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학, 문화를 읽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동녘 / 200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참으로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다.
너무도 빠른 발전 속에서 많은 걸 잊어버리고 산다.
나만 해도 내 휴대전화번호 외에는 외우고 있는 번호가 없을 정도다.
부모님 전화번호도, 동생의 전화번호도 휴대전화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를 이용하지 않으면 기억해 낼 수 없다.
디지털의 홍수 속에 우리는 나이에도 맞지 않은 ‘치매’현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굳이 그것뿐일까?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들은 갈피를 못 잡고 부유하고 있다.정치적, 경제적으로 불안한 상황에 보수가 뭐고 진보가 뭔지,
정부는 4대강 정비 사업을 한다는데 사람들은 대운하 운운하는지...
이런 것들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디에 손을 들어줘야 할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답답하기만 하다.
때문에 무수히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것들을 알아서 어디 쓰겠냐마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
경상도 사투리로 하자면 ‘단디’, 야무지게 해야 한다.
<철학, 문화를 읽다>는 이런 정신없는 시대에 ‘성찰’을 강조하고 나섰다.
이 시대의 성찰은 나와 이웃의 삶을 거리를 두고 돌아보는 것이고,
이런 성찰이 동반된 삶을 실천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언뜻 보면 철학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우리 일상의 다양한 영역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문화와 철학을 생각해 볼 수 있는 통로가 되길 원하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논술을 준비하는 고등학생들에게 강력 추천하고 싶다.
이 책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다양한 문제들이 논의되고 있다.
시민, 성, 페미니즘, 가상현실, 환경, 시간과 공간, 종교 등
우리 사회와 우리 문화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음미할 수 있다.
또한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책 등을 함께 실었고,
함께 생각해 볼 문제들이 있어 좀 더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철학을 하고 싶은가?
이 책은 당신에게 생각보다 철학이 어렵지 않다는 충격(?)을 줄 것이다.
p5.
우리는 때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냥 가곤 합니다. 길을 걸어 갈 뿐, 가는 행위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데스 산맥의 고산을 오르는 전문 산악인들은 짐을 날라주는 원주민을 고용합니다. 그런데 이 원주민들이 어느 정도 가다가는 길에 앉아 산 아래를 내다보며 쉰다고 합니다. 걸음을 재촉하며 산악인이 묻자, 원주민이 답했습니다. “뒤쳐진 영혼을 기다려야 한다”고.
우리는 ‘정신없이’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이 되려면 잠시 멈춰 우리 삶을 우리 삶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p.45
미래 첨단 정보사회에서는 새로운 인간관계가 출현할 것이다. 한 울타리에서 한솥밥을 먹고 같이 잠을 자는 끈끈한 오프라인의 공간을 많은 사람이 답답해 뛰쳐나올 것이다. 그 대신 ‘전자 공간’을 매개로 한 온라인 인간관계가 확대될 것이라는 예측이 그리 틀리지 않는다.
p.71
대한민국 헌번 제1조에 보면 “1.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되어 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민주주의국가란 뜻이다. 사전을 보면 민주주의는 민중(demos)이 통치(kratia)하는 정치체제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인 것이다. 헌법 1조의 이 내용은 1948년 제헌 이후 지금까지 동일하다.
p.79~80
“민주화가 밥 먹여주느냐”라는 세간의 농담은, 개혁의 방향을 되돌리려는 보수층이 만들어낸 무서운 이데올로기다. 문제는 이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경제다” 운운하는 환상적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중산층과 실업자, 농민과 노동자 계층을 본질적으로 그들에게 역행하도록 되어 있는 보수당을 지지하도록 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p.81
국민의 67퍼센트가 바람직한 우리나라의 모습으로 ‘사회복지가 잘 갖추어진 나라’를 들었다. 예상 밖의 결과다. 심지어 엊그제 한나라당과 이명박을 찍은 ‘나는 보수’라는 사람 중에도 64퍼센트가 우파의 슬로건인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좌파의 목표인 ‘사회복지’의 구현을 희망했다. 비록 투표는 한나라당에 했지만 정당의 이념으로는 피설문자의 51.1퍼센트가 진보정당, 녹색정당의 비전에 동의한 것이다. 이런 이율배반을 어떻게 설명하고 또 극복할 수 있을까?
.......
국가 비전은 진보당이 옳지만 내 집값 때문에 뉴타운 개발 정책을 내건 한나라당을 대거 찍은 국민들의 단결과 무임승차 심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뿐인가. 촛불을 지핀 학생과 시민의 절대다수가 여전히 박정희를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로 꼽는 어지러운 현실이다.
.......
최장집 교수가 말했다. 촛불의 축제는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주장하던 ‘정당정치 실종’의 증거라고. 하지만 그가 한 말이 또 있다. 아직 우리의 민주주의는 연대와 참여의 경험 과정이 짧은 ‘조숙한 민주주의’라고.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p.85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더욱 발전하려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노래. 그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 노래를 부르던 당시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민주주의는 한 번에 달성되는 어떤 정형의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야 하는 운동이다.
p.114
사람들은 편의점에 들어가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먹으며 현금을 인출하고 휴대전화를 충전한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라면 편의점은 더욱 유용하다. 지나치게 밝은 조명은 고독한 사람들을 이끄는 유도등 역할을 한다. 편의점 구석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으면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 옆에 앉는다. 나만 깨어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된다. 모르는 사람 사이에 섞여 있다는 익명성은 때로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아무도 나를 모른다는 생각에 보호받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24시간 편의점은 21세기 한국인들에게 현재의 욕망과 고독의 틈새를 배우는 완충지대다.
p.120
수요가 있어서 공급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시스템이다. 대중은 그들이 기획하고 공모한 대로 물건을 구매하고 그것을 마치 자신들이 원해서 선택한 유행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계획되고 기획된 시스템의 일부에서 그저 지갑을 열어 신용카드를 긋는 소비 대행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p.148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이’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새로운 상태와 장소와 o로 이행해간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人間)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텅 빈 사이(空間)의 한 곳을 차지하며, 특정 시기들 사이(時間)를 여행한다. 사람은 ‘사이’들 속에서 형성되는 관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과정이다.
p.154
사람이 사람처럼 살자고 굳이 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경오염, 문명 오염, 정치 오염, 그리고 그보다 더 겁나는 개개인의 의식 오염이 이미 퍼져 있는 이 땅에서 과연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문제다. 그래도 실망할 수 없다. 쓸려간 땅에도 이듬해에는 풀이 돋아난다. 이러한 풀의 기운을 되살려 풀 죽어가는 삶에 새로 풀 먹이는 지속 가능한 문화를 찾아야 한다.
p.156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회사의 과장으로서의 나, 두 아이의 아비로서의 나, 동창회 총무로서의 나, 교회 집사로서의 나 등으로 답변을 하고 만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내가 진정한 나인지를 되물어야 한다. 어떤 역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나의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한다.
p.158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p.159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하는 정부는 핵 발전이 매우 안전하며, 최고의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물어붙이고 있다. 그들은 단기간의 경제 기준에 눈이 멀어 핵 발전의 반환경적 위험 요인을 무시하고 만다. 환경기준을 내세우지 않고 단지 경제 기준을 따진다고 해도 핵 발전은 유해하다. 장기적 관점에서 핵 발전은 매우 비경제적이라는 말이다. 핵 발전소 건립 이후 야기되는 문제를 잘 따져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p.166
농약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도시인은 실감하지 못하는 듯하다. 한미FTA가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우리 농촌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지만, 여전히 우리의 경제 정도 되면 까짓 농산물 수입쯤은 아무 문제 아니라고 간단히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데 놀랄 뿐이다. 자동차와 반도체를 수출하려면 그까짓 쌀쯤이야 넘겨줘도 괜찮다는 생각. 그것은 우리의 자생적 문화를 포기하는 일이며 우리의 진짜 경제를 넘겨주는 일이다.
p.167
산업화의 꽃을 피운 서구의 나라들도 우리나라만큼이나 먹을거리의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가 없다. 우리나라는 식량자급률이 26퍼센트도 안 된다. 산악 지역인 스위스도 65퍼센트, 사막 지역인 이스라엘도 95퍼센트이며, 미국(133.5퍼센트), 캐나다(162.8퍼센트), 프랑스(194.5퍼센트) 등은 당연히 100퍼센트를 넘는다. 산업화의 상징 국가였던 독일이나 영국도 55~85퍼센트에 이른다.
p.196
속도의 파시즘에 굴복하는 삶, 즉 가속에 맹목적으로 열광하고, 심지어 그것을 도덕화하고 미학화하는 삶은 자본과 이윤의 축적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그 가속의 극한에 이르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이질적인 수많은 공간을 용도 폐기하기 마련이다.
p.204~205
서양 사람들의 공동묘지는 우리와는 달리 흔히 시내 한복판에 있다. 자주 발견되는 묘비명 가운데 하나는 “Hodie mihi, cras tibi"라는 라틴어 표현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오늘은 나의 차례, 내일은 너의 차례“라는 말이다. 공동묘지에 방문한 산 사람에게 죽은 자가 주는 충고인 것이다. 서양인들의 집 거실에 놓는 괘종시계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기도 하다. ”Memento mori"우리말로는 ‘그대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뜻이다.
p.218
기독교의 사랑은 같은 믿음을 지닌 ‘우리’하느님의 형제자매의 울타리 안에서만 적용되고, ‘우리’가 아닌 사람에게는 사랑의 반대 축, 즉 가혹한 도륙만이 있을 뿐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