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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로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평점 :
판매완료

사실 이 책은 내 위시리스트에 재작년부터 있었는데 장바구니에만 열번쯤 담았다가 놨다가 한 책이다
파리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갔을 때도 이 책 원서를 발견해서 살까 말까 살까 말까 하다가
10유로, 9유로 이쯤 하는 책값이 그때는 부담돼서 못 사고 그냥 나왔었다
사실 그 때 나니아랑, 달과 6펜스 헌 책도 꼭 사고 싶었는데 없더라 아쉽게도. 괜히 그 옆에 앤틱 서점 한바퀴 둘러보고 나왔다.
초반에 페이스트리 너무 먹지 말고 그 돈으로 책 살걸 그랬지
뒤늦은 후횔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보니까 알라딘에서 중고 책을 판매하고 있는 거다. 오오 배송료까지 해서 5천원을 조금 넘는 착한 가격.
책 상태도 완전 좋다고 해서 결국 번역본으로 주문해선 오늘 두시간만에 다 읽었다.
이야기는 매우 담담하게 흘러간다.
알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난 지구, 아들과 아버지가 생존해 있다. 그들은 이야기의 시작점부터 끝까지 바다가 있는 남으로 남으로 걷지만 독자들은 남쪽엔 무엇이 있는지 왜 그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고, 날씨마저 떠다니는 재 때문에 늘 춥고 어둡다.
과거 가 무너지고 미래가 불투명하고, 확실한 것은 그들이 현재 살아있다는 것뿐이다. 이야기의 흐름도 현재에 집중되어 있다. 마치 이 아버지와 아들이 무너진 폐가를 뒤지며 과거의 문명 사회의 물건들과 음식들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들의 과거를 아버지의 기억 틈새로 조금씩 보여주기만 한다. 그들의 현재는 날씨처럼 뿌옇고 춥다. 싱싱한 음식은 남아있지 않아 그들은 누군가가 저장해 둔 통조림들을 먹으며 계속해서 길을 간다. 간간히 나타나는 다른 생존자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죽이고 심지어 잡아먹기까지 한다.
아들과 아버지는 길게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걷기만 할 뿐이다. 남으로, 바다로. 우리는 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니까, 라는 알 수 없는 말만 한다. 아버지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살아야 아들과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데, 그가 인간적일 때는 오직 아들과의 관계에서뿐이다. 아들은 아버지가 경험했던 전쟁 이전을 전혀 알지 못해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상상만 할 뿐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위해 과거를 아름답게 각색해 들려준다
이 건조한 이야기의 흐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아무래도 눈물 한방울 흘릴 수 없는 그들의 심리상태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하실에 갇혀 있는 벌거벗은 사람들을 구해 줄 수 없고 늙은 노인에게 음식을 주되 숟가락을 함께 줄 수는 없다. 그 사회에서는 정의와 인정이라는 것은 이미 메말라 없어진 과거의 것이다.
원작은 2006년 제임스 테이트 블랙 메모리얼 상,2007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오프라 윈프리 클럽 도서’ 에 선정되었고, 얼마 전 비고 모텐슨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눈먼 자들의 도시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바싹 마른 듯한 작품이다. 너무 쉽게 읽혀서 의외였다. 인간의 존엄성이 모두 사라진 공간에서 이 책은 조용하게 세상의 마지막 날 이후의 삶을 이야기한다.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풀어 나가지만 두려움이 조용하게, 뒷덜미가 선뜻하게 찾아올 정도로 생생하고 날카롭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염세적이고 사실적인 묘사들과, 숨을 깊게 들이 쉬었다가 내 쉬었을 때의 느낌을 주는 결말은 잘 썼다는 생각을 넘어 아름답게 느껴졌다.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원서로 다시 읽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