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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리시 페이션트 ㅣ 에디션 D(desire) 14
마이클 온다치 지음, 박현주 옮김 / 그책 / 2018년 1월
평점 :
처절한 전쟁의 끝무렵, 영국인 환자와 간호사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라는 스토리로 간단하게 알고 있던 책, 아니 정확하게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잔잔하고 섬세한 러브스토리를 견뎌내지를 못하는 편이고 지루함을 느껴서 추천을 많이 받았음에도 한번도 그 영화를 보지않았다. 그들의 감정선이 느려서 호흡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고 급한 성격에 지루함을 느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분명 느린 호흡의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 아름다울 것이고 어쩌면 이제는 그 영화를 함께 호흡하며 볼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책을 읽으면서 한편의 영화를 이미 그렸기 때문이다.
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정신없이 나오지만 잔잔하고 고요하다. 전쟁의 끝무렵, 폐허가 된 이태리의 한 수도원, 아니 병원, 아니 그들의 거주지가 주요 배경이지만 주인공이 되는 인물에 따라 사막으로 갔다가 영국으로 갔다, 전쟁터로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읽는 내내 그들의 거주지에 함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간호사이자 많은 이들을 치유해주는, 실제로는 본인도 조금씩 치유가 되는 해나, 그리고 가족을 감옥으로 보내고 그가 믿고 배움을 받고 함께 일한 영국인팀을 전쟁에서 잃어버린 폭발전문가 공병 킴, 해나의 아버지 친구이자 도둑, 첩자였던 엄지를 잃은 카라바지오. 이 세명은 적극적으로 함께 하지 않지만 그저 그 공간에 함께 존재하고 필요한 순간을 버텨내면서 공기처럼 서로에서 치유가 된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고 기승전이 뚜렷한 것도 아니다. 그저 스며들듯 긴장감이 편안함이 되고 불안감이 익숙함이 되며 그들의 존재와 이야기가 하나의 삶이 되어 이야기로 풀어나온다. 영국인 환자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보청기없이 듣기도 힘들지만 그의 이야기는 해나와 다른 이들에게 계속해서 그의 존재를 인지시킨다. 그의 연인이었던 캐서린과의 로맨스는 불안하고 광적이며 애잔하다. 그렇게 소설의 처음과 끝은 큰 기복없이 이어진다.
마이클 온다치, 스리랑카에서 태어나 영국과 캐나다에서 공부를 했고 다시 고향으로 가서 책을 썼다고 한다. 영국인 흑인 남성(실제는 영국인이 아닌)이 나와서가 아니라 책의 저술문체 하나하나가 고풍스럽고 영국식 느낌이 난다. 섬세하고 서정적이며 시적이라서 주인공들의 행동보다 그 순간을 표현한 다양한 언어에 감탄하면서 읽었다. 한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공기2줄, 빛 2줄, 공간 15줄...그들의 숨소리 3줄....... 한장이 넘게 꽉 채운 문장이 필요한가보다. 그렇게도 글을 쓸 수 있구나라는 걸 느꼈다. 자세하면서도 시적이고 아름다운 표현들에 나도 모르게 그림이 그려지고 서정적인 영화의 장면이 머리속에 상상이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빨리 읽혀지는 소설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음악같은 소설이다. 피폐한 배경상황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지만 점잖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것은 작가의 문체때문일 것이다. 부커상은 역시 아무나 받는 건 아닌 것 같다. 오래 걸려 읽었지만 오랜만에 시적 감수성에 마음이 흔들려서 좋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