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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세트 - 전2권
말런 제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평점 :
책을 읽다 잠이 들어버렸다. 꿈에서 나는 갱단의 일원이 되어 아드레날린 터지는 총질과 모험을 했고 잠에서 깬 후에도 그 잔상이 계속 남았다. 온통 노란빛으로 그려졌던 내 꿈속의 세계는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의 장소인 코펜하겐시티였고, 에이트레인즈였다. 이 책에 대한 인상이 강렬했던 것은 비단 19금, 아니 39금적인 욕설과 높은 수위로 쉴새없이 몰아치는 대사들 때문만은 아니다. 평소에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는 자메이카라는 나라의 속살을 다 보여주어서만도 아니다. 화자만 13명에 달하는 처음 보는 소설구조에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읽어야 하는 긴장감 때문만도 아니다. 이 책을 이끌고 가는 ‘밥 말리 살해시도’라는 모티브는 그저 수단이었을 뿐 말런 제임스는 독자들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들려준다.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는 표면적으로는 자메이카의 정치 이야기, 그 가운데서 평화를 외치는 밥 말리의 활약 같지만 이게 그렇게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1976년 냉전의 한복판에서 1991년 냉전의 종식까지 세계사를 관통하는 테마에 자메이카의 복잡한 정치상황과 CIA의 활약(?)을 통한 미국의 입장까지 여러 주제가 담겨있다. 영화 스크린을 문자로 구현한 듯한 저자의 현란한 말발에 취해 저자가 곳곳에 심어놓은 신랄한 조롱과 풍자를 놓친다면 이 책을 다 이해했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이 책에서 인상적인 몇 가지 중에서 먼저, 이 책의 특이한 구조를 들고 싶다. 독자를 긴장시키는 여러 화자들은 돌아가면서 자기의 경험, 생각, 대사를 읊는다. 이들은 죽어서도 계속 말을 하고, 말하면서 생각하기도 하는, 말그대로 ‘프리스타일’로 이야기한다. 자메이카 스타일로, 라스타 식으로, 영어도 스페인어도 아닌 파투아로..생각해보면 점잔빼는 여느 책들보다 훨씬 우리의 생각구조를 그대로 활자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중간중간에 욕도 섞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저자식 화법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터뷰 형식의 소설 구조가 더욱 진실성을 갖추게 된다.
또한 이 책의 주인공 같지만 한 번도 제대로 등장한 적은 없는 우리의 ‘가수’ 밥 말리를 중심으로 엮인 사람들이 방사형 구조로 인터뷰를 함으로써 우리에게 ‘가수’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독특한 형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가수’와 그날의 일에 대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들려준다. 그런데 분량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제목은 분명히 ‘간략한’(brief) 역사인데..물론 그날의 살해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역사의 한 페이지는 끝나고 개개인들의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적 사실은 정말 간략하다. 신문 한 귀퉁이로 요약이 가능할 정도로..그 간략한 사건을 중심으로 개개인들의 삶은 뻗어있고 지속되며 그에 대해 느끼고, 그로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연속해서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관점에서 여러 인물들이 인터뷰를 해야 잠시나마 그 사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실체적 진실에 다가갔다고 볼 수는 없을 만큼 간략한 수준인 셈이다.
다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자메이카의 추악한, 한편으로는 불쌍한 현실이다. 게토 지역에서의 살인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파파로에서 조시 웨일스로 이어지는 권력과 여러 죽음들이 태생부터 영국과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왔던 자메이카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맨리 수상이 밥 말리를 이용해 평화콘서트를 기획하는 것도 우매한 자메이카 대중을 이용하려는 술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내려갈수록 자메이카의 뒷골목 현실 뒤에는 강대국들의 이기적인 면모가 깃들어 있음을 보게 된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자메이카를 통해 세계의 패권이라는 ‘미국’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들여다본다.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지독한 공산주의 포비아에 걸린 미국이 CIA 등 어둠의 경로를 통해서 한 나라의 내정에 개입한 (자메이카 뿐만 아닌 니카라과, 쿠바 등) 역사적 실례 들은 차라리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소련에 대한 대항마로 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을 원조하고 30년 후에 ‘9.11 테러’로 보답받은 것, 이란 팔레비 왕조를 지원하고 지금은 ‘악의 축’으로서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자메이카도 마찬가지이다. 노동당을 지원하려던 미국의 의도는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오히려 마약상의 유입이라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또한 니나 버지스가 도카스 파머가 되어 그토록 그리던 미국에서 겪는 차별의 삶을 통해 미국의 이중면모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저자는 고국 자메이카를 통해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의 정치논리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각 당의 당수들, 갱단 두목들이 싸웠다가 평화 제스처를 취하다가 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세계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작금의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고 현재의 국제정치상황에도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다.
‘위험한 거지, 평화라는 건. 평화는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니까.~평화는 사람을 부주의하게 만들거든.’(2권 201p)
‘이 평화 어쩌고 하는 게 자네를 그토록 오랫동안 따라다닌 것 아닌가. 나 역시 놓여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일세. 심지어는 평소 최악의 상황만을 기대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랬어. 겨우 두세 달이지만 평화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기 시작하더니 그다음에는 많이 생각하게 됐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거라고는 평화밖에 없었다네. 마치 비가 오기 전에 불어오는 바람에서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2권 496p)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평화’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궁극적으로 이 책은 ‘평화’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든 난리통 속에서 결국 평화는 이뤄졌을까? 저자는 각각의 화자들의 삶을 통해 열린 결말을 제시한다. 평화는 위험한 거라고 하면서도, 그럼에도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저자의 말처럼 ‘가랑비에 옷 젖듯’ 가수의 평화 캠페인에 어쨌든 사람들이 젖는다는 점에서다. 한 편의 갱스터 무비를 본 듯한 독서 후에 ‘평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끔 만드는 저자의 역량에 감탄하며, 책의 화두가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에도 통용될 수 있다면 ‘대작’으로 인정받기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