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장일순 지음 / 녹색평론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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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사에서는 책을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장정이 화려하거나 튼튼하다는 말이 아니다. 재생지를 사용하고 코팅이 없어서 좀 부실하다. 하지만 싼 값에 꼭 필요한 책들을 만들어낸다.

<오래된 미래>를 읽고 이것을 읽었었다. 장일순씨는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지식인들과는 달리 글을 쓰지 않았다. 한국 지식인들, 특히 장선생과 같이 서울대출신자는 글을 쓰고 이론을 세우는 쪽으로 작업해왔다. 장선생은 그저 난초나 그리고 가끔 강연하는 일이 지식인다운 전부였다. 그는 그냥 '한살림공동체' 도운 일꾼이었다.

많은 비틀거리는 지식인들을 보면서 장일순선생의 삶을 그래서 더 떠올려보게 된다. 많은 문자들을 거느린 지식인들, 그들도 나름대로 의미있었겠지만 우리에게 조용하고 해맑게 웃는 일꾼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지.

표지의 장일순선생의 얼굴사진을 보라. 본문의 강연녹취내용이나 인터뷰 곳곳에서 그의 곧은 유머와 근면한 삶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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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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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첫사랑>부터 배수아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비문도 많이 줄었고, 소설의 구성도 교묘해졌다. 그런데 그 반작용인지, <내안에 남자가 숨어있다>같은 수필은 좀 심하게 엉성했다. 배수아는 공무원월급도 있는데, 왜 돈이 궁할까를 10초정도 생각해 보았다.

최신 장편소설(?)인 이 소설도 멍텅구리같은 책 장정때문에 더 어설퍼 보였다. 거의 더블스페이스에 좌우로 '지겨운' 그림들이 여백을 차지하는 통에 100페이지정도의 중편소설이 200페이지 넘는 장편소설이 되어 버렸다. 이거 편집한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배수아의 소설을 그의 쿨해보이는 외모와 함께 상품화하는 짓은 마구 달리고 싶은 배수아도 원했을수도 있지만, 그렇다해도 정말 재미없는 상품화이다. 그림이나 좀 많이 넣든지! 다른 문제는 책가격이다. 장정만 단순하게 했으면 <철수>처럼 정가 5천원에 팔 수 있었을 것을 50%나 비싸게 팔아먹었다. 인터넷 때문에 출판사가 망한다면 바로 이렇게 책을 편집해먹는 자들 때문일꺼다.

책 내용은? 배수아소설이 늘 그렇듯 그런 내용. 이번에는 대화들이 장난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는 대화의 장면을 잘 잡아냈다. 모두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끝없는 이야기들이 전화통에 쏟아져나온다. 컴퓨터가 우리 뇌를 흡수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네트워크화되고 있다. 이 지점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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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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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정글을 다룬 이야깁니다'라고 하면 이 소설은 정리되어 버릴 것 같다. 정글을 바라보는 문명인의 눈은 오리엔탈리즘과 흡사하다. 그곳은 원시적인 삶과 죽음이 있는 곳이고 홍진의 도시와는 다른 신비로운 피안의 세계. 김용옥씨 강의에 의하여 유명해진 말이지만 '자연은 그린벨트 구역이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본 자연은 반도시일 뿐이지 자연이 아니다.

세풀베다의 성실한 자료조사에 의한 이 책은 일차적으로 자연 속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틀니와 생활물자가 없어서 괴로운 늙은 사냥꾼. 맹수. 거친 사람들. 선진국 자본의 하수인들. 거기서 멈추는 것은 아니다. 이 별스런 노인은 세상을 초탈한 도인도, 현실에 막막해하는 늙은 원주민도 아니다. 그에겐 낡은 연애소설을 사 읽는 좀스런 취미가 있다. 이것은 도시인들이 낚시나 등산의 취미를 가지는 것처럼.

노인은 사람들이 크게 모인 도시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인간관계의 정황들을 사랑한다. 노인은 연애하듯 사냥물인 야수와 교감을 한다. 그 야수를 죽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새 연애소설을 읽을 궁리를 한다.

도시인인 우리는 여기 바깥을 시시때때로 꿈꾼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하면, 그 자연은 어디에 있는가? 전원주택이 자연인가? 국립공원이 자연일까? 석가모니가 생의 마지막에 대도시의 시장을 내려다보며 '참 아름답구나'라고 말했다고 전하는 불경의 뜻이 그 어디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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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트리를 듣는 여인들
오에 겐자부로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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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원에서 나온 오에 겐자부로의 24권 선집은 비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오에 특유의 상상력넘치는 책제목들이 그렇다. 곱게 양장된 이 책들은 잘 안팔려서 덤핑판매되어 영화소품으로 많이 쓰이기도 한다. (최근에 본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그랬다) 그 중에 한권인 이책은 더욱 나에게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 책을 처음만난 96년말은, 내 삶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이다. 눈앞의 문제에서 벗어난 곳에 있고 싶었다.

오에는 학창시절로부터의 20여년간의 작가생활 끝에 만져지지 않는 '덩어리'를 발견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상상한 이야기의 세계에서 돌아와 자기 삶에서 만난 이미지들을 이야기로 바꾸어내놓는 연작소설 작업을 하였다. 이게 그 첫 작업물이다. 그의 '덩어리'들은 모두 엽기적인 표정을 하고 있다. 외국회의에 참석했다가 정신병원을 점령한 환자들의 파티에 초대된다. 오래전 일본을 떠나 유태인과 결혼하여 신비주의적인 문학생활을 하던 동료의 시기를 받기도 한다. 수영장에서 강간살인을 한 수영선수와의 관계도 겪게 된다.

이 모든 사건들의 뒤에는 오에가 정신병원의 뒤뜰에서 본 거대한 '레인트리'와 그의 친구 작곡가 다케미추 도루에게서 들은 레인트리의 음향이 남아있다. 레인트리는 조롱처럼 생긴 잎사귀가 어제 내린 비를 오늘 오후까지 부려준다는 것에서 그리 불린다. 이 한그루 세계나무 아래에 서서 오에는 자기 주변의 폭력과 정신분열적인 사건들의 이미지를 바라다본다.

오에는 평생 '병약하고 순진한 상상력'이라고 공격받았다. 초기에는 우익적이고 현실적인 평론가에 의하여 그의 정치적순진함이 문제제기되었다. 오에는 실존주의적인 입장으로 그것을 방어하지만, 설득할 수는 없는 단계에 머무른다. 후기에는 주로 좌파에 가까운 언론에 의하여 그 실천적 무기력함을 비판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에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상상력에 의한 마음의 치료작업이었다. 나에게 또한 삶의 여러가지 괴로운 장면에서 오에가 그린 레인트리의 모습과 음향이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우리가 겪는 이 멍텅구리 세상의 한켠에서, 비를 뿌리는 괴이한 한 나무의 모습과 소리에 귀 기우려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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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장정일 지음 / 미학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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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비에서 구치소로 끌려가는 장정일의 눈빛에서도 시인을 느꼈다. 이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고, 자신이 겪고있는 부조리함에 순수하게 경직된 표정으로 대항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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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를 읽음으로써, 구할 수 있는 장정일의 소설을 다 읽게 되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압수되어 시장에서 찾을 수 없는데, 뭐 한 작가의 모든 것을 읽겠다는 생각은 없으니 딱히 관심가는 것은 아니다.

장정일 소설은 <아담이 눈뜰때>에서 이어진 하나의 연작소설같다. '아담'은 대구사는 재수생이 날라리 생활을 하면서 남창 아르바이트등으로 턴테이블과 뭉크화집, 타자기를 마련하는 내용이다. 90년에 <아담이 눈뜰때>를 쓰고, 92년에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쓰고, 94년에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를 썼다. 92년 소설에서 타자기를 마련한 소년은 표절작가가 되었고, 미친 은행원은 소설가로 성공한다. 94년 소설에는 소설가 은행원은 사이비교주가 되고 표절작가는 화냥년과 결혼하여 처제와 간통을 꿈꾼다.

끝없는 지리멸렬 이야기들을 연쇄시키면서 장정일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나는 외로울때 망상에 빠진다. 그때 그 시간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면. 그때 그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장정일도 참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설스럽다. 맞다. 그런데 이렇게 서늘한 외설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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