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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
민경숙 지음 / 강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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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시인의 노숙인 시설 강의에서 접한 책이다. 그는 수강생들에게 그저 이 책을 낭독하게 했다. 시 낭독은 보았어도, 운문이 아닌 산문을 읽게 하는 것은, 무척이나 생경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낭독은 여느 시 낭독보다 훨씬 더 가슴에 와닿았고 파문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그 산문은 산문이 아닌 운문, 운문이 아닌 산문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선생으로서 수강생들의 '촉진자'가 되어 시를 촉진하고 싶었다고 한다. 시의 마음을 일깨울지에 대해 아직도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다. 시가 아닌, 에세이를 -그것도 자기 이야기를-쓰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는 에세이 촉진자가 되었으며, 그 결과가 바로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이 된 것이다.



시인들이 쓴 에세이를 즐겨 읽는다. 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난공불락의 철옹성을 접하는 것보다, 시인의 조금은 힘을 뺀, 지극히 사적인 시 같은 에세이를 읽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것이 있다. 수많은 숨을 곳이 있는 시와는 달리 (그것을 은유와 비유라고 하던가), 에세이는 발가벗는 것 같아서 어렵다고. 시인이 아닌 일반인은 시가 어렵고, 차라리 에세이는 쉽다고 한다. 이문재 시인은 그것을 '시의 감옥'에 갇힌 것이라고 했다. 어쩜 얼룩에 대처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은 아닐까.


민경숙 작가는 <얼룩>에서 얼룩에 대처하는 방법은 '지우려고 노력한다' '얼룩이 묻은 옷을 버린다' '얼룩을 내 옷의 무늬로 인정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쩜 시인들은 얼룩 묻은 옷을 버리는 사람이고, 일반인은 얼룩을 내 옷의 무늬로 인정하는 부류가 아닐까. 아님 정반대이거나. 그래서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그리고 쓰는 에세이가 오히려 쉬운 것은 아닐까.


제목에 눈이 많이도 머물렀다.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 무언가 어색하고 말이 안된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꽃잎을 뜸 들이는', 즉 인간이 주어가 아니었다. 뜸을 들이는 주체가 꽃잎이었다. 뜸 들이는 행위는, 약불에 그대로 두어 속속들이 잘 익게, 내음이 배도록 하는 것이나, 머뭇거리거나,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두는 것이다. 이는 섣부른 간섭이나 변화의 도모가 아닌, 스스로 맛이 배게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그 꽃잎은 아마도 작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숨겨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62세의 나이에 사이버 대학 문창과에 등록을 한다. 아마도 그 6 개 성상 (星霜)이 바로 작가의 꽃잎을 뜸 들이는 시간이었으리라. 꽃의 만개 (滿開)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뜸 드림이다. 그것이 '조용한 끈질김'이다.


작가의 글에서 풍경화나 인물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다. 급하지 않은, 거칠지도 약하지도 않은 뭇 터치로 그려진 그림을 보는 듯했다. 역시 20여 년 동안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정밀화가 아니다. 점묘화에 가까운 인상파 화가의 그림이다. 눈을 조금만 뜨고 보아야 비로소 그림의 실체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장엄하게 보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마음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에만 집중하면 된다.



작가는 이 책이 '사람' 이야기라고 했다. 그러니 작가는 <진국>이자, <감국>이자, <조용한 끈질김>이자, <손거울> <검정치마>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진국'이다. 작가는 '진국은 어딘가에 스며들기 위해 우러나며, 대체로 자신을 위해 우러나지 않으며, 자신을 녹여 어딘가에 스며들 수 있을 때, 진국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진국인 사람들의 모습은 예쁘지 않고, 아름답다. 그들 모두 뭉근한 '고유 명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진한 감꽃도, 풋풋한 땡감도, 농익은 홍시도 아닌 -애절하고 그리운 -감국의 존재이다. 아님 모두에 해당할 수도 있다.



"감동적이다" "위안을 받았다" "감사하다"라는 세치 혀로 하는 찬사를 보내기가 심히 저어 된다. 이 책에 대한 찬사로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참사는, 혀가 아닌, 가슴은 물론 온몸으로 떨며 해야 한다. 기실 나는 여성 작가들이 써 내려가는 에세이집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감성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뜻 모를 형용사와 부사가 난무하며, 적확하게 말하고 쓰지 않는 지극히 우회하기 때문이다.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은 다르다. 수식어가 절제된, 다큐멘터리의 촬영감독처럼 묵묵히 관찰하고, 화장기 없는 민낯과 날 것을 보여주기 때문

이다.


꽃잎의 요리는 아주 담백하다. 뜸이 아주 잘 든 요리이다. 요리를 만든 셰프의 농익은 손맛을 보여준다. 역시 나이가 선사하는 느긋함, 관조하는 여유, 롱테이크에 가까운 카메라 워크, 그리고 웃풍을 막아주는 이불이 깔린 아랫목의 따스함까지 보여준다.



가벼우면서 가볍지 않고, 무거운면서도 무겁지 않다. 적당히 짧으면서도 긴 인생의 서사 (敍事)를 담고 있다. 과장되지 않은,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사적 (私的) 다큐멘터리이다. 민경숙 작가는 아주 훌륭한 다큐 감독이다. 그의 첫 잇뽕 작품이 <꽃잎이 뜸 들이는 시간>이다. 상영 시간은 개인별로 다르다. 나에게는 약 4시간이었다. 다시 볼 예정이다. 추리 소설을 읽는 듯한 반전의 재미도 있다. 눈의 흐름만으로 읽지 마시라. 마지막 연의 반전의 놀람을 대비해야 한다. 경험해 보시라. 짜릿함으로 다가온다.



이 책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그 문을 열어준 이문재 시인에게 감사할 뿐이다. 시인은 정말 자신보다 글을 잘 쓰는이라고 했다. 그 말은 정말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민경숙이라는 걸출한 에세이스트의 글을 접하게 되어 기쁘다. 올해 읽은 최고의 에세이이다. 아마 오랜 시간 동안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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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윤신 지음 / 여름정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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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기를 좋아해요. 언어와 감각은 여러 군데에서 뒤섞인 시제로 지내다 내 안에 머무릅니다. 그렇게 내 안에 살던 언어가 또 다른 곳으로, 글을 읽는 당신에게 가서 살아간다면 참 좋겠습니다."

윤신 작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럴 때마다 건너 뛰지 못하고 -여지없이- 시선이 멈추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시제'이다. 그것은 시제 (時制) -과거, 현재, 미래 -즉 시간이거나, 시제 (詩題) -시의 제목이나 제재-를 말하는 것이리라. 작가는 '내 안에 살던 '언어'라고 표현했으니, 시제 (時制)의 시제 (詩題)가 맞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에세이집이 아니라 시집이 더 어울린다.

​산문을 쓰는 일반 작가보다, 시인의 에세이가 훨씬 더 독자의 마음을 떨게 하고, 울리게 하고, 열리게 한다. 그들은 조탁된 언어로 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제된 언어로 쓰기 때문이다.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도 그러했다. 작가 윤신은 기실 시인이다.

그의 글을 자주 접했었다. 대면이 아닌 비대면으로 사이버 공간인 블로그에서 그러했다. 그의 블로그 명은 '다정하게 안녕'이다. 그 안녕이, 만나서 반가운 인사인지, 헤어질 때의 안녕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다정하게'이다.

​언젠가 그의 글에 이런 댓글을 쓴 적이 있다. "작가의 꿈이 영글어, 멋진 책 한 권을 서점에서 조우하는 그날을 기원해 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무 사랑' 님의 블로그 글들을, 줄을 그어가며 읽게 되었습니다. '나무 사랑'님의 글에는 '허투루'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정제된 언어와 치열한 생각의 씨줄과 날줄들이 따뜻한 마음의 물감과 어우러진 수채화를 보는 듯했습니다"라고. 그 블로그의 주인공이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책을 펴냈다.

​나는 -솔직히-이런 스타일의 글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는 이분법적인, 그리고 딱 부러진 글을 선호한다. 빙빙 돌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그런 유의 글을 읽기에 나의 조바심의 똘레랑스는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그런 글을 쓰는 이들은 거의 여성이다. 그들은 자신의 얼굴과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 윤신은 자신과 아이와 남편 (아마 이름이 아윤과 찰떡군이었을 게다)의 사진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작가 윤신은 그러했다.

​초창기 그의 블로그 글 대부분은 육아에 대한 것이었다. 아이와 지지고 볶는 이야기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천사와 악마의 탈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바꾸어 쓰는 아이와의 육아 씨름은 -임재범이 노래했듯이- 전쟁 같은 삶일 게다. 이 책은 -이제는 육아기가 아닌- 전쟁과 같았던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가 책을 펴냈다. 그것도 용감하게 1인 독립 출판사를 차려 - 그의 말대로 무게와 물성을 지닌- 진짜 책을 펴냈다. '홀로서기 위해서는 힘이, 남에게 기대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작가 윤신은 '용기'까지도 스스로의 '힘'으로 조달했다.

​이 책은 156쪽의 책이다. 보통 책의 폰트나 여백을 고려하면 아마도 120여 쪽의 단출한 에세이집이다. '누구나'의 일상의 단상이지만, 결코 '누구나'의 생각의 흐름은 아니다. 그 생각의 흐름은 발칙하고, 이불 속 하이킥을 하는, 탈옥을 꿈꾸는, 수인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아픔 (痛)과 관계 (通)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픔은 대개 아련하다. 지나간 시제(時制)의 아픔 (痛)은 그리움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 아픔은 -아픔을 넘어 - 관계 (通)를 꿈꾼다. 그 痛 과 通을 표징 하는 것이 바로 'Alone together (P133)' Chet Baker의 Jazz 곡이다. 이 단어가 이 책의 핵심 키워드이다.

​ Alone과 together는 상호 모순되는 단어이다. 결코 함께 어울려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그러나 같이 쓰이면 묘한 misty 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혼자 있고 싶지만, 그것만큼 같이 있고자 하는, 이중적 심리이다. 그래서 이 단어의 뜻은 '따로 또 같이'가 아니라 '단둘'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 사람'들이 쓴 '그런' 글이 아닌, 보통의 삶을 보통이 아니게 살고 있는 '보통 사람'의 글이다. 현재와 과거, 도시와 시골, 국내외를 넘나들면서 주로 아픔을 이야기한다. 때로는 실리콘도 이야기한다. 자신의 병도 말한다. 그 이야기를 토하듯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용기보다는 '위엄'에 가깝다.

그의 이야기들은 색 바랜 사진처럼 다가온다. 사진은 '일종의 걱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순간을 가두기 위해 '찰칵'을 하는 것이리라. 이 책을 만든 이유 또한, 지나간 시제를 현재의 시간 속에 멈추게 하려는 스냅 사진일 게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은 -독립 영화를 만든 경력에서인지 -활동 사진이다. 움직이는 단편 소설이다.

누군가 사진은 '일종의 걱정'이라고 했다. 이 순간이 사라지는 데에 대한 두려움, 잊힐 것에 대한 염려. 사람들은 이 순간이 사라질 것을,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을 두려워 마지않고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니 찰칵. 지금 붉게 물든 저 하늘도 내일의 것과는 다르고 내일 다시 떠오르는 태양도 지금의 것과는 다를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P89~90

윤신 작가의 다음 책이 기다려진다. 내일 떠오르는 태양의 또 다른 모습을 보고 싶다. 그때쯤이면 '여름 정원'은 '가을 정원'이나, '봄 정원'이 되어 있을 게다. 또 다른 계절의 또 다른 색과 빛의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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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도시
임우진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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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글 좀 쓴다는 인문 사회 학자들은 비상일 게다. 문과 출신의 고유 영역이었던 출판 시장에 이과 출신의 돌풍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출판 시장에서도 '문송 (문과라서 죄송합니다)'을 외쳐야 할 시기가 도래한 듯싶다.


이과 출신들이 꽤 괜찮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고, 글빨 또한 준수하며, 대중의 반응조차 심상치 않다. 대중이 잘 모르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결코 딱딱하게 말하지 않으며, 잘 읽히며, 이과생만의 전문 영역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인문학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문과 출신 작가들은 '융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성역이 침범당하기 때문이다. 필요시 그저 선언적 흉내만 낼뿐이다. 이제 이과 출신 작가들은-융합을 넘어서- 대륙 간 탄도 미사일을 쏘아대며, 문과 독점의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

대표적인 과학자들은 정재승, 김상욱, 장대익, 김범준, 정인경, 장동선, 김대식, 최재천, 심채경 등이다. 현직 의사인 정혜신, 하지현, 남궁인 등도 막강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다.


건축가 출신 말빨을 자랑하던 유현준 교수도 위기에 처했다. '임우진'이라는 걸출한 신인 거물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유현준에 의해 독점되어온 건축가 작가에 막강한 경쟁자가 등당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유현준을 능가한다. 유현준이 거시적 관점의 작가라면  임우진은 미시적 관점의 작가이다. 그의 글은 < 도시 & 공간 심리학>에 가깝다. 사실 [도시 심리학]은 하지현의 책 제목과 동일하다. 그가 '도시인의 정서적 허기'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임우진은 '장소'를 말한다. 결과물인 현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건축가의 시선을 이야기 한다.



그는 이제는 이화여대의 상징이 된 ECC를 공동 설계했다. 더 이상 건물과 시설을 지을 공간이 없기에 지하화하는 것이 대학들의 추세인데 ECC는 개념이 다르다. 지하를 개방함으로써 지상과 지하의 경계와 구분을 없애 버렸다. 지하에도 하늘과 빛을 부여한 것이다. ECC의 압권은 계단을 만들어 만남의 광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상과 지하의 만남을 동시에 이룬 것이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이다)


그가 책에서 주장하는 일관적인 메시지는 '관점'이다. 질문의 과녁을 바꾸자는 것이다. 익숙한 것을 다시 돌아보고, 전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에 주목하라고 채근한다.


그이기에 가능한 질문이자 화두이다. 한국인도 프랑스인도 아닌 경계인으로서 한국과 서양의 도시를 이야기한다. 그의 사고의 흐름은 여행에서도 출발한다.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자신의 원래 모습을 남처럼 타자화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너무 익숙해서 잘 안다고 믿는 의식에 대해 태클을 건다. 절대성에 대해 회의하고 상대성에 대해 논한다.


한국의 도시는 '인간은 선하고 믿을만하다'는 것과 실상은 도덕과 윤리에 짓눌려 교육되고 선도되어야 하는 하등 국민을 만들었다고 한다. 반면 서양의 경우는 시스템적으로 하등 국민이 되는 것을 막는 도시를 건설했다고 한다. 질서를 '지킬 수밖에 없도록'유도하기 위해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도시 전략을 수립했다고 말한다. 시스템이 동서양 도시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는 대단한 관찰가이다. 신호등의 위치에서, 오페라극장과 영화관 그리고 세종 문화회관과 국회의사당 구조에서 동서양 사고의 차이를 설명한다. 묘지가 소재한 장소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것과 죽음에 대한 의식을 이야기한다. 풍수와 남향 선호의 한국 아파트에서 물질화된 그리고 폐쇄된 아파트 문화를 꼬집는다. 온돌 문화의 우수성이 아닌, 모순적 온돌 문화 (침대를 사용하는 한국인)를 꼬집는다. 노래방으로 상징되는 사적 공동체 문화, 밀폐된 집단 선호 의식을 읽어낸다. 마을이 사라졌음이 도시인의 외로움의 원인이라는 학자들의 말에 일침을 가한다. 마을이라는 것이 우리끼리의 배타적인 공간이라고.


공간 심리학으로 사회 원심력과 구심력을 이야기한다. 공간의 소유권과 주도권과 관리권을 말한다. 공간에 대한 감정과 애착심과의 차이를 풀어낸다. 관리에 용이한 (관리자의 관점에서 출발한) 공간 배치와 사용자의 관점에서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사람이 느껴지고 보이는 공간을 이야기한다.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은 항상 거시적인 그리고 멋들어지고 이상적인 이야기를 한다. 읽고 나면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게 힘든 건데"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임우진의 경우는 아주 독특하다. 섣불리 솔루션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시라는 것은 함부로 부수고 새로 건설할 수는 없기에. 하물며 재건축도 불가능한 것이기에.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Nudge 한다. 그중 실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도시의 사막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힌트를 제시한다.


프랑스 시골 마을 디에볼샤임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에 의해 설치됐던 지뢰 제거 작업을 하면서, 주임신부였던 웬들링은 지뢰가 하나씩 제거될 때마다 그 장소에 꽃을 하나씩 심자고 신도들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자신이 손수 심은 꽃이 전쟁의 아픈 기억을 잊게 해 주는 직접적인 경험 한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고, 행동이 적극적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꽃이 지뢰를 대신하게 한 것이다. 이를 이용하여 프랑스는 콩쿠르라는 도시의 아름다운 꽃 가꾸기 등급을 부여하는 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우리처럼 경쟁에 민감하고, 부동산 가격에 민감한 국민이면 꽃을 가꾸는 아름다운 도시 등급을 부여하면 아파트 가격 상승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사람이 먼저인 도시'를 만드는 주춧돌이 되지 않을까?


유현준 교수는 이제 용맹정진해야겠다. 여기 막강한 경쟁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보이지않는도시 #임우진 # 을유문화사 #질문의과녁을바꾸면 #지뢰와꽃 #도시심리학 #공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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