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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 페미몬스터즈에서 믿는페미까지― 우리는 어떻게 만나고 싸우고 살아남았는가
김보영.김보화 지음 / 서해문집 / 2019년 1월
평점 :
'페미니즘'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이후 ‘여성혐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서 자주 들렸기 때문이다. 여성인 나에게도 그 사건은 충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여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등의 문화 속에서 살아왔지만, ‘차별’이라고 깨닫지는 못했다. 길들어졌고, 무뎌졌나보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이 벌어진 이후, 여자들이 얼마나 부조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자각하게 됐다. 그렇다고 뭔가를 한 건 아니다. 바뀐 거라곤 ‘화장실 갈 때 조심해야지’ 정도다.
나와 다른 여자들이 많았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이후, 국내에 페미니스트 그룹들이 많아졌다.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은 페미니스트 단체 10곳과의 인터뷰를 담았다.
▲2016년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추모 활동을 계기로 만들어진 페미몬스터즈
▲지지할만한 페미 정당이 없어 스스로 만든 페미당당
▲겨털, 월경 등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의 해방을 외치는 불꽃페미액션
▲서울 중심의 페미활동에 어려움을 느껴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나쁜페미니스트
▲영화계 여성차별에 저항하는 찍는페미
▲대학 내 여성차별에 저항하는 펭귄프로젝트
▲온라인 상에서 벌어지는 여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탄생한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남성 중심적인 인터넷 정보에 여성주의 정보를 담고 있는 페미위키
▲성차별 없는 게임 세상을 만들고 있는 페이머즈
▲교회 안에서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믿는페미 등 총 10곳이다.
정말 다양한 곳에서 페미니스트들이 힘겹게 활동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학교에서, 온라인에서, 게임에서, 교회에서. 우리 사회 속 여성차별이 얼마나 만연했다는 소린가.
책을 읽어갈수록 부채의식이 들었다. 나도 여자다. 여성 차별이 만연하다고 뼈저리게 느낀다.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책 속 페미니스트들이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자신이 있는 공간을 바꾸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데 나는 무얼 했나. 미안하다.
그들도 힘겹게 버티고 있다는 심정이 드러나는 대목에서 부채의식은 더 심해졌다.
처음이라 서툴러서,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아서, 돈이 너무 없어서, 지쳐서, 사회운동이라는 게 사람을 갈아 넣어야 해서, 잠시 쉬러 간 동료도 있어요. 다시 돌아왔을 때 제가 여전히 이 자리에 있을지, 언제까지 이 활동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운동과 인상을 병행하는 과정 속에서 굉장히 불안하기도 하고요. (...) 고백하자면, 처음엔 단지 영화가 너무 좋아서 그리고 여성과 작업하고 싶어서 찍는페미에 들어왔어요. 거대한 운동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그런데 활동하다 보니 고쳐야 하는 것들이 보였고 도저히 그만둘 수 없었어요.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찍는페미, 재승) 148p
그렇다고 그들처럼 하겠다고 할 용기는 나지 않는다. 그래도 ‘퍼스트 펭귄’을 못되더라도, ‘허들링’은 할 수 있지 않을까?
펭귄은 무리지어 생활한다고 한다. 바다로 사냥을 갈 때도 무리로 간다. 바다 밖에서는 바닷속 천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다. 언제나 바다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두렵다. 이때 펭귄 무리를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바다에 뛰어드는 펭귄을 ‘퍼스트 펭귄’이라 부른다. ‘퍼스트 펭귄’이 마치 지금의 페미니스트들 같다. 이런 퍼스트펭귄의 의미를 담은 단체가 펭귄프로젝트다.
펭귄프로젝트는 펭귄 굿즈를 만든다. 펭귄 캐릭터 종류는 두 가지다. ‘퍼스트펭귄’과 ‘허들링’. 허들링은 영화 50도에 이르는 남극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펭귄 무리들이 몇 겹의 원을 만들어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행위다. 안쪽에 있는 펭귄들은 조금씩 움직이며 바깥 자리에 있는 펭귄들과 자리를 바꾼다.
사실 퍼스트 펭귄이 되는 건 사람들에게 좀 부담스러울 수도 있잖아요. 그래도 허들링은 다들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주변에 친구들이 핀 배지를 사 갔는데 ‘네가 퍼스트 펭귄 하고 있으니까 내가 허들링 하겠다’는 느낌이에요. 어떻게 보면 그게 시작이잖아요. 모두가 나서는 것도 좋지만 힘들다면 허들링이라도 해줄 수 있는 거니까요.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 (펭귄프로젝트, 은이펭귄) 166p
<스스로 해일이 된 여자들>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의 기록이다. 다양한 단체들이 있고, 이들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를 기록했다. 페미니스트에 관심이 생겼다면, 그래서 뭐 어떻게 해야 되나 싶다면 이들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자.
두려움을 이기고 퍼스트펭귄이 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하고, 응원하는 것부터 해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