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가족을 지켜봄으로써 젊은 시절 내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적 질서를 비판하던 내 시각에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그것은 따뜻한 균형이었고, 행운에속하는 경험임에 틀림없었다.

결국 인생은 인내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의 문제임을 이 버지는 말없이 가르쳐 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가르 침이 녹아 있는 ‘끈 풀기 신공‘ 덕분인지 선배네 형제들은 여간해선 제 편에서 먼저 사람을 내치거나 일을 중간에서 그만두는법이 없었다. 쉬운 길로 가고자 요령을 피워 일을 그르치거나 신뢰를 저버리는 일도 보지 못했다.

‘말라 가는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붕어는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신다‘라고 말한 이가 장자였던가. 내 비늘이 잠깐이나마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엄마의 몸에서 나온 물기 덕분일 것이다. 나는 누구의 꿈을 위해 물기를 더하고 있을까. 엄마가 보낸 택배 상자들을 풀 때마다 그 여름밤 엄마가 흘린 눈물 이 생각나곤 한다. 그러면 그때 미처 못 한 말이 가슴에 고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이의 번호를 누르면 주인이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그 사실이 암시하는 바를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다른 번호로 연락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제나 힘든 일이 생기면 진실이나 사실을 감당하기 힘들어 허둥대는 나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 같았다.

 우리에겐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 자체는 탓할 일도, 억지로 가라앉힐 일도 아니고 그저 자연스러운 욕망일 뿐이다. 다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때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고 알아채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알아채는 순간, 욕망의 온도는 견딜 만하게 내려간다.

"사랑받는 것을 내 삶의 중심으로 두면 힘들어집니다.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사랑받으려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연인 사이에 흔히 ‘넌 내 거야‘ 하고 말하죠. 그러면 그 사람이 내 것이되는 게 아니라, 내가 그 사람 것이 됩니다. 내 행복이 그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죠. 그 사람의 한마디, 몸짓 하나에 내 행복과 불행이 좌우되기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널 이렇게 좋아하고 사랑하는데, 너도 날 사랑해야 돼. 이건 거래고 흥정이지 진정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받으려 하면 괴로움이 생겨날 뿐입니다. 반면 사랑하려 하면 충만이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바로 서기 때문이죠."

그날 나는 처음 만난 두 사람에게 질문을 받았다. "그동안 어 떤 글을 써 왔죠?"와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어요?"라는 질문을, 비슷한 단어들의 조합인데도 두 질문이 너무나 다른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한쪽이 과거와 성취 중심 이라면 다른 한쪽은 미래와 기대가 담겨 있었다. 사무실에서 퇴 짜를 맞고 나와 바로 헤어지지 않고 나를 카페로 데려가 진심을 담아 물어 주었던 일은, 과연 인간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긴 작 업으로 유명한 최광호 선생님다운 배려였다.

그때는 불타는 세상의 화염에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야말로 그 불꽃을 키우는 기름의 일부였음을 이제는 안다. 돌이켜 보니 당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는 말도 아니다. 애초부터 옳고 그름은 없었다. 그저 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하는 감정에 따라 혼자만의 법 정에서 유죄, 무죄를 따졌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나는 편안해졌다, 고 감히 말하진 못한다. 다 만 이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부분에 약하고 어떤 부분 에 강한지, 무엇에 가슴 뛰고 무엇에 좌절하는지 조금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해하게 됐을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옳아서, 나만 억울한 것 같아서소화장애를 겪던 시절에 아는 분이 적어 준 네 글자가 있다.
지불책우智不責愚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이 네 글자에는 들끓는 감정을 한 단계 아래로 끌어내려 급
‘냉장시키는 탁월한 기운이 담겨 있다. 한동안은 이 기운에 의지해 내 안의 불길을 잠재워 갔다.

그 뒤 세월이 흘렀고, 내게도 거자씨만한 지혜의 싹이 돋아났다. 이제는 안다. 진정 지혜로 이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니 어리석은 사람이니 굳이 나누지 않다는 것을, 그저 괴로운 사람, 괴롭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임을 지난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면서 남긴 말씀을 기억한다.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세요."
 이 말에 담긴 깊고 고요한 에너지를 음미할 때마다 들끓던마음이 잔잔해진다. 내 안에 평화롭고 따사로운 기운이 꽉 들어찬다. 평생을 신께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교황은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행복하다. 당신도 행복하시라.
전율이 인다.
그래, 당신도 그때 힘들었겠구나, 당신도 뭔가를 쟁취해 행복해지고 싶었구나. 같은 이유로 나도 힘들었구나. 그때의 당신 마음이 당신의 전부는 아니었건만, 내 마음대로 편집해 반복 상영했구나.
 마음을 열자 바람을 탓하지 않는 나무처럼, 태양을 원망하않는 사막처럼 나는 둥글어진다. 둥글게 나를 껴안고, 당신을 안는다.

‘어쩔 수 없지. 너도 그랬잖아. 그들도 그저 어쩔 줄 몰라서 그랬을 거야.‘

그 겨울, 나는 잊어야 할 것들이 많았고
흘려보내야 할 것들도 많았다.
너무 추웠으므로
잊어야 하고 흘려보내야 할 것들이 어디에도 스며들지 못한 채
나와 함께 겨울을 횡단했다.

하지만 내게 부족한 것을 알고,
 내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도 능력이고, 재능이 아닐까.
사람들이 쉽게 행복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의
허구를 간파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대단한 능력자가 어디 있을까.

엄마도 그런 시절을 통과해 왔기에, 사는 일의 고달픔에짓눌려 봤기에 건네는 애틋한 위로의 말이란 걸.

엄마가 말했다.
"해가 지면 그날 하루는 무사히 보낸 거다. 엄마, 아버지도 시는 게 무섭던 때가 있었단다. 그래도 서산으로 해만 꼴딱 넘어가면 안심이 되더라. 아, 오늘도 무사히 넘겼구나 하고. 그러니 해넘어갈 때까지만 잘 버텨라. 그러면 다 괜찮다."
그 밤에 엄마가 속으로만 삭인 뒷말이 있었다.
"그러다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게 몸서리쳐지게 무서웠단다.
그 말까지 더해야 진실이 완성되지만 엄마는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새벽이 되면 절로 느낄 것이므로.
당장 그 순간 자식에게 필요한 것은 기운을 북돋아 주는 말이란걸 알기에. 나는 시간이 지나서야 그 뒷말까지 온전하게 전해 듣고 그 말에 담긴 서슬 푸른 삶의 비의에 혼자 몸을 떨었다.
 

"엄마아! 이 넓은 콩밭을 언제 다 맨대요?"
그때 엄마가 던진 한마디.
"야야, 눈이 게으른 거란다."

 해가 지면 안도하고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겁났다던 분들. 
그런 세월을 살면서 알아차린 것이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 걸음, 손에 집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부탁과 거절 사이의 심리적 균형을 찾는 것도 어른이 되니 과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상대가 꼭 들어줘야 한다는 기대를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현재의 내 고민을 꺼내 놓을 때, 부탁은 부탁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을 나누는 소통이 된다. 이 과정에서 상대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설사 거절한다고 해 도 당신에 대한 신뢰는 여전하고 우리 관계에는 어떤 영향도 없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잘못되는 일은 없음을 부탁이 이뤄지지않아서 잃는 것이 있다면 애초에 내 몫이 될 게 아니었던 것이다. 거절당했다고 사하라위족처럼 "당신은 내 자존심을 건드렸 어요!" 하고 울부짖을 일도 아니다. 그저 인연이 닿지 않아 일이그렇게 됐을 뿐, 거절당하는 것과 자존감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 마음에서 어떤 연결 고리가 생긴다면, 그건 거절한 사람과 상관없이 부탁하는 이편의 심리적 콤플렉스와 자괴감이 작동했을 뿐이다.

지혜로운 마음이 바탕이 된 부탁과 거절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 간단한 이치를 깨우치는 데 많은 세월이 걸렸다. 그러고도 실전에 부딪치면 늘 조심스럽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래저래 쉬운 일이 아니다.

수십 명 승객의 발을 묶어 놓은 것이 겨우 나사 하나라니, 삶은 그처럼 잔인한 비유로 가득 차 있었다.

 감사의 마음을 놓친 나머지 사랑하는 힘이 죽어 가고 있다.
 는 고백을 하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사랑하는 힘이 다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사랑을 완성할 수 있기를,
 나는 또 바란다.

우리는 외로워서 중독되는 것일까, 아니면 중독된 끝에 외로워진 것일까.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낄 때 뇌가 반응하는 부위와 코카인을 흡입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가 같다고 했던가. 무엇인가에 쉽게 중독되는 사람들에겐 허기진 내면의 자아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해 겨울을 고요한 숲 속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도시에서 밥벌이를 하는 동안 오래 여행을 떠나지 못했고, 몸은 여기저기서 경고의 신호를 보냈고, 마음은 궤도를 벗어난 별처럼 바닥 모를 곳으로 아득히 떨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때 떠오른 곳이 숲이었다. 숲과 흙길, 그리고 막힌 데 없이 탁 트인 넓은 하늘이 이 모든 것을 치유해 줄 것이란 막연한 신뢰가 있었다.

열정과 광기는 한 끗 차이에 불과하다.
세상에 떠도는 치정사건이란 치사량에 이르는 애정으로 말미암은 파멸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때론 ‘치‘가 떨리도록 지긋지긋한 ‘정‘이 일으키는 소동이기도 하다. 

멜의 발언은 사랑이야말로 철저하게 현재에 속한 우연한 사 건임을 통렬하게 지적한다. 결코 달콤하지 않은 사랑의 정의다.
칸나꽃처럼 뜨겁고 아린 청춘의 시간을 온몸으로 통과한 사람들이 사랑에 관해 품는 의문이란 대개 그렇다. 살면서 소설 속멜이 얘기했던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라는 질문과함께 허망함에 짓눌려 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너랑은 말이 잘 통해" 라는 말이 "너랑 말은 잘 통해"의 뜻인줄 어떻게 알았을까. "너와 소통이 잘되는 건 좋지만...." 이라는말 뒤에 다른 갈증이 숨어 있다는 걸 말이다. 말이 잘 통해 좋다.
던 사람은 그 말을 남기고 표표히 떠난다. "넌 내 말을 잘 들어줘. 너랑 있으면 참 편해"라는 말이 "우리 결혼할까?"의 다른 표 현인 줄 또 어떻게 안단 말인가. 얘길 잘 들어줘서 만만하게 여기나 보다 싶었는데, 실은 나와 평생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고백 이었을 줄이야. 사랑할 때 쓰는 언어는 사전에 실린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지나간 애정의 함량을 저울에 달아 계산서로 내밀 때, 순식간에 비참해지고 마는 건 스스로도 그게 억지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내게 와 줘서 고맙고, 함께 가슴 뛰는 미지의 영역을 가볼 수 있게 허락해 줘서 고맙고,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뿐인데, 입에선 다른 말이 흘러나오고 만다.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꾸벅 인사하고 돌아 나오면 그만이다. 그런데 머리로는 잘 알고 있어도 실제로 이렇듯 산뜻하기가 어디 쉬운가. 그랬다면 세상에 그 많은 회한 어린 유행가나 원망하는 마음이 발붙일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 앞에서 지지리도 못나고 맷집 약한 나를 인정하고 받아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 쿨한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한평생이 잠깐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흘러간 것 같다"고 하셨다. 
"정말 잠깐이다" 하고 아버지는 새삼스레 시간의 속도에 현기증이 난 듯 나직하게 되뇌었다. 

그날 차가운 돌바닥에 엎드리는 순간, 
운명이란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의 결과물임을 이해했다. 
그리고 또 알아차렸다. 
내 의지로 그런 환경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억울해할 수 없다는 것을,
 설사 지고한 존재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그런 선택의 배경에는 내 영혼을 위한 배려가 있었을 터였다. 
어쩌면 아버지야말로 내게서 오래도록 거절당해 온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에 이르면, 
인생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진실이 더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겸손하게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심장에서 울리는 소리를 따라 길을떠난다. 
그러나 진정 성숙한 여행자는 돌아와서 자기 발밑의 장미 한 송이를 더욱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보다 멋진 사람은 굳이 떠나지 않고도 일상의 소중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내면의 여행자이다. 
혹여 장미가 아니라 패랭이꽃이나 작은 들풀인들 어떤가.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발밑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다. 
나의 봄밤은 소쩍새가 있어 아름답고, 소쩍새 소리는 이 평범한 진리를 잊지 않도록 밤마다 울어 주는 훌륭한 길 벗이어서 정겹다.

 인간에게 집이란 무엇이었던가. 인간이 집을 부드러운 기운으로 소유하고 가꿨던 시대에는 집 한 채 장만하는 일이 이처럼살벌한 전쟁이 되진 않았다. 집의 노예로 사는 시대란 얼마나 비극적인가. 젊은이는 이제 2, 3층에만 살아도 소원이 없겠다던 옛 시절의 꿈을 부러워한다. 그런데도 집이 없는 사람에게 적대적인 이 도시를 왜 떠나지 못할까. 놓쳐 버린 옛 사람과 마주치고 싶어서, 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무리 그럴싸한 이 유를 붙여도 생존의 두려움과 탐욕, 문화생활과 활기라는 이름으로 치장한 욕망의 그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젊은이의 원죄요, 정직한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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