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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첫사랑
배수아 지음 / 생각의나무 / 1999년 12월
평점 :
절판
흔히 배수아의 소설에 가해지는 혹평은 그 안에서 어떠한 발전이나 전망을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소설집 안에서도 주인공들의 성장을 보기는 어렵다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나는 배수아가 지금 여기를 메쓰로 도려내 펼쳐놓듯 그린 소설 몇 편에서 큰 울림을 느낀다.
사실 '와이셔츠'나 '병든애인' 같은 단편들의 문제의식이나, 구조와 캐릭터들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소설에서 반복하여 그리고 있는 것들이다. 이런 단편들에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은둔하는 북의 사람', '징계위원회', '다큐채널, 수요일, 자정' 등은 작가의 분명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 스스로도 한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 소설에서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그런 새로움은 작가가 좋아한다는 강경애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원천일 것이다. '강경애 문학의 강렬한 계급묘사가 인상적이었다.'고 배수아는 밝히고 있다.
과연 '징계위원회'등에서 인물묘사는 상당히 계급적이며 작가 특유의 갈등적 인간관계 묘사와 겹쳐져 지금 여기의 모습이 입체화적으로 잘 담아지고 있다. 그것은 하루키류의 가벼운(의도적이겠지만) 묘사와 다른, 고통스러운 성찰의 기록이다.
소설책 한 권이 인간에 대해 영향줄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배수아의 소설은 쉬운 성숙, 값싼 감동으로 가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쓴 약과 같다. 어쩌면 쓴 맛 뿐이고 약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지금 여기서 성장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배수아도 언젠가는 아픔의 승화나 관계의 성숙을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거듭되어 나타나는 종교적 상징들이, 그 방향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한다.('개종'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