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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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국이 이상하다. 내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가 무참히 무너지고 있다. 광우병 파동에서 비롯된 촛불시위. 4대강 살리기를 빙자한 대운하, 신문방송 겸업을 가능케 한 미디어법 통과, 그리고 지금까지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쌍용 자동차 사태까지. 정부는 어떠한 의견수렴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채 독단적이고 독자적인 나라를 꾸려가고 있다. 이미 대한민국은 상위 1%만을 위한 나라가가 되어 버렸다. 99% 대다수의 국민은 그저 끌려가고만 있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미 대한민국은 이성을 상실한 나라다.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를 하려 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이다.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한 정부, 그들에게는 이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욕망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의 이성은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인류에게 자유와 평등, 해방의 이념을 일깨우면서 근대사회의 밑거름이 되어왔다. 하지만 이 이성 때문에 우리는 많은 전쟁과 내전, 갈등과 불평등을 억압과 폭력을 낳았다. 합리성만을 강요하며 광기로 치닫고 있는 정부와 소통을 주장하는 서민들. 이들은 여러 사건들을 통해 대립해왔고, 심지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대립은 일어나고 있다. 이토록 서로 대립, 반목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문제,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상봉의 <푸코&하버마스;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은 서양근대철학의 두 양대 산맥인 푸코와 하버마스의 철학적인 차이를 통해 오늘날 대한민국의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있는 책이다. 1960년대 근대성에 대한 대논쟁의 중심에 섰던 두 철학자, 푸코와 하버마스의 사상을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해 보고자 하는 책이다.

 

인간의 모순됨과 폭력성 때문에 강력한 제도와 처벌이 필요하다는 푸코와 인간의 이성을 존중하며 대화와 소통으로 풀어야 한다는 하버마스의 철학적 견해 차이를 철학서적 치고는(?) 꽤 쉽게 풀어냈다. 또한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인 ‘소통의 부재’에 대해 촛불시위 문제를 이 둘의 관점을 통해 가상대화로 풀어낸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푸코와 하버마스, 이들의 논쟁이 1960년대 이뤄진 것 치고는 오늘날에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부끄럽기만 하다. 오늘도 뉴스에서는 쌍용자동차 노조 사태를 보도하고 있다. 공장으로 투입된 경찰 병력들, 그들은 강력한 스턴건으로 시위자들을 진압하려 한다. 또한 시위자들은 화염병과 표창으로 무장되어 있다. 경찰도 시위자들도 대한민국 국민이다. 푸코의 이론대로라면 시위자들은 광인이다. 이들은 강력한 법과 제도 하에 법의 심판대에 올라야 할 것이고, 하버마스의 이론대로라면 정부가 이들과 소통하기 위한 공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더 노력했어야 했다. 누구의 이론이 옳고 그른지의 가치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결국 오늘날의 우리가 풀어나가야 할 숙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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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
마비쉬 룩사나 칸 지음, 이원 옮김 / 바오밥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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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둘러보면 누군가의 논리에 의해 또 다른 누군가가 희생당하는 것을 쉽게 목격한다.
대한민국에도 독재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독재자 박정희, 누군가에게는 향수라는 의미로, 그의 유지를 이어 정치를 하려는 누군가에게는 정신적인 지주로 느껴지겠지만

그의 17년간의 독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그 더러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던가, 또한 9년간 독재를 했던 전두환도 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뒀고, ‘삼청교육대’라는 것을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의 인권을 유린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세계 인권선언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 등

어떠한 종류의 차별이 없이, 이 선언에 규정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향유할 자격이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살펴보자면, 정부의 인권유린 정도가 극에 달했다고 느껴진다.
특히 촛불정국을 거치며 이명박 정권은 특유의 아집과 고집을 보여주었다.
이런 아집들은 인권유린에 맞선 처절한 죽음 앞에서도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용산 참사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장자연 씨 사건, 화물연대 박종태 씨 자살 등...
이명박 정권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도 모르는 집단임을 드러냈다.

복지예산 삭감, 비정규직문제, 쌍용 노조파업, 좌파척결, 미디어법, MB악벅, 그리고 최근의 범죄자 신상공개 결정 등...

이명박 정부는 입으로는 ‘선진화’만 외치고 있으면서 인권을 잔인하게 유린하고 있어 인권의 시계바늘은 2~30년 전으로 후퇴시키고 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는 우리의 우방국이라는 ‘미국’의 행보와는 전혀 반대로 가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식 다음 날 처음으로 서명한 공식문서는 관타나모 수용소를 1년 내에 폐쇄하라는 행정명령이었다고 한다.

취임하자마자 전시행정이라고 비난하며 복지예산을 삭감했던 아시아의 어느 작은 나라의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행보이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쿠바 남동쪽 끝부분 미국령 해군기지가 위치해 있는 수용소다. 
이전에는 주로 쿠바나 아이티에서 배를 타고 넘어오는 난민들을 수용하다가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시작하면서

탈레반과 알 카에다 포로들을 억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시 전 대통령은 관타나모 수용자들에게는 제네바 협약에 의한 '전쟁 포로'대우를 해주지 않음으로써

수용소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인권 침해 지적을 받아왔다.

국제엠네스티, 적십자위원회 등이 관타나모 인권 탄압에 대한 보고서를 냈고 유엔은 2006년 폐쇄를 촉구하기도 했다.

그동안 연인원 770여 명이 수감됐지만 9.11 테러와 관련이 없는 위그르족 분리독립운동가 등도 많아 논란이 되어왔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자행되어진 많은 인권유린의 실태를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에서는 낯낯이 드러내고 있다.

<나의 관타나모 다이어리>는 인권 유린의 현장인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통역과 변호를 맡았던

마이애비 로스쿨 여대생 마비쉬 룩사나 칸이 보고 들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탈레반의 테러리스트들이나 수용되는 줄 알았던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그녀가 만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가 잘 담겨 있다.

언제 풀려나게 될지 기약도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읽는 내내 눈물이 흘러나오게 만들었다.

관타나모 수용소 절망 속에서도 삶이라는 희망을 꿈꾸는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세상이 힘들게만 느껴지는 나에게 자극이 되었다.

 

또한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미군의 고문과 횡포는 보는 내내 치가 떨리게 만들었다.

자신들이 저지르는 인권유린은 모른 척 한 채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에 대해 제기하는 그들의 이중성에 소름이 끼쳤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저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나라라고 밖에 생각되질 않는다.

 

더욱이 걱정되는 것은 우리나라가 과거 미국의 모습을 닮아 있다는 사실이다.

명박산성을 쌓아두고 국민들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있고, 유모차 부대부터 초등학생까지 과격시위대라며 잡아가는 정부다.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또한 여당의 정책들을 보면 하나같이 ‘서민을 위한 정책’들이라고 한다.

과연 그것이 서민들을 위한 정책인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되묻고 싶다.

또한 그들이 말하고 있는 서민은 누구를 말하는지 묻고 싶다.

 

혹시 강남 땅부자들은 아닌지, 1%의 부자들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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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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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이다.


나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이 더 넓어질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지구의 3분의 2가 바다. 내 상상 속 미래도시는 바다 위에 건설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변하고 세상이 변할수록 좁은 땅덩어리에서 건물들만 점점 높아져가고 있다.


내가 어릴적, 그러니까 내가 유치원 다닐 무렵에는 5층짜리 우리 아파트가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 건물도 조그만 내가 올라가기에는 버거웠다.
유치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기진맥진하기 일쑤였다.

내가 살고 있는 부산은 그때의 5층 아파트는 보기 힘들다.
이제는 20층 30층의 초고층의 아파트가 아무렇지 않게 세워지고 있고, 그러한 아파트는 부의 상징이 되고 있다.
우리같은 아랫것들은 평당 수천만 원이 넘어가는 고급아파트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작은 서민아파트라도 어떻게든 구해보려고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다.

 

청기와에 살고 계신 분이 대통령 선거에 나올 당시 국민들에게 많은 약속을 했다.
반값 아파트, 반값 등록금...그중에 지킨 약속은 하나도 없다.


강남 땅부자들을 위해서 어떡해서든 땅값을 올릴 사명을 띠고 4대강 유역에 삽질을 하고 계시고,
등록금은 모 대학에는 천만 원을 넘어섰다.
국민들은 못살겠다고 촛불을 들고 나서는데 위에서는 귀를 막고 도저히 들어주질 않고 있다.
그러면서 윗분들은 ‘소통’운운하고 계신다.
아, 웃기는 상황이다.

 

그런 웃긴 상황이 소설에서 그대로 그려지고 있다.
배명훈의 <타워> 이 책은 SF소설이다. 하지만 도저히 SF소설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미래에는 현재의 모습이 그대로 그려지고 있다.

 

높이 2,408m, 거주인구 50만,
지상 최대의 마천루 ‘빈스토크’
그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나?

 

이 책은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알고 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배명훈이라는 작가를 발굴해 낸 <알라딘>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의 상상력은 때로는 신카이 마코토의 서정적인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성석제와 같은 기막힌 이야기 꾼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박민규와 같은 황당함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박민규 작가는 배명훈의 작품을 이렇게 표현했나 보다.

“아마도 100년 후, 한국 문단은 작가 배명훈이 이 땅에 있었다는 사실에 뒤늦은 감사를 표해야 할 것이다. 오늘 그가 쌓은 ‘타워’의 높이보다 그 탑의 그림자가 몇 배는 더 길거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소설임이 틀림 없다.

 

p.44
K는 털면 먼지가 나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심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남들보다 덜할 거라는 자신도 없었다. 본인이 직접 붙들려서 먼지를 털린 적은 없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모습을 지켜본 것뿐이었다. 조용히 들어앉아서 가만히 살펴보니 누구는 털어도 결국은 먼지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업무 추진비를 잘못 집행했다거나, 시험 전에 여학생 제자와 식사를 했다거나, 등록된 주소지와 실제 거주지가 달랐다거나, 분명히 잘못한 일이, 잘못이 아니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일들이 한두 건씩 어김없이 발견되는 것이었다. 염라대왕 앞에 불려가서 평생 동안 저지른 잘못을 모두 떠올리기 전에는 절대 떠오를 것 같지 않던 온갖 못된 짓들이 여론의 심판대에 횟감처럼 올려지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두려웠다.

 

p.55
충격이어다. 15년 만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물론 그동안에도 재미없고 밋밋한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원고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글이 밋밋해진 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글을 걸러내는 눈이 무뎌지지만 않는다면 그런 글이 나왔다고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폐기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눈이 낮아지면, 그 길로 끝장이었다.

 

p.71~72
스물여덟 살에 쓴 글을 꺼내 보았다. 나는 불만에 가득 찬 젊은이였다.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모두 다 기성세대의 잘못이었다. 나는 기성세대를 욕하고 비난했다. 열정을 가지고 부딪치고 도전하라는 말에, 열정을 바쳐 일한 만큼 돌려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두었냐고 반문했다. 또박또박 따져 물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바로 그 세대가 되었다. 그렇게 이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세상이 아름답지 않다면 이제는 다른 누구를 비난할 처지가 아니었다. 내 잘못이었다. 내가 잘못했다.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바로 내 책임이었다. 나는 나를 즐겁게 하는 수많은 것들을 접어두고 이런 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p.225
모든 건물이 무너지고 인류가 모조리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는 평면 공간으로 떨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최후의 심판이었다.

 

p.264~265 '타워 개념어 사전‘中

①빈스토크 생태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네 발 짐승. 일부 개체는 빈스토크 내 권력 핵심부에 서식하며 ‘국민’이라고 짖기도 하여 언어 구사 가능성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②인간의 다양한 존재양태 중 하나로, 일정 정도 이상 알코올을 섭취한 경우에 발현되는 인간 내면의 극단적 외면화 현상을 일컬음

 


축적된 감정적 세대를 희생하여 업무의 효율성 제고를 꾀하는 의사소통 방식.
예)“곧 성행위를 할 사람들”, “생식기 같은 자들”

 

p. 267 작가의 말 中
예전에 어느 선생님께서 성격 좋은 사람은 작가가 못 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때그때 말로 풀어내지 못하고 꽁하게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나중에 아무도 안 보는 데 가서 글로 쓰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는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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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문화를 읽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동녘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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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참으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다.
너무도 빠른 발전 속에서 많은 걸 잊어버리고 산다.
나만 해도 내 휴대전화번호 외에는 외우고 있는 번호가 없을 정도다.
부모님 전화번호도, 동생의 전화번호도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를 이용하지 않으면 기억해 낼 수 없다.
디지털의 홍수 속에 우리는 나이에도 맞지 않은 ‘치매’현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굳이 그것뿐일까?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들은 갈피를 못 잡고 부유하고 있다.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보수가 뭐고 진보가 뭔지,
정부는 4대강 정비 사업을 한다는데 사람들은 대운하 운운하는지...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에 손을 들어줘야 할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때문에 무수히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것들을 알아서 어디 쓰겠냐마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경상도 사투리로 하자면 ‘단디’, 야무지게 해야 한다.

<철학, 문화를 읽다>는 이런 정신없는 시대에 ‘성찰’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 시대의 성찰은 나와 이웃의 삶을 거리를 두고 돌아보는 것이고,
이런 성찰이 동반된 삶을 실천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언뜻 보면 철학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우리 일상의 다양한 영역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문화와 철학을 생각해 볼 수 있는 통로가 되길 원하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시민, 성, 페미니즘, 가상현실, 환경, 시간과 공간, 종교 등
우리 사회와 우리 문화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음미할 수 있다.
또한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책 등을 함께 실었고,
함께 생각해 볼 문제들이 있어 좀 더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철학을 하고 싶은가?
이 책은 당신에게 생각보다 철학이 어렵지 않다는 충격(?)을 줄 것이다.

p5.
우리는 때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가곤 합니다. 길을 걸어 갈 뿐, 가는 행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고산을 오르는 전문 산악인들은 짐을 날라주는 원주민을 고용합니다. 그런데 이 원주민들이 어느 정도 가다가는 길에 앉아 산 아래를 내다보며 쉰다고 합니다. 걸음을 재촉하며 산악인이 묻자, 원주민이 답했습니다. “뒤쳐진 영혼을 기다려야 한다”고.
우리는 ‘정신없이’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잠시 멈춰 우리 삶을 우리 삶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p.45
미래 첨단 정보사회에서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출현할 것이다. 한 울타리에서 한솥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는 끈끈한 오프라인의 공간을 많은 사람이 답답해 뛰쳐나올 것이다. 그 대신 ‘전자 공간’을 매개로 한 온라인 인간관계가 확대될 것이라는 예측이 그리 틀리지 않는다.

p.71
대한민국 헌번 제1조에 보면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민주주의국가란 뜻이다. 사전을 보면 민주주의는 민중(demos)이 통치(kratia)하는 정치체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인 것이다. 헌법 1조의 이 내용은 1948년 제헌 이후 지금까지 동일하다.

p.79~80
“민주화가 밥 먹여주느냐”라는 세간의 농담은, 개혁의 방향을 되돌리려는 보수층이 만들어낸 무서운 이데올로기다. 문제는 이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경제다” 운운하는 환상적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중산층과 실업자, 농민과 노동자 계층을 본질적으로 그들에게 역행하도록 되어 있는 보수당을 지지하도록 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p.81
국민의 67퍼센트가 바람직한 우리나라의 모습으로 ‘사회복지가 잘 갖추어진 나라’를 들었다. 예상 밖의 결과다. 심지어 엊그제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찍은 ‘나는 보수’라는 사람 중에도 64퍼센트가 우파의 슬로건인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좌파의 목표인 ‘사회복지’의 구현을 희망했다. 비록 투표는 한나라당에 했지만 정당의 이념으로는 피설문자의 51.1퍼센트가 진보정당, 녹색정당의 비전에 동의한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을 어떻게 설명하고 또 극복할 수 있을까?
.......
국가 비전은 진보당이 옳지만 내 집값 때문에 뉴타운 개발 정책을 내건 한나라당을 대거 찍은 국민들의 단결과 무임승차 심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뿐인가. 촛불을 지핀 학생과 시민의 절대다수가 여전히 박정희를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로 꼽는 어지러운 현실이다.
.......
최장집 교수가 말했다. 촛불의 축제는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주장하던 ‘정당정치 실종’의 증거라고. 하지만 그가 한 말이 또 있다. 아직 우리의 민주주의는 연대와 참여의 경험 과정이 짧은 ‘조숙한 민주주의’라고.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p.85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하려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 노래를 부르던 당시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민주주의는 한 번에 달성되는 어떤 정형의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야 하는 운동이다.

p.114
사람들은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먹으며 현금을 인출하고 휴대전화를 충전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라면 편의점은 더욱 유용하다. 지나치게 밝은 조명은 고독한 사람들을 이끄는 유도등 역할을 한다. 편의점 구석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으면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옆에 앉는다. 나만 깨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모르는 사람 사이에 섞여 있다는 익명성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생각에 보호받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24시간 편의점은 21세기 한국인들에게 현재의 욕망과 고독의 틈새를 배우는 완충지대다.

p.120
수요가 있어서 공급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시스템이다. 대중은 그들이 기획하고 공모한 대로 물건을 구매하고 그것을 마치 자신들이 원해서 선택한 유행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계획되고 기획된 시스템의 일부에서 그저 지갑을 열어 신용카드를 긋는 소비 대행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p.148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이’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상태와 장소와 o로 이행해간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人間)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텅 빈 사이(空間)의 한 곳을 차지하며, 특정 시기들 사이(時間)를 여행한다. 사람은 ‘사이’들 속에서 형성되는 관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과정이다.

p.154
사람이 사람처럼 살자고 굳이 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경오염, 문명 오염, 정치 오염, 그리고 그보다 더 겁나는 개개인의 의식 오염이 이미 퍼져 있는 이 땅에서 과연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그래도 실망할 수 없다. 쓸려간 땅에도 이듬해에는 풀이 돋아난다. 이러한 풀의 기운을 되살려 풀 죽어가는 삶에 새로 풀 먹이는 지속 가능한 문화를 찾아야 한다.

p.156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회사의 과장으로서의 나, 두 아이의 아비로서의 나, 동창회 총무로서의 나, 교회 집사로서의 나 등으로 답변을 하고 만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내가 진정한 나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어떤 역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나의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한다.

p.158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p.159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정부는 핵 발전이 매우 안전하며, 최고의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물어붙이고 있다. 그들은 단기간의 경제 기준에 눈이 멀어 핵 발전의 반환경적 위험 요인을 무시하고 만다. 환경기준을 내세우지 않고 단지 경제 기준을 따진다고 해도 핵 발전은 유해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핵 발전은 매우 비경제적이라는 말이다. 핵 발전소 건립 이후 야기되는 문제를 잘 따져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p.166
농약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도시인은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한미FTA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 농촌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경제 정도 되면 까짓 농산물 수입쯤은 아무 문제 아니라고 간단히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데 놀랄 뿐이다. 자동차와 반도체를 수출하려면 그까짓 쌀쯤이야 넘겨줘도 괜찮다는 생각. 그것은 우리의 자생적 문화를 포기하는 일이며 우리의 진짜 경제를 넘겨주는 일이다.

p.167
산업화의 꽃을 피운 서구의 나라들도 우리나라만큼이나 먹을거리의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가 없다. 우리나라는 식량자급률이 26퍼센트도 안 된다. 산악 지역인 스위스도 65퍼센트, 사막 지역인 이스라엘도 95퍼센트이며, 미국(133.5퍼센트), 캐나다(162.8퍼센트), 프랑스(194.5퍼센트) 등은 당연히 100퍼센트를 넘는다. 산업화의 상징 국가였던 독일이나 영국도 55~85퍼센트에 이른다.

p.196
속도의 파시즘에 굴복하는 삶, 즉 가속에 맹목적으로 열광하고, 심지어 그것을 도덕화하고 미학화하는 삶은 자본과 이윤의 축적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그 가속의 극한에 이르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수많은 공간을 용도 폐기하기 마련이다.

p.204~205
서양 사람들의 공동묘지는 우리와는 달리 흔히 시내 한복판에 있다. 자주 발견되는 묘비명 가운데 하나는 “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 표현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오늘은 나의 차례, 내일은 너의 차례“라는 말이다. 공동묘지에 방문한 산 사람에게 죽은 자가 주는 충고인 것이다. 서양인들의 집 거실에 놓는 괘종시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Memento mori"우리말로는 ‘그대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이다.

p.218
기독교의 사랑은 같은 믿음을 지닌 ‘우리’하느님의 형제자매의 울타리 안에서만 적용되고, ‘우리’가 아닌 사람에게는 사랑의 반대 축, 즉 가혹한 도륙만이 있을 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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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경옥 옮김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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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꼭 완독하고 싶었던 책이 있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하지만 늘 1권에서 3권까지만 읽게 되었고, 완독은 하지 못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하소설 중 완독하게 된 건 최명희 선생의 혼불 정도?
(야하다는 이야기에 솔깃해 읽었던 객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도 있긴 있다.)
아, 국문학도인 게 살짝 부끄럽다.

 

솔직히 난 두꺼운 책이 두렵다.
출퇴근 시간에 독서시간을 갖기 때문에 독서 시간도 충분치 않고,
그렇다고 집중력이 좋은 편이 아니기에 두꺼운 책을 흐름을 놓지지 않고
드문드문 읽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혹시라도 흐름을 놓칠까봐, 빼놓고 그냥 넘어가는 부분은 없을까
조마조마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것은 즐겁게 독서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산책’은 최근에 접한 책 중 보기 드물게 두꺼운 책이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선택했는지 책을 받자마자 한숨이 나오긴 했다.

그리고 678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을 보며, 차라리 2권으로 나눠 인쇄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내 부담감은 조금 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사실 모든 게 게으른 내 탓이다.


‘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산책’은 시간을 넉넉히 잡고
집에서 뒹굴뒹굴하면서 봐도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는 사실!

 

빌 브라이슨은 더 타임즈로부터 “현존하는 가장 유머러스한 작가”라는 평가를 듣는 작가다.
그의 유머러스함은 이미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을 통해 접했기 때문에

사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엄청났다.
쉴 새 없이 계속되는 그의 입담은 책을 읽는 내내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발칙한 미국학’이 영국에서 생활하는 미국인으로서 미국을 시원하게 깠던 책이라면,
발칙한 영어산책에서는 조금 무게를 잡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은 여전하다.

 

이 책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영단어를 통해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이야기 하고 있는 책이다.
특유의 입담과 재치로 미국의 역사와 풍속을 아우르는
웃음 넘치는 이야기가 페이지마다 녹아 있다.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미국의 역사이야기와
별것 아닌 이야기지만 역사 속에서 대단한 사건인 마냥 포장되었던 이야기까지

영단어와 미국의 역사를 연결시켜 서사를 해나가고 있는 그의 입담은
읽는 내내 무릎을 치게 만든다.


딱딱한 교과서 속 ‘역사’가 아닌
웃음과 해학이 넘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지 않은가?
우리가 알고 있던 미국의 역사가 사실과는 조금 다른 역사라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 아닐까.

 

그의 박학다식한 지식을 만나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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