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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평점 :
* 이 글은 한겨레교육문화센터 '한터21' 수강 과제로 제출한 서평입니다.
〈책〉 성석제 지음 / 창비 2002
당신의 만나는 무엇인가요?
“방으로 들어오는 길에 보니 바닥 이곳저곳에 책이 떨어져 있었다, 만나처럼.” 만나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식량에 굶주릴 때 하느님이 내려줬다고 전하는 신비한 음식이다. 성석제 작가의 〈책〉에서는 무수한 책에 치여 사는 ‘당숙’에 대한 이야기를 코믹하고도 담백하게 그려낸다.
주인공 당숙은 ‘서음書淫’이다. 그것도 극단적인. 그가 모은 책의 양으로 말하자면 ‘총수량 추정치 삼만 권’으로 아파트인 집에 들이다 못해 지하에 창고를 지었고 그것마저 부족해 따로 이삿짐쎈터에 맡겨야 했을 정도다. 당숙은 불쌍한 존재이다. 늦둥이로 태어난 건 그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그로인해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고 책은 그런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이해자였다. 물론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책은 그에게 직업을 구해주었고 결혼도 하게 해주었다. 어쩌면 자폐증을 앓았던 당숙에게 정상인의 삶을 살아갈 유일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당숙이지만 화자는 조카인 ‘나’다. ‘나’는 당숙의 일종의 숭배자이자 신관. 아내인 당숙모마저 못 견딘 당숙의 책을 떠맡겠다고 나선 건 다름 아닌 ‘나’였다. 트럭 두 대가 동원된 대규모 이동작전 중 좌충우돌 벌어지는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모두 ‘나’의 몫.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 과정에서 질릴 만도 할 것 같은데 ‘나’는 경건한 신을 모시는 양 힘들지언정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겨우 당숙을 택시에 태우고 돌아오는 길에는 마치 보상인 것처럼 신이 내려준 만나 같은 책이 이곳저곳 떨어져 있다.
책은 지성과 지식, 경험의 매체이자 문명의 토대이다. 자신은 ‘무한히 펼쳐진 진리의 바닷가에서 작은 조약돌이나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는 어린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뉴턴의 말과 같이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이기와 문명은 선인들의 지혜라는 튼튼한 주춧돌에 책이라는 벽돌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신전과도 다름없다. ‘나’가 무의식중에 토로한 책에 대한 ‘경외감’과 ‘인류애’란 이런 사실을 이해한 입장에서 내뱉은 진심의 조각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책이 신성하게 느껴진다면 그 속에서 뽑아낸 지식으로 척천리尺千里 망미정望美亭의 뜻을 척척 풀어내는 당숙이 교황쯤으로 보일만도 하다.
책 냄새에 미소가 지어지는 사람이라면 응당 한 번쯤 읽어봐야 할 단편. 개인적으로도 어릴 적부터 도서관이나 서점에 들어가면 물씬 풍기는 살짝 퀴퀴한 책 냄새가 (건강에는 좋지 않다고 하나) 반갑지 않은 때가 없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며 시종 느껴지는 책에 대한 작가의 집착에 더욱 동질감을 느꼈다.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작가에게 아마 이 단편은 주위의 기대도 물리치고 빠져들 만큼 매력적인 존재인 책을 가지고 쓴, 오랜 기간 룸펜으로 지낸 자신과 책벌레 동료들을 향한 헌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