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비밀 - 운명 앞에 선 인간의 노래, 희랍 비극 읽기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4
강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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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전장에서 돌아온 남편을 죽이고', '아들은 그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인다.' '한 여인이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다.'어느 막장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들은 바로 우리가 늘 칭송해 마지않는 희랍(그리스) 비극의 소재이다.(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누구나가 희랍 비극을 읽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희랍 비극을 처음 접하는 독자라면 이런 부담스러운 소재들 때문에 읽는 것이 꺼려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희랍 비극을 읽고, 또 <비극의 비밀>같은 해설서를 통해 그 의미를 찾아가보면, 왜 희랍 비극이 인류의 고전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을 따라 읽으면서 새로이 발견해 낸 희랍 비극의 특징들이 세 가지가 있다. 먼저, 이 책을 읽고 나서 깨진 편견 중 하나는 바로 '비극'이라는 용어에 관한 것이다. 단순히 '슬픈 극'이 아닌 '인간에 대한 성찰에 관한 극'인 것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읽으니 그제서야 비극의 의미가 잘 와닿았다. 그래서 해피엔딩인데도 비극으로 분류되어진 여러 작품들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비극이 슬픈 극'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등장인물에게 닥친 불행의 크기와 거기서 비롯된 고통의 깊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희랍 비극이 강조하는 것은 불행과 고통보다는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지이다. 109p

 

 

두번째로, 희랍 3대 비극 작가들의 작품에는 각각 시대별로, 작가별로 다른 특성이 있다는 점이다. 같은 소재를 두고 이 세 비극작가가 어떻게 해석하여 자기만의 작품을 창조해냈는지 비교하는 것은 좋은 감상법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과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가 아버지 아가멤논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해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이는 소재를 다른 작품들이다. 먼저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는 주저하고, 신의 명령에 마지못해 복수를 감행한다. 그러나 소포클레스의 오레스테스는 복수를 다짐하고 어머니에게로 돌아왔으며, 소포클레스는 아이기스토스보다 클뤼타임네스트라를 먼저 살해하게끔 배열함으로써 이를 보여준다. 확실히,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퀼로스 때보다 절대적인 '신의 뜻'에서 조금씩 빠져나와, 인간의 의지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중에 있다. 한편, 에우리피데스의 <엘렉트라>에서는 선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인간의 영역 비중이 커진 확연히 달라진 분위기를 반영한다.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가 어머니를 죽이는 장면도 결행에 찬 것이 아니라 살인 후 자책과 후회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페르시아 전쟁 등을 거치며 인간성의 상실과 혼란, 허무를 경험한 에우리피데스 당대인들의 신조를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희랍 비극의 주인공들에게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는 '영웅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의 해설을 따라가다 보니 그간 수없이 접했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보지 못한 면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전에 읽었을 때에는 그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 내지는 '오이디푸스의 휘브리스가 부른 비참한 결말'로만 여겼었는데, 하나하나 문맥과 그 의미를 곱씹다보니 '오이디푸스'의 영웅적인 면모가 들어왔다. 진실을 외면하는 凡人들과 달리 오이디푸스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진실을 추구했고, 그에 합당한 벌을 자신에게 내렸다. 또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도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의 영웅적 기개를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덫'이 아닌 '인간의 욕구와 행동에 따른 결과'를 강조한다는 것도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또다른 의미이다. 즉,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우리가 생각했던것 만큼 운명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율적 의지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어찌보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작품이었던 것이다.

 

신들이 미리알고 있는 사건들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인간의 욕구와 자발적 행동이다. 어떤 이해 못할 외적인 힘이 인간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결정해서 행동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결과가 신들이 예언한 것과 일치했을 뿐이다. 199p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 에서도 어머니로서의 한 여자가 감행하기 힘든 친자살해라는 주제를 놓고 메데이아 내부의 영웅적 기질이 승리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데, 이 역시 비극을 다르게 보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이처럼 비극은 인간이 불행에 빠진 것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고통받던 인간이 어떻게 역경에서 다시 일어서고 어떠한 비범한 자질로 극복해나가 한 차원 더 높은 단계로 자신을 끌어올리는지를 지켜보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는 여러 '비극의 비밀' 중 가장 의미있는 것은 바로 '파테이 마토스'(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가 아닐까 한다.

 

그 불행 속에서 더욱 빛나는 내면의 힘, 그 재앙속에서 인물들이 도달하는 어떤 높이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비극의 목적이 아닌가 싶다. 210p

 

 

결론적으로, 꼼꼼히 원전과 비교해 보며, 이 책을 완독하고 나니 왜 희랍 비극이 고전인지, 이 작품들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의미없이 지나칠 수 있는 대사들, 지문들이 다 교묘하게 극의 구성에 필요한 것임을 알고는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불필요한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다 의미있게 짜여져 있으니 니체의 말처럼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가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이 다다른 사고의 깊이와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해 낸 방식을 보면, 과연 인류가 지난 2500년 동안 진보하긴 한 것인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374p)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다.

 

읽는이의 배경지식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히는 만큼 자신만의 '비극의 비밀'을 발견하는 것이 독자의 바른 자세일듯 하다. 희랍 비극에 대한 해설서가 많지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 열혈독자로서 다른 작품과 희극에 대한 명강의가 또 나오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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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ggil 2015-08-05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당장 사러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