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이 시도 때도 없이 현실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장경제 속에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잠재적으로는 늘 존재해야 한다.  총파업은 메시아다.  국가라는 리바이어선과 마주선 잠재적 메시아.  단 우리는 이 메시아를 탈(脫)신학화해야 하고, 그 '힘'의 행사가 맹목적으로 흐르지 않게 늘 감시하고 비판하며 그 정당성을 물어야 한다.  '이성'의 포장지로 '힘'을 감추는 근대 자유주의의 위선,  '힘'의 망치로 '이성'을 두들겨대는 좌우익 탈근대의 악마성.  근대와 탈근대의 소모적 대립을 넘어서려는 나의 유물론은 그래서 힘의 비판, 폭력 비판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p. 40)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던 지식인들이 대거 환경론자들로 변신했다."  그 와중에도 빛나는 그의 우국혼.  빨갱이에 맞서 시장을 수호하는 '기사'님.  자유주의자는 쓸데없이 남의 신념의 색깔에 관심 갖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교양없다는 소리 듣습니다.  남의 머리통 속의 생각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말고, 그들이 실제로 하는 실천에 관심을 가져보세요.  그리고 그것만 평가하세요.  (p. 85)

진짜 자유주의라면, '자유'라는 말로 경제적 자유 이상의 것을 의미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교양이다.  또 시장을 만능 '해결'로 보는 수준을 넘어 동시에 그것을 '문제'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게 상식이다.  평등을 자유와 대립시켜놓고 '골라, 골라' 야바위를 하는 수준을 넘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평등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게 현대적 자유주의의 수준이다.  (p. 92)

흔히 '자유=민주'라 생각하나 실은 양자는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함축한다.  (p. 97)

그리하여 모던과 포스트모던의 변증법.  말하자면 정의와 연대에 기초한 거시 사회에 다양한 탈근대적 삶의 형태들이 서로 모순적으로, 그러나 상보적으로 접속을 하는 사회.  우리가 앞으로 지향할 사회의 모습은 그런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pp. 119-120)

미국에서 벌어진 '공동체주의 대 자유주의' 논쟁의 배경에는 레이거노믹스가 있다.  레이건의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은 빈부 격차를 심하시켜 미국의 사회적 통합력을 약화시켰다.  어느 사회든 두꺼운 중산층이 그 체제에 안정감을 주는 법이다.  중산층의 몰락은 사회를 양극화하여 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p. 121)

우리 지식인 역시 이제까지 권력의 밖에서 권력 그 자체를 비판해왔고,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좌파 이념 자체에 신뢰감을 잃었으며, 그러잖아도 때는 포스트모던, 보편적 주체가 만들어낸 일체의 보편적 이념에 회의를 느끼고 있다.  (p. 190)

우리의 지식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존재미학, 즉 자존심의 최소한을 지키고 제 존재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예술이다.  (p. 192)

공포.  그것은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사유하지 못하게 만든다.  공포에 질린 사람에게 유일한 정의는 생존이고, 그 생존을 위해 그들은 무슨 일이든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  (p. 198)

한국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공포 정치, 대중의 본능적 공포를 자극하는 협박의 정치다.  그리고 이 공포 정치에 대중은 기꺼이 참여한다.  왜? "직접적으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공격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생존전략의 일환이다." (홀거 하이데)  (p. 215)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반공'이라는 네거티브한 이념조차도 한갖 허위와 위선에 불과하며, 실은 수구 기득권층의 밥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  한국의 보수주의는 이념이 아니다.  처세술이다.  (p. 217)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복잡한 인간관계의 망 속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p. 241)

우리 사회의 권력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꼽으면 지연.학연.혈연으로 형성되는 정체성을 들 수가 있다.  이 정체성은 어떻게 보면 자발적으로 맺어지는 것 같으나, 어떤 면에서 보면 강요된 것이기도 하다.  (p. 247)

패거리에는 개인의 '주체성'도, 집단의 '사회성'도 없다.  패거리의 권력 구조는 패거리의 정체성을 위해 개인의 선택을 무시한다.  그 안에서 지켜야 할 개인 윤리는 아부와 맹종이다.
...
한국인의 정체성은 패거리의 정체성이다.  '에고'는 있어도 '주체'는 없다.  (pp. 249-250)

역사란 일어난 일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위해 과거의 기억을 조직하는 것.  (p. 283)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고 했지만, 그때 그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단지 관념의 차원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거 같다.  이데올로기는 단지 벌어진 사실을 해석하는 식으로 수동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적극적 기제를 갖고 있다.  (p. 284)

'별자리 그리기'.  담론의 스펙트럼을 그리는 것은 별자리 그리기와 같다.  그 중 어느 별은 죽어서 사라지기도 하고, 별똥별이 되어 땅에 떨어지기도 하며, 허공을 헤매다가 다른 별에 그 자리를 내어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별자리의 모습은 시시각각 달라진다.  담론의 분석은 정태적이 아니라 시간 축을 따라 변하는 스펙트럼의 형상을 그 역동성 속에 포착해야 한다.  그 스펙트럼은 존재의 영속성을 갖는 타블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포착된 무상한 생성의 이미지, 즉 빛의 그림자 '마테르나 마기카(laterna magica)'다.  (p. 295)

폭력에는 폭력으로.  권력이 행사하는 신화적 폭력에는 웃음의 폭력으로.  니체는, 가장 커다란 비판은 상대의 이상을 비웃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p. 296)

작가는 사회와 번거로운 관계를 절연하고 조용히 자기의 문학세계에 갇혀 소설이나 시만 쓸 수가 있다.  그 문학적 성취만으로도 작가는 이미 사회에 기여할 수가 있다.  (p. 309)

'지역 차별주의'와 '광신적 반공주의'는 영남에 둥지를 튼 수구세력이 오랫동안 지역 패권의 구도를 유지해온 비결이었다.  (p. 315)

이기적인 개체들은 자신을 가해자 집단과 동일시하는 데에 성공할 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다.  그것이 '왕따'의 심리학이다.  (p. 323)

이념의 독재.  우리 사회는 극도로 우경화되어 있다.
...
다른 생각을 말살하는 데에 보수층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데올로기 장치가 바로 '빨갱이'와 '전라도', 말하자면 '레드 콤플렉스'와 '지역차별'의 논리였다.  (p. 326)

친일파 처리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은 논리라는 관념의 문제가 아니라 유물론의 문제, 즉 그의 추종자들이 구축해놓은 권력관계라는 물적 토대의 문제다.  복거일의 영어공용화론에서 드러나는 과도한 친미 성향, 그리고 미당의 행적에 대한 평가에서 드러나는 아직 청산되지 못한 친일 성향은 한국 보수주의 이념의 두 측면이다.  (p. 329)

거시구조는 사회 속의 단자들 하나 하나를 제 형상대로 찍어내고, 그 결과 미시구조는 도처에서 프랙털처럼 거시구조을 반복한다.  이것이 우리가 무심결에 보고 지나치는 일상의 장엄함이다.  (p. 329)

이 범상함의 시대에 위대해지려는 자는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고 말 게다.  ...  이 평범함의 시대에 숭고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아마도 '희극적 숭고', 즉 스스로 바보-광대가 되는 것뿐이리라.  시대의 아이러니......  (p.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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