 기대해서 처음엔 살짝 실망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읽으면서 어딘가 동질감이 느껴지는 내용이 많았다. 장소가 방송국이었을 뿐, 당시 직장을 다니면서 이직 아닌 전직을 했던 나의 험난한 직장 생활과 뭔가 많이 닮아있었다.

사수 없이 일을 혼자 배워서 자신의 자리를 알아서 잡아나가야 했던 상황들, 처음엔 잘 몰라서 경험하면서 배우곤 했던 기억이 난다. 배우고 가르침 받는 상황에도 한계가 있어서 목마른 알아서 공부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터득해갔던 지식들. 초반에는 빨리 배워야 했기에 조바심이 많이 났지만, 버티고 반복하면서 실수를 점차 줄여나갔던 시간들이 기억이 났다. 요즘처럼 직장 생활 환경이 험난한 상황 속에서, 2000년대 초반의 방송국에서 버티면서 생존한 기록이 막 직장 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방송국이나 예능 분야, 내 콘텐츠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참고할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다 읽고 나서 들었다. 멱PD(멱살 잡고 싶은 PD)는 어떻게 방송국과 콘텐츠 시장에서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담담하고도 상세한 자기고백 에세이다.


 

 



크게 3파트로 나누어져 있는 책이지만, 현재부터 과거까지 어떤 상황을 겪어왔는지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콘텐츠 시장을 떠올려보면 2000년도 초중반쯤엔 공중파의 뉴스와 식상한 드라마와 예능 프로가 보기 싫어서 종합편성채널과 TVN으로 눈을 돌렸었다. 무엇보다 당시에 나는 공중파를 거의 보지 않고 미국 드라마와 영국 드라마에 푹 빠져있었다. 한국 드라마나 예능을 보게 된 계기는 종합편성채널과 TVN이 컸다.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공중파의 시청자들을 서서히 종합편성채널과 TVN으로 갔다. 아마도 공중파의 인기 PD와 인기 MC나 뉴스 진행자들이 간 게 처음엔 컸지만, 프로그램 자체도 공중파에서의 틀을 깬 작품들이 많아서 신세계를 본 기분이었다. 그 당시쯤 공중파 PD를 한다는 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결국 공중파에서도 기존의 틀을 깬 새로운 작품들을 서서히 선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 모두 사전 제작이 되어 국내뿐만이 아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전파되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국내에서 안되면 해외로, 우리나라 프로그램이 잘 먹히는 다른 나라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 컴퍼니상상

선배인 장혁진, 조효진 PD, 멱 PD란 별명의 김주형 PD

책은 2019년에 방송국에 사직서를 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유는 번아웃이나, 힘들어서가 아닌 새로운 플랫폼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사표를 내고 먼저 사표를 낸 선배들이 만든 회시에 정착해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려 했다. 여의도-목동이었던 방송 라이프는 상암으로 바뀌면서 중국으로의 더 큰 도전이 있었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수인 한한령(중국인들이 한류 콘텐츠를 비롯한 각종 한류 문화를 금지시키기 위한 조치의 일환에 따른 금지령)으로 모든 프로젝트가 엎어질 상황이 되었다.

시작부터 이직 후 위기의 순간을 묘사하니, 앞으로의 상황이 얼마나 궁금해지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감탄했던 부분은 확실히 타고난 스토리텔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우연히 퇴사한 방송국에서 만났던 인맥은 마침 넷플릭스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순발력으로 변화의 파도를 다시 갈아탈 수 있었다.


 

 

© 컴퍼니상상, NETFLIX

공중파 PD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먼저 퇴사한 선배들이 만든 회사와

프로젝트에 합류해서 제작함 프로그램들.

현재를 이야기하다가 문뜩, IBM 입사가 꿈이었던 공과대생이 어떻게 방송 PD를 꿈꾸게 되었는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넘어간다. 방송국에서 PD로 일한다는 비현실적인 일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외국계 기업에서 유연한 근무를 하려고 했던 대학교 시절.

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고, 아침잠이 많아서 오전이 없는 자율 출퇴근을 하는 듯한 느슨한 분위기가 맘에 들었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대기업 해외 마케팅 부서에 합격했지만 입사까지는 1년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여기저기 가고 싶은 다른 곳에 입사지원서를 넣으면서 보냈던 대학교 4학년 봄. 우연히 듣게 된 주철환 PD의 취업특강 - 방송국 PD 되기가 결정적으로 운명을 바꿔놓았다.

적절한 시기에 멘토의 역할이 중요한 것처럼, 방송국 PD 면접을 볼 때 주철환 PD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필기시험까지는 개인의 능력이니 도와줄 수 없지만, 면접에 대해서는 조언을 해줄 수 있다고 한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한 것이 결국 예능 PD의 길로 인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작된 방송 라이프와 실제 방송의 세계는 학생 때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아침잠이 많아서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좋아했지만, 실은 전날 늦게까지 작업을 해서 아침 일찍 출근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 막연히 게임회사에 대한 로망만 품고 입사했다가 큰코다쳤던 기억이 떠올랐다. 막연히 꿈꾸던 직업에 대한 환상은 현실과 너무나 다르다.

예능국에서 시작하고 싶었지만, 맨 처음 가게 된 곳은 아침 프로그램인 SBS 모닝 와이드였다.

모닝 와이드하니까 <굿모닝 에브리원>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망해가는 아침 뉴스 프로그램에 입사하게 된 PD가 프로그램의 폐지를 막고자 끌어올리겠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모습이 너무나 눈물겹지만, 현직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아마 보면서 가슴이 울렁울렁했을 것 같다.


 



예능 프로그램을 하고 싶었지만, 교양국에서 일하게 되었고 3년 차 되었을 때 사표를 카드로 방송국과 딜을 해봤지만 결국 옮기게 된 것은 예능에 가까운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한때 대체할 영화 관련 정보는 독보적으로 가져왔던 <한밤의 TV 연예>에서 일했었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는 챕터가 PD님께는 너무 죄송하지만, 영화팬의 입장에서는 가장 재미있었다.

제시카 알바가 출연하는 <판타스틱 4> 호주 정킷 행사 취재에 대한 에피소드 중 그녀와 마주치는 순간에 대한 회상이 가장 부러웠었다.


 


 

© SBS

교양국에 있던 시절 몸담았던 프로그램

책을 읽다 보면 느껴지는 점이 있다. PD님은 상황에 결코 안주하지 않았다는 점.

같은 상황이었다면, 아마도 그 현실에 안주하면서 그저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자리 유지만 했을 나와 달리 PD님은 끊임없이 예능국 PD의 꿈을 놓지 않았다. 방송국에서는 교양국에서 예능국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다면서 <한밤의 TV 연예>와 <동물농장>쪽으로 보냈지만, 멱 PD님은 굴하지 않고 결국 입사 5년 만에 예능국 PD로 일하게 된다. 아이러니하지만, 예능을 잘 보지 않는 나는 <한밤의 TV 연예>와 <동물농장>은 참 열심히 봤었다. 요새도 <동물농장>만큼은 유튜브 영상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책 속에서 가장 재미나게 봤던 챕터였다.


 


그렇게나 꿈꿔왔던 예능국 PD가 되고 나서는 수월했을까?

교양국 PD에서 일하다가 와서 겪어야 했던 적응 시기, 빠른 변화 속에서 맡게 된 차례차례 맡게 된 프로그램들의 이야기가 주옥처럼 담겨있다. 또한 프로그램을 하면서 만났던 연예인들과 주요인물들과의 관계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적혀있다. 연예인이지만 결국 사람이고, 책에서는 사람과의 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예능국 PD로 일하면서도, 역시 변화를 추구했다.

인기 프로그램이자 주력 프로그램인 런닝맨에 몸담았고, 중국판 런닝맨도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갔지만, 김주형 PD는 만족하지 않았다. 새로움과 신선함을 추구해야 하는 성향일 텐데, 프로그램에 너무 오랫동안 묶이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 같다.

예능 프로그램이란 게 참 기구하다. 잘되면 정말 좋다.

좋긴 한데, 잘 되는 경우에는 끝이 없다.

워라밸 따위는 가슴에 품고 기약 없는 노동 쳇바퀴를 굴려야 한다.

죽어야 끝나는 예능 프로그램의 운명.

손뼉 칠 때 잘 떠나는 것, 꼭 방송 일이 아니더라도 모든 일에서 일하는 자들이 꿈꾸는 것일 거다. 그러나 보통 예능 프로그램들의 운명은 그렇지 않다. 손뼉 칠 때는 절대 떠나지 못한다. 그 박수가 없어지고 사라질 때 외로이 떠난다.

재미지옥에서 왔습니다. - 166-167P


 

 


 


 


예능국으로 오면서 몸담았던 프로그램들

그리고 가장 대표작이 된 작품들

PD라는 직업 자체를 처음부터 꿈꾸지 않았고, 외국계 기업에서 일하고 싶었던 공과대생의 생뚱맞은 선택의 연속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예전 취업 시기를 앞뒀던 내가 떠오른다. 졸업 후 동기들과 통화하면서 게임회사에서 일한다고 하면, 의외로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했던 경우가 더 많았던 시대를 살았었고, 문송합니다의 문과에서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했던 과거도 떠올랐다.

이 책은 아마도 모든 콘텐츠 제작자들이 읽어야 할 책일지도 모른다.

또는 PD나 콘텐츠 기획자의 꿈을 막연히 꿈꿔왔던 사람들, 진로를 그쪽으로 잡고 있는 학생들이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다. 처음엔 노하우가 궁금해서 읽게 되었지만, 어찌 보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인생과 직장 생활 속에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잘 알려주는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살짝 안도한 부분도 있다. 변혁의 시대를 지나가면서 예능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도 혼란과 방황을 겪었었구나.


 



인생에 정답은 없듯이, 방송도 그렇다.

누가 제대로 알려주고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습득해나가고 찾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무수한 기획과 실패, 시청률에 오르락내리락 요동치는 마음, 그 속에서 정신줄을 놓지 않고 안주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의 김주혁 PD가 있게 한 모든 것이 아니었을까?

PD님의 마지막 조언을 남겨본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단 한 가지 만이라도 새롭다면, 아마도 성공한 기획이다.

이곳은 재미있지만, 지옥이다.

이 지옥행 열차에 오르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말씀드리고 싶다.

진부한 조언으로 들릴 수 있지만, 평소 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으시라.

얕고 넓게, 그게 더 좋다. 대중의 취향은 너무나도 다양하며 예능 소재는 그 한계가 없다.

'즐기는 사람 못 이긴다'라고 했다. 이곳은 딱 그런 곳이다.

즐길 수 있도록 지금 무엇이든 경험하고, 체험하고 느꼈으면 좋겠다.

재미지옥에서 왔습니다 - 177P

더불어 방송국에서 일하는 PD 님들이 보기 싫을 영화 리스트도 소개해 본다.

굿모닝 에브리원 : 지역 방송 PD가 시청률 최하 모닝쇼의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왓챠, 티빙, 웨이브)

레이트 나이트 : 심야 토크쇼 진행자 캐서린은 떨어지는 시청률로 하차할 위기에 처한다. (왓챠, 티빙, 웨이브)

더 인터뷰 : 북한 지도자를 인터뷰하러 떠나는 토크쇼 제작진에게 암살 제의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소동 (넷플릭스)


 

 

방송국 PD가 보기 싫을 영화 리스트 굿모닝 에브리원, 레이트 나이트, 더 인터뷰

이 글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