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인을 기다리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4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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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그림과 야만인이라는 제목의 단어에서 이 책 역시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 같은 제국주의의 위선을 꼬집는 책이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화자가 제국의 변방에 있는 마을의 치안판사라는 점, 그 화자가 문명인에서 야만인으로, 종국에는 제3자인 경계인의 자리에 위치한다는 점, 야만인의 애환보다는 문명인의 왜소함을 부각한다는 점 등에서 이 책은 다른 책들과는 달랐고 얇은 두께와는 달리 묵직한 무언가를 던져주었다.

 


이 작품은 무엇보다도 배경이 불분명하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소설의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면서 상상하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는 끝까지 보아도 그에 대한 단서가 없다. 흔히 야만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당시 핍박받았던 아프리카를 생각하며 읽다가도 겨울이 오는 사계절이 있어 다시 아메리카로 넘어간다. 광활한 산과 대륙이 펼쳐지는 모양새만 제시될 뿐 어떤 제국인지, 어떤 야만인인지가 제시되지 않는다. 야만인들도 유목민이라는 단서만 있을 뿐 그들에 대한 어떠한 외적 묘사도 없다. 물론 저자의 조국인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가서는 이 모호함이 작가의 의도였음을 깨닫고 작품 자체적으로만 즐길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시대적, 배경적 모호함을 의도함으로서 우리 머릿속에 생기는 선입견을 배제하고 야만인과 문명인이 아닌 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또한 인종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없다는 것은 편견을 심어주지 않은 채 그저 생활방식이 다른 유목민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고 그들과 선을 긋는 인간 세계의 부조리함을 보여준다. 아울러 이 책에서 나타나는 핵심 구도인 야만 대 문명의 구도는 어느 한 지역, 어느 한 시기의 사건이 아닌 어디에서나 어느 때이든가 일어났던 보편적인 현상임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작가는 철저하게 이 작품에만 집중하게끔 만들어놓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작품속으로 들어가보자.

 


먼저, 이 소설 속에서 정의되어야할 핵심 개념은 아마도 야만인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야만인이란 말은 제국주의가 번성하던 19세기나 20세기에 갑자기 생긴 말이 아니다. 중국인들은 예부터 자신과 다른 민족을 이족, 오랑캐 등으로 부르며 중화와 변방을 구별했고, 로마인들도 게르만족, 갈리아족 등 자신의 제국 밖의 사람들은 생김새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종족으로 규정, 야만인이라 불렀다. 우리도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야만인이었고, 우리가 보기에 일본도 그러했다. 그만큼 야만인은 상대를 낮잡아 비하하며 문명의 수혜를 받지 못한 미개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하나의 아이덴티티인 셈이다. 실제로 그들이 문명인인지 미개한지 여부는 차치하고 나와 다른 존재로 규정짓는 다는 점에서 야만인이란 용어의 유용성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야만인들은 무찔러야할 적이며 괴롭혀야할 대상이다. 단지 제국의 수호와 확장을 위해..따지고 보면 이들은 제국인들에게 먼저 어떠한 해를 가한적도 없다. 그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구현하며 살아갔을 뿐,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은 제국인들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제국은 정착을 기조로 하는 자신들의 삶에 유목이라는 다른 생활방식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문명 대 야만의 대립구도를 설정한다. 유목을 하는 이들을 미개로 규정하고 문명의 수혜를 받지 못한 끔찍한 적으로 상정함으로써, 정착민으로서 자신의 생활방식을 굳히려는 시도를 한다. 줄 대령의 군대 역시 제국의 영역 확보 정책에 의해 파견된 집단으로 보이지 않는 실체인 제국의 지령을 수행한다. 삶의 터전을 짓밟힌 것은 유목민들인데 그 터전을 제국의 것으로 여겨 수호하려는 비뚤어진 욕망이 야만인들에 대한 잔인한 고문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제국은 역사 속에 존재하고, 역사에 반해 음모를 꾸미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제국의 속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끝장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어떻게 하면 제국의 시대를 연장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 219p

 

여기서 화자인 주인공의 시점과 생각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는 자신을 문명인으로 보면서도 유목민들을 야만인으로 보지 않는 시선에서 시작한다. 초반에 그는 줄 대령의 군대가 가하는 야만인들에 대한 고문을 아프게 느끼지만 적극적인 저지는 하지 못하는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다. 그러다 그가 변하게 되는 계기는 그때 고문을 받고 혼자 남아 구걸하는 신세가 된 한 야만인 여인을 통해서이다. 노예와도 같은 그 여자에게 야릇한 감정을 느끼고 잠자리를 기피하면서 그녀에게 고통을 주면서도 또 사랑하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치안판사라는 그의 지위는 그가 그 문명세계에서 무시할 수 없는 자리에 위치해왔다는 사실을, 노인이라는 설정은 그의 연륜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음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저자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하찮은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녀를 자신과 함께 살게 해주고 또 고향에 데려다 주기 위해 몇 주간의 위험천만한 여정을 떠나게 된 사실은 야만인을 진정한 한 인간존재로 보기 시작하는 하는 계기가 된다. 그녀를 사랑해서 그녀가 자신의 세계에서 자신과 함께 하길 바라지만, 동족에게 가겠다는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갖은 고난 속에서도 그녀를 데려다주게 된다. 목숨을 건 시도로 인해 그는 돌아와서 갖은 고초를 겪는다. 감방에 수감되고 고문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게 된다. 야만인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고 그는 최고의 문명인에서 야만인으로 처지가 전락하게 된다. 문명인도 목을 매달 위기에 처하면 목숨을 구걸하는 야만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줌으로서 야만과 문명의 경계가 따로 없음을, 애초부터 똑같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야만인 여자를 집으로 데려다가 자신의 욕정을 채우면서,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고문 받았던 사실을 기억해내려 애쓰면서 화자는 자신의 모순과 위선을 자각하지만 그 후 자신이 고문받는 처지가 되자 야만인과도 같은 처지가 되었음을 절감한다. 후에 자유가 주어지고 문명인으로 복권된 그는 야만인도 문명인도 아닌 회색지대의 사람이 되는 모습을 보인다. 유목민도, 마을 사람도 아닌 어촌인들이 유목민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마을로 들어와 잠시 피해있을 때 주인공도 그들과 같이 했듯 야만인이 되어본 그는 야만인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 이전에 똑같은 사람임을 자각하고 자신을 어디에도 규정시키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간종은 수렵·채집시대에서 농경시대로 넘어갔지만 이것이 꼭 문명의 발전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시사했다. 생산량이 많아지고 농경생활을 영위함으로서 소유가 많아지고 안정성은 높아졌지만 이것이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이나 행복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유목민과 정착민은 생화방식이 다를 뿐 이들을 상하관계나 역사의 발전단계에서 하위 단계에 속한다고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생활방식에 익숙해지면 전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고 필연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에서도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야만인들이 빵맛을 보게 되면, 오디 잼이나 구스베리 잼을 바른 갓 구운 빵을 맛보게 되면, 우리가 사는 방식에 끌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평화로운 곡물을 재배하는 방식을 아는 남자들의 숙련된 기술과, 온화한 과일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아는 여자들의 기술 없이는 살아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255p

 


쿳시가 노벨상 작가라는 것을 이 책을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 작품은 여러모로 노벨상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작품이다. 인종과 차별에 대한 어리석음을 꼬집으면서도 인간보편 정서인 그 어리석음을 또 보여주는 수작이다. 주인공의 극적인 신분변화와 고통은 몰입감과 함께 고통을 동시에 독자에게 전해준다.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처럼 고문 부분에서는 차마 더 읽어 내려가지 못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특히나 고문을 방조하던 위치에서 고문을 받고 치욕을 당하는 노판사의 감정과 고통에 이입되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이런 고통을 가할 권리는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생각과 함께 인간의 잔혹함은 어디까지인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우리 안에 죄악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에게 가해야 한다. 241p

 

이 책의 힘은 바로 거기에서 온다. 인간 평등에 대한 공허한 슬로건을 외치기보다는 이런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더 강렬하고 와 닿는 법이다.

 

나는 역사의 바깥에서 살고 싶었다. 제국이 백성들에게 강요하는, 아니 사라져버린 백성들에게조차 강요하는 역사의 바깥에 살고 싶었다. 나는 야만인들에게 제국의 역사를 강요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것이 치욕의 원인이라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254p

 


이런 점에서 책을 덮으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제목에서 야만인을 기다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야만인은 제국인들이 경계하고 오지 못하게 할 적인데도 주인공이 야만인을 기다리는 이유는 제국의 모순적인 면모에 환멸을 느끼고 오히려 자신을 해방시켜 줄 야만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더 이상의 문명과 야만의 구별은 없는지, 또 다른 제국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악이자 희생자인 야만인을 양산해내고 있진 않은지 계속해서 자문하게 된다. 이것이 이 소설의 힘이고 서사의 강점이다. 우리에게 우리를 인간이게 해주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해방시켜줄 우리안의 야만인을 기다려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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