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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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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서모임 책은 [위대한 개츠비]였다. 
2006년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는 영문/한글 합본으로 나온거라 그 당시 읽은 기억으로는 뭐 미국 상류층 들의 통속 소설이구만 하고.... 자세한 내용은 기억 나지 않았다. 
  
이번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고, 독서모임에서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어보니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 싶다.  1920년대 미국 재즈의 시대를 배경으로 부와 물질만능의 화려한 향락과 사치를 즐겼던 개츠비와 그의 저택을 드나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들이 마치 성경에 나오는 멸망의 날이 오는지도 모르고 무한의 소비와 향락을 즐겼던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린라이트로 표현된 아메리리칸 드림으로 무작정 부를 불리고, 허세와 사치의 모습의 밀주업자이고 어둠의 세계에서 성공한 졸부이자 속물인 개츠비를 등장시켰다. Gatsby = Gats Boy 라는 이름에서도 보이듯 도덕, 윤리와 관계없이 어떤 일을 해서라도 무작정 돈을 긁어모았던 개츠비는 그러한 졸부의 이미지와는 달리 데이지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보인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갖는다. 속물근성으로 도배한 데이지에 대한 개츠비의 사랑은 과연 순정일까? 아니면 또 다시 정복하고픈 남자의 욕망일까?
 
역자해설에서 저자는 이 책이 원래 위대한 개츠비는 아니었다고 한다. 미국 출판사에서 Great를 집어넣어서 위대한 개츠비가 우리말로 그대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소설의 전반적 내용을 보면 성공한 졸부이자 속물인 개츠비를 위대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역자는 위대한 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누군가를 비아냥 거릴 때 참 대단해~“ 라고 하듯 그런 의미로 Great를 해석해야한다고 한다. 어느 정도 공감되는 내용이다. 

독서모임에서 우리는 상징적 이미지들에 주목했다. 이 소설이 3류 소설로 전락하지 않고 많은 이들이 세대를 거쳐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여러 상징적 이미지들의 다양한 배치로.... 
여러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역자 후기로 남기는 김석희 씨의 글을 보면 이 소설을 이해하기가 좀 더 쉬워진다.
어떻게 보면 소설을 이끌어가는 닉 캐러웨이와 개츠비는 저자인 스콧피츠제럴드가 갖고 있는 이중의 모습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다. 44년의 인생에서 부를 찾아 글을 쓰는 자신의 속물적인 모습과, 그 속에서도 장편소설을 쓰기위한 도전에서 계속 고뇌했었던 저자...... 부인인 젤다를 소설 속 데이지로 등장시켜 당시 여성들의 자유를 넘어 방탕한 사생활을 묘사한 것은 젤다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을까?.
이 소설이 끊임없이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본주의와 더 없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고 경제 위기와 양극화가 있다고 하지만, 현재에도 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성공한 졸부들이 있고, 그것을 동경하고 끊임없이 부와 허황된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가..... 
자본주의의 화려한 이면 속에 가려진 외로운 인간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일 것이다.
개츠비의 저택에서 그렇게 드나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장례식에 거의 오지 않고 쓸쓸하게 장례를 치뤘던 것처럼..... 
 데이지는 개츠비의 사랑을 거부하고 현실에 안주했다.
관찰자인 닉은 서부로 떠나면서 새로운 희망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한다고...
정말 서부로 향한 것이 새로운 부를 찾아... 새로운 희망을 찾아. 금광을 찾아 간 것일까.....

또한 외국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얼마나 저자의 의도를 우리에게 적확하게 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번역상의 중요점이 토론되었다. 
  

개츠비는 그 초록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고 있는, 환희에 찬 미래의 존재를 믿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한테서 달아났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일은 우리가 좀 더 빨리 달리고, 좀 더 멀리 팔을 내뻗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맑게 갠 아침이.......
그래서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흐름을 거슬러가는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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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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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책을 재미로 읽고자 접근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뒤로가기버튼을 누를 것


이 책은 가부장적 한국사회 남성 폭력성의 추악한 민 낯 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논문이다.

 

아주 불편한 진실이지만 불편하더라고 진실이고 현실인 것만은 인정해야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한편으로 부끄럽고 미안함을 느낀다.

또한 2001년에 발표된 내용으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이 개정판이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참 낭만적인 표현으로 들린다. 남편으로부터 꽃을 선물 받고 그 날 또 두들겨 얻어 맞고,,,,, 그 제목엔 그런 슬픈 사연이 있었다.

 

남쪽 따뜻한 바닷가 마을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나는 그 시골 마을에서도 때때로 우세(?)스럽게 소란스런 일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부부싸움이었다. 바람 피우는 남편에게 아내가 욕설과 험한 말을 해대며 대들고, 그런 아내를 바람 피웠던 남편은 속칭 개 패듯이 두들겨 팬다’.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어린 아이들은 그 아주머니가 곧 죽을 것 같았지만 동네 어른들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남의 가정사에 함부로 끼어드는 일 아니다라면서..... 그러면 어린 우리들은 저 부부는 곧 이혼하겠지생각한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그 집 대문을 나서는 아저씨를 향해 어제 그렇게 두들겨 맞던 아주머니는 잘 다녀오라며 인사하는 모습을 본다. 키우던 개와 아침 산책을 하고 돌아오면서 보았던 그 광경은 전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른들에게 물어보면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여~” 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 책은 그런 내용을 다룬 책이다. 가정폭력 중 아내 폭력을 다룬다.

읽는 내내 손가락이 오글거리고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고 미안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이기에 그러했다. 

책 속에 제시하는 통계에서는 약 결혼여성의 1/3이 폭행을 당했다. 한국의 아내세 명 중 한명은 남성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는 것. 통계 조사로 나온 내용을 전국으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실제 답변에 참여하지 못했던 수많은 아내들 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1/3 이상이 될 것 같다.

내 기억 속 그 동네 부부싸움의 모습 중 아내가 남편에게 욕하고 달려드는 것은 이 책에서 표현하는 것으로 보자면 남편들이 말하는 맞을 짓인 것이다.

'당신은 누구에게 때릴 권리를 부여 받았는가?'

누가 남편에게 아내를 때릴 권리를 주었는가? 저자의 질문에 뜨끔해진다. 한국의 남편들은

연애할 때는 간, 쓸개 모든 것을 빼서 여자에게 줄 듯 하지만, 흔히 잡힌 물고기에 밑밥 주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결혼이라는 폭력허가증을 받고 바로 돌변하는 것이 남성들의 추악한 두 얼굴인가? 집 밖에서는 성실하고 예의 바른 남성이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돌변해버리는, 피해자인 아내들은 친정, 시부모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지만 그 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심한 경우에는 자살에 이르기까지, 아이를 볼모 삼아 여성의 모성애를 이용하여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남편의 그 때릴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 부여 받았는가? 묻고 싶다.

결혼 = 폭력 허가증?

 이 책을 읽는 내내 찹찹했다. 너는 너의 아내가 맞을 짓을 하게 된다면 때리지 않을 수 있겠냐? 라고 묻는다면 나 역시 절대 때리지 않겠다라고 말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맞을 짓이라는 것이 유형과 상황에 따라 너무도 다양했고 남,녀간의 미묘한 감정의 파도에 놓여있는 문제이기에 그렇다. 물론 최대한 때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겠다라고 말하겠지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행동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지만 사람은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다른 남성들은 어떠한가를 살펴보고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더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 아니라고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에 나오는 인터뷰하는 남편들은 폭력남편이 여럿이 있을 때 동질감을 느끼며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 아니라고 더욱더 강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여성들 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남성들이 읽어야할 필독서라 생각된다. 이 책을 만약 폭력남편이 읽게 된다면 교묘하게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상용될 수도 있겠고, 폭행당한 아내들이 읽게된다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개선해나가기 위해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나만 맞고 사는게 아니구나하며 자신의 상황을 스스로 포기하는데 도움을 주는 자료로 악용될 수도 있겠다. 즉 그 만큼 이 책은 현재 한국의 가정내에서 벌어지는 아내 폭력의 현 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끝 부분에서 말하듯 이 논문으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가정 내 아내폭력의 상황을 문제화시키고 공론화시켜서 그것이 극히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여성의 인권문제로, 하나의 사회문제로 인식시키고자 하였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2001년에 출간된 논문의 개정판이라고 했는데, 실제 인터뷰한 남성,여성의 내용을 추가로 더 많이 기재 했었으면 현실감을 더 극대화 시킬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아내폭력’은 강간, 성적 학대, 의처증, 남편의 경제적 통제 혹은 무능력, 집요한 협박, 알코올 남용, 시집 갈등, 유기적 성격의 외도, 잠을 재우지 않음 따위의 언어적, 심리적, 육체적, 경제적, 성적, 정서적, 폭력을 동반하기 때문에 ‘구타’나 ‘매’는 여성의 폭력 경험을 협소한 의미로 축소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내를 함부로 대하는 행동이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 폭력과 같은 ‘사소한’ 폭력은 폭력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은 곧 폭력을 일상화, 정상화시키게 된다. -p.45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려면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고통의 정치학이다. -p.60

공/사 분리 관념은 여성 폭력을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데 걸림돌이 되어 왔다. 여성 폭력이 인간의 안전과 존엄을 공격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적 영역의 사소한 문제라는 인식은, 여성을 보편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구타 남ㅍㄴ들이 ‘여자 하나 때린 걸 갖고 뭘 그러느냐’, ‘나는 사람을 친(때린)것이 아니라 집사람을 친 것’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사회가 남성만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인정하고 남성의 폭력을 방조하고 지지하기 때문이다.- p.95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나쁘지만, 아내가 외도했을 경우에는 예외라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폭력에 대한 태도 조사에 따르면, 아내가 남편의 말을 듣지 않아 구타당하는 것은 ‘허용한다’가 16.2%(허용할 수 없다‘는 75.5%)이나 아내가 외도했을 경우에는 53%가 구타를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123,4

어떤 의미에서 남녀간의 사랑은 폭력을 통해 더욱 극적이게 되는데. 이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힘이 불균등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폭력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의미이다. - p167

남성들 간의 푝력은 정치적 갈등이지만, 남녀간의 폭력은 놀이나 연애 혹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경미한 아내 폭력’은 폭력이 아니라 다소 격력한 로맨스일 뿐이다. - p.168

여성 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하려 할 때는 사회적 압력을 받게 된다. 경찰은 합의 하라고 종용하고, 주변 사람들은 ‘사소한 일 가지고 사내 앞길 가로막는다’ 고 비난한다. 이는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가해 남성의 명예가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언설인데, ‘아내 폭력’의 경우 가해자가 모르는 사람도 아닌 남편이기 때문에 그러한 비난은 더욱 심하다. 아내가 남편을 신고할 경우 범죄 신고를 장려해야 할 경찰은 ‘남편 인생에 빨간 줄 긋고 아들을 전과자 자식으로 만드는 여자’라고 피해 여성을 비난한다. -p.179

실제로 아내들은 일부로 ‘맞을 짓’을 하기도 한다. ‘’맞을 짓‘을 해서 빨리 맞음으로써 고통을 통제하려는 여성들의 전략을 레노어 워커는 폭력 과정의 주기 이론(the cycle theory of violence)으로 분석하였다. 이는 제3자가 피해 여성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워커에 의하면 ’아내 폭력‘은
긴장 형성단계(the tension building stage),
폭력 발생단계(the acute battering incident),
화해 단계(kindness and contrite loving behavior)를 순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내들은 첫 단계의 신호가 오면 스스로 ‘맞을 짓’을 한다. 실질적인 상해를 당하는 단계는 두 번째지만 폭력에 대한 긴장과 공포는 첫 번째 단계에서 가장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러 ‘맞을 짓’을 유발하여 세 번째 단계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 p.183

남편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아내는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한다, 정신의학자 에릭 번 (Eric Berne)은 그의 교류 분석 이론에서 이와 같은 의사소통 방식을 부모/어른/아이의 방식으로 명한다. 같은 수준(아이 대 아이. 어른 대 어른)에서 대화가 이루어져야 갈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상대방과의 관계는 힘의 원리에 좌우되고 있는데 아내들은 사랑의 원리고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여성의 의도와는 반대로 관계는 더 나빠지고 여성은 더욱 상처 받는다. - p.196,7

폭력은 남편이 자기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외도는 남편으로서 역할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폭력은 두 사람 간의 결속을 강화하지만 외도는 그렇지 않다. 외도는 아내의 지위를 위협한다..... 여성은 남자의 사랑을 잃었을 때 그에게 의존해 왔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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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 사람들 -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
매튜 데스몬드 지음, 황성원 옮김 / 동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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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집세가 뚝 떨어졌으면 좋겠어'- 랭스턴 휴즈 시의 일부분으로 시작되는 이책은 읽는 내내 표지만큼이나 속이 시커매졌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암담하고 우울했다. 그러면서 그럼 이 저자는 이책을 통해 무엇을 알리고자 하는가? 라는 궁금함이 계속 읽게하는 묘한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매력은 이 책인 단순히 부제처럼 도시의 빈곤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면서도 서술방식은 소설 형식으로 내용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것, 살던 집에서 쫒겨나고 새로운 주거지를 찾아 내몰리는 일련의 과정들을 단순히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을 넘어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부분들이 여러곳 보임으로서 지루함을 파괴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중간 중간 밑줄을 긋게 만드는 문학적 표현이 애사롭지 않았다.

책 서두에서 밝히듯 이 책은 미국 도시 중 하나인 밀워키 시에서 일어나는 8 가정을 추적하여 관찰한다. 백인, 흑인, 아이가 있는 집도 있었다. 하지만 사회의 저 밑 바닥 인생들에 대한 관찰기록지라 볼 수 있겠다. 일정한 일자리를 제대로 얻지 못해 사회보장서비스 중 하나인 SSI를 통하여 오로지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해가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의 월세는 그 소득의 7~80%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임대료 였었다. 법은 그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건물주들은 세내주는 집들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않고 집세만 꼬박꼬박 챙겨가는 악덕(?)건물주로 그려지는 '세리나'를 통하여 스쿠르지 같은 비정함을 보이기도 하나 그녀역시 조금은 인간다운 면도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손해보는 입장에 서게되면 언제나 과감하게 퇴거를 통보하는 냉정함을 보이는 이중적인 인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해 보았던 '라스트 홈'이라는 영화가 오버랩 되곤 했었다.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모기지론을 대출 받아 집을 구입했고, 그 빚을 갚지못해 집에서 퇴거 당했고, 은행과 집주인과의 중개역할을 하는 부동산 업자의 일을 하면서 본인이 욕을 했던 그 부동산 업자의 인생을 살게된다. 약 2시간 가량의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긴박감있게 아주 실감나게 관람했었다. 보는 내내 가슴속 저편에서 올라오는 분노, 짜증의 감정들이 함께 했었고, 정녕 그러한 곳이 미국인가? 하는 허탈함이 스크린 저편에서 내몸을 오랬동안 휘감고 있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이 책은 퇴거 경험을 하였던 저자가 빈곤층에 사회 구조적 모순을 적극 공부하고자 사회학을 전공하여, 밀워키의 낙후된 지역에서 직접 빈곤층의 사람들과 몇년동안 같이 지내면서 그들의 일과를 관찰하고 기록한 문화 기술지라고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었다. 정부 지원금이 소득의 전부인 빈곤층들이 살인적인 월세를 내고, 식품구매권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그들 중 일부는 식품구매권으로 현금화시켜 마약이나 다른 물품을 구입하는데 소모해버려 인간다운 삶을 살지못하고 더욱더 바닥으로 내몰리게 되는 일상 속에, 어린 아이 마저 퇴거과정을 지켜보면서 무감각해지는 그 일상을 저자는 과연 그들의 모습을 지면으로 이끌어 냄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에필로그와 '이프로젝트에 관해서'에서 저자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 구조적 모순에 일침을 가하고 대안책을 제시하고 있다. 그 대안책 마저 없었더라면 이책은 정말 가슴을 새까맣게 타게 만드는, 내게 올해 최악의 책이 될 뻔 했었다. 그래 그렇지 뭔가 자신만의 대안책이 있겠지 했었다. 그래도 사회학자이니깐....

책 후반부에 간호사 출신인 스콧이 술과 마약에 찌들은 일상에서 새 삶을 살아가기 위한 내용에서는 삶의 작은 희망의 빛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자는 빈곤층의 삶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과 동화되고 관찰하며 그들도 웃고, 울으며, 감동하는 보편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누추한 곳에 살고 있다고 하여 그들의 삶 자체가 누추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 처럼 말이다 

한건의 퇴거는 퇴거당한 가족이 원래 살던 구역뿐 아니라 마지못해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구역까지 여러 도시 구역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강제 이주는 이주의 속도를 높이고 원망과 투자 회수의 속도를 훨씬 더 빠르게 가속화하여 제이콥스가 말한 "영구적인 슬럼"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영구적인 슬럼의 핵심 고리는 너무 빠르게 그곳으로 흘러들어가고 그와 동시에 거길 빠져나가겠다는 꿈을 꾼다는 데 있다"
-p103

가난한 흑인 동네 출신 남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투옥이었다면, 여성들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퇴거였다. 가난한 흑인 남성들은 잠긴 문안에 갇혀 살았고, 가난한 흑인 여성들은 잠긴 문밖으로 내몰렸다
-p140

가난한 아버지가 가정을 지키지 못하면 레리처럼 가정을 떠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재기를 시도해볼 수 있다. 하지만 가난한 어머니들은(어쨌든 대부분)이 이 실패를 켜안고, 이 실패와 함께 살아야 했다.
-p327

퇴거는 불안정뿐 아니라 상실을 초래한다. 퇴거당한 가족들은 집과 학교, 동네뿐 아니라 가구,옷,책 같은 자신들의 소지품까지 잃게 된다. 온전한 집을 갖추려면 많은 돈과 시간이 든다. 그런데 퇴거는 이 모든 것을 일순에 날려버릴 수 있다.
-p401

퇴거는 가난의 조건일 뿐 아니라 원인이기도 하다.
-p404

이 두 가지 자유의 균형을 재조정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저소득 가구가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주택바우처 프로그램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불운한 대다수(민간시장에서는 아무런 원조를 받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는 수백만의 가난한 가정들)를 위한 주택 프로그램으로 우리 대다수가 지지하는 가치, 즉 안전, 공정함, 동등한 기회라는 가치들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보편적인 주택바우처 프로그램은 돈을 벌고자 하는 임대주의 욕망과 그저 살고자 하는 세입자의 욕망 사이에 적정한 제3경로를 놓아줄 것이다.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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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자서전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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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잉글랜드 유대인계 의사 부모에서 태어난 4남중 막내인 올리버, 그 역시 부모님과 같은 의학의 길로, 그것도 그 당시에는 비인기 과목인 신경정신과의사로 접어들지만 청소년기 부터 겪은 특이한 관심사(바이크, 동성애 등)은 그의 인생이 진정한 자유를 추구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인생 내내 인간애로 가득찬 느낌을 받았고, 그것이 그의 환자를 대하는 자세와 기록으로 시작된 글쓰기로 여러 권 발행한 저서를 통하여 환자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놓은 그 따뜻함으로 연결된다. 

몇몇 자서전들이(특히 몇년전에 출판된 모 대통령의 자선전처럼) 자신의 업적이나 치적을 자랑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는데 반하여 이 책은 올리버 자신의 자랑보다는 어떻게 하면 환자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줄까 하는 노력으로 비춰진다. 그래서 올리버는 명예욕과 공명심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 는 끊임없이 여행하고,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시인, 배우,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끊임없이 기록하고 글을 쓰는데 그 열정을 보냈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열정은 결국 자기 자신만을 위한 열정이 아니라 환자들에게 뭔가 도움을 줄 수있는 데 이바지 한 것 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책을 읽는 내내 그가 잘난 척(?)한다는 인상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사망한 2015년 이후에 이 책이 출간 된 것으로 보아도 그는 부와 명예보다는 인간다운 삶 자체를 알리는데 노력했었다. 

영화로 보았던 템플그렌틴과의 만남과 영화배우 로버트드니로와 로빈윌리엄스와 함께한 영화작업에서 감동은 더욱더 짙어졌다. 그는 책과 영화를 통하여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미친(?), 또는 신경이상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자 했었다. 그들이 잘못되거나 틀린사람이 아니라 우리와 조금 다른 사람이란걸, 아픈 사람이란걸 말이다. 

신경정신과의사로서 인간의 뇌를 연구했던 내용들이 많기에 읽는 중간중간 지난달 읽었던 베르나르의 소설 '뇌'가 오버랩된다.

올리버의 열정적인 삶은 그가 광적인 바이크매니아였고, 역도매니아, 마약중독자였었던 것으로 알수 있다. 하지만 마약중독은 스스로 빠져나왔지만, 동성애는 평생 빠져나오지 못한 그의 정체성이었다. 그 정체성 마저 스스로 틀린 것이 아나리 다른 사람들과 조금은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조금은 부끄러운 이야기까지 솔직하게 기록하였다. 너무나 솔직해서 인간적이고 사랑스럽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올리버에 대한 아무런 정보없이 책을 읽었기에 그도 나이들어서는 결혼해서 애낳고 잘 살았겠지 했는데 웬걸,,,, 평생 독신으로 아내와 자식없이 글쓰기와 환자임상사례연구에 일평생을 바쳤다. 마지막 병을 얻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글쓰기를 했으며 그 열정은 참으로 경이롭게 여겨지기에 한편으로 쓸쓸함 마져 느껴진다. 


2017년 1월 나는 온 더 무브를 통하여 올리버 색스의 가슴 따뜻한 인생을 보아서 행복했다. 그리고 천국이 있다면 그가 영면한 그곳에서도 자유롭게 끊임없이 글 쓰는 사람이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올리버색스 박사

내가 모두에게 A를 준 것은 무슨 얼치기 평등주의를 실현한 것이 아니라 각 학생 고유의 두드러지는 점에 점수를 준 것이라고, 나는 어떤 학생이건 점수나 시험 성적으로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느꼈다. 어떤 환자든 그렇게 할 수 없듯이, 그 학생의 다양한 면면을 접해보지 않은 내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가 있겠는가? 그들의 공감 능력과 배려심, 책임감과 판단력 같은 점수르 매길 수 없는 자질은 또 무엇으로평가한단 말인가?
-p227

아무리 나빠도 우리는 움직인다, 아무리 좋아도
절대에 가닿지 못하는, 안식할 곳 없는 우리,
언제나 멈춰있지 않아, 더 가까워진다
-p356 (올리버의 벗이자 시인인 톰의 ‘온 더 무브‘ 중)

템플을 비롯하여 내가 [화성의 인류학자]에서 다룬 사람들에게 ‘질환‘이 삶의 근본 조건이었으며, 그것이 독창성이나 창조성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책에 "일곱 명의 기묘한 환자들" 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은 그 주인공들 모두가 장애를 받아들일 비범한 방법을 발견했거나 창조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일곱 환자에게는 저마다 장애를 보완하는 각자의 재능이 있었다.
-p406

글을 쓰다 보면 생각과 감정이 분명하게 정리된다. 내게 글쓰기는 정신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 요소다. 생각이 떠오르고 그 생각이 꼴을 갖추어가는 과정 전체가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p475

글쓰기는 잘될 때는 만족감과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 어떤 것에서도 얻지못할 기쁨이다. 글쓰기는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를 어딘가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잡념이나 근심 걱정 다 잊고, 아니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채 오로지 글쓰기 행위에 몰입하는 곳으로. 좀처럼 얻기 힘든 그 황홀한 경지에 들어서면 그야말로 쉼 없이 써내려간다. 그러다 종이가 바닥나면 그제야 깨닫는다. 날이 저물도록, 하루 온종일 멈추지 않고 그을 쓰고 있었음을.
-p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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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서양사는 끊임없는 신과 인간의 관계속에서 형성되어 왔다. 르네상스와 함께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인간 스스로 많은 문명을 발전시켜왔고, 그것은 눈부신 과학발전과 함께 했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신의 자리는 없어지지 않았다. 아니 없어지지 않고 다른 무엇인가로 대체되어왔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그 대상을 다양한 형태의 누군가로 대체해왔었다. 신은 없지만 그 보이지 않는 자리에 다양한 무엇인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을 저자들은 '광신주의'와 '다신주의'라 보고 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단테의 [신곡],

허먼 멜빌의 [모비딕] 등에서 보통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한 가치를 찾아내고 있었다. 이 책은 위에 열거된 책들을 이미 읽었거나 아직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속에서 우리가 찾지 못한 가치들을 찾아내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또한 반대로 이 책을 먼저 읽었을 때 위에 열거된 책을 나중에 읽을 경우 순수한 독서 감상에 따른 개인의 판단을 저해하는 요소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서양 고전을 읽는데 도움이 될만한 책으로는 괜찮을 듯 싶다. 단 서양사는 끊임 없이 신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하고 읽기 시작해야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서양고전 읽기에서 우리는 그 속에서 '빛나는 무엇'인가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 이라 생각된다.


1장 선택의 짐에서는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에프스키의 말은 모든 것을 인간 스스로 책임져야함을 의미했었다. 사고현장에서 주저없이 타인을 구하는 사람을 분석하면서, 일상에서 나타나는 슈퍼맨, 스포츠 영웅, 대중스타 등 스스로 어떠한 상황에 주저없이 맞서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의 허무주의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끈다. 

책 서문에서 밝히듯 저자들은 평범한 교양을 갖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싶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했었다. 첫 도입부는 이들의 설명이 맞다. 그러나 2장에서 보여주는 미국의 천재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아주 생소한 인물이다. 여기서 부터 읽기가 좀 불편해진다. 월리스란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쭉 나열한다. 미국의 천재적인 소설가 46세에 자살한 소설가, 20년간 우을증 치료를 받은 환자, 그가 왜 자살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 에 대한 철학적 물음과 분석을 하고 있다. 월러스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야 하는 오늘날의 반복적인 삶에서도 끝까지 삶의 가치를 추구했고, 그러한 과제로부터 주의를 빼앗고 정신을 중독시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하려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벗어나려고 했었던 그 과제가 결국 자살의 원인이 된다. 실존하는 과동한 짐은 허무주의를 부른다는 것

책 읽기가 느린 나에게도 이 책은 술술 읽혀갔다. 왜일까? 그 다음의 궁금증이 계속 생긴 이유였었다 

3장 부터 다시 재밌어 진다. 신들로 가득한 세상은 호메르스의 [오디세이아]에서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을 찾아낸다. 특히 신들이 정해주는 '정조'의 개념에 대한 여러 의미들...

흥미로운 부분은 현대판 오디세우스로 영화 '펄프픽션'을 설명하고 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고교시절에 아주 인상깊게 본 영화인데 저자들은 거기서 오디세우스의 면을 보고 있다. 고전 뿐 아니라 영화까지ㅎ

4장은 유일신의 등장- 기독교가 바꿔놓은 삶의 가치를 설명함에 있어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는 분노와 복수의 시대가 예수의 바울의 등장으로 신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으로 수렴될 때만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로 본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은 욕망=신의사랑

5장에서는 단테의 신곡을 분석한다. 스무살에 보았던 단테의 신곡은 내게 너무나 어려웠었다. 잘 이해도 되지 않았고 서른 살에 다시 읽어도 그랬다. 유명한 미술작품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지옥 문 위에서 고통받고 있는 인간들을 보고 고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또한 그것이 단테의 신곡의 일부분이라는 내용을 듣고 [신곡]을 읽었으나 너무 장황하고 그래서 이해하기 힘들었던 기억이다. 저자는 이 장에서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으로 악마의 특징이 인간의 미덕으로 변하는 것을 알려준다. 또한 마르틴루터, 데카르트, 칸트에 이르는 '자율성'이 인간의 가장 존엄한 특징으로 재 탄생한다. 결국 칸트는 인간이란? 스스로 세운 도덕 법칙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평가될 수 있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고 했다.

6장은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에서는 종교적인 범위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립하려는 군상들을 보여주는 예시로 허먼멜빌의 [모비딕]이 등장한다. 결국 이것은 인간과(개인)과 신의 싸움으로 해석하고 있다.

방대한 스케일의 [모비딕]에서 이러한 내용을 분석하고 그곳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려하고 있었다. 아직 [모비딕]을 읽지 않았으나 (그래서 오늘 허먼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있다]), 정말 이들의 해석대로 그럴까 하는 궁금증이 [모비딕]을 읽고 싶게 만들고 있다.^^

올바르게 살기 위한 규범에 일치하도록 행동하는 것은 고금을 통해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런 어려움을 아크라시아akrasia 또는 의지의 허약함이라고 불렀다.
- p 37

도대체 어떻게 성스러움을 다시 불러 올 수 있다는 말인가?...
저자들이 제출한 답은 다신주의polythesim라는 것이다. 다신주의라는 말에는 다시 두가지 강조점이 있다. 첫째, 다多-신주의라는 말에는 전체주의, 환원주의에 대한 경계의 의미가 담겨있다. 서양 전통철학과 유대-기독교적 전통은 일신주의monotheism 편향을 가지고 있었다.
- p415 옮긴이 해설 中

다-‘신神‘ 주의라는 말에는 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다신주의라는 말의 두 의미는 모두 인간 중심주의, 주체 중심주의를 경계하고 잇다.그러면서 다신주의는 타자성을 소중히 살리려고 한다. 의미는 인간 혼자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 p416 옮긴이 해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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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17-02-02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판 오딧세이로 펄프픽션을 설명해준다라... 궁금하네요.

보쌈 2017-02-03 0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책속에 그렇게 설명되어있네요 오딧세이를 펄프픽션과 연결해서 설명한 부분에서... 역시 철학자들은 평범한 우리와는 다른 것들을 찾아내는구나 하고 감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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