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 동물들이 찾아오고 이야기가 샘솟는 생태다양성 가득한 정원 탄생기
시몽 위로 지음, 한지우 옮김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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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녹음이 무성한 초여름과 잘 어울리는 책. 저자가 직접 정원을 가꾸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 땀 한 땀 정원을 가꾸며 만난 나무, 풀, 꽃, 곤충, 벌레를 소개해주고, 정원을 가꿔가며 있었던 일들이 일러스트와 함께 그려진다. 정원을 가꾼다하면 정원을 도시정화나 인테리어를 위한 '수단'으로 쉽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몽 위로는 정원을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목적'으로 여기며 정원을 가꾼다. 시몽 위로는 한창 개발중인 공터라 해도 믿을 만한 넓은 땅을 뚜렷한 계획이나 목표없이 가꾸어나가기 시작한다. 콘크리트와 철로 된 높은 건물, 아스팔트 바닥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몽 위로가 가꾸는 정원의 모습과 정원을 가꾸며 있었던 에피소드는 새롭고, 재미있으며 왠지 모를 편안함을 준다. 정원에서 만난 다양한 식물, 나비, 곤충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 이름들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한편 다양한 식물과 생명체들의 이름을 알고, 두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느낄 수 있는 시몽 위로와 그의 가족들이야 말로 진짜 '부자'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안하거나 우울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은 모두 자연에 있다. 시몽 위로는 정원을 가꾸며 자연에 따라, 자연을 존중하며 사는 삶을 몸소 경험한다.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비롯되는 욕심에서 벗어나 자연을 위해 필요한 기다림, 배려, 돌봄을 직접 느끼고, 배운다. 초록색 일러스트로 가득한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내가 정원 속에 들어가 시몽 위로의 소개에 따라 정원을 찬찬히 둘러보듯 차분해진다. "나는 이 세상을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구 위 작은 한구석에서, 삶은 괜찮게 굴러간다."는, 책의 가장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니 나만의 정원을 가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 정원에서는 어떤 자연과 생명을 만날 수 있을까? 시몽 위로처럼 본격적으로, 큰 땅에서 정원을 만들지 않더라도 작은 식물을 하나 집으로 들여보고, 그 식물의 필요에 귀를 기울이며 기다리고, 돌보면서 우리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정원을 만들 수 있다. 작은 정원을 가꾸는 것이 세상을 구하진 못하더라도 작게나마 생명과 다양성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내 삶을 괜찮게 만들어줄지도 모르겠다. 책 속 아기자기 한 일러스트와 시몽 위로가 소개하는 정원 이야기를 눈으로 즐기면서, 잠시나마 자연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경이로움, 신비함, 생생한 생명력을 느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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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게일 콜드웰 지음, 이윤정 옮김 / 김영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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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우울하고, 힘들고, 지쳐서 이 인생에서 도피하고 싶어질 때 책, 특히 에세이를 찾게 된다. 내 삶은 이런데 다들 어떻게 살았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지? 어떻게 살아가야하지? 라는 물음들을 가지고 에세이를 펴면 위로를 받고, 어찌됐든 계속 살아봐야겠다는 의지와 용기를 가지게 된다. 이 책이 딱 그러한 에세이다.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은 삶이 한 순간에 뒤바꼈으나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설명서가 없다는 의미의 제목에 눈길이 갔고, <명랑한 은둔자>, <욕구들> 등을 쓴 캐럴라인 냅의 친구인 게일 콜드웰의 책이라는 것을 알고 나선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유아기에 소아마비에 걸린 뒤 다리를 절면서 평생을 고통과 통증 속에서 살아온 게일 콜드웰이 살아온 이야기다. 캐럴라인 냅을 비롯해 게일 콜드웰이 사랑했고, 자신을 사랑해주던 사람들의 죽음 이후 그가 느꼈던 상실, 이를 통한 얻은 삶의 통찰, 고관절 대치환술 후 걷는 연습을 하며 느낀 삶의 지혜를 고백하는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다. 소아마비로 인한 고통, 통증, 자유의 제한 등으로 인해 삶을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게일 콜드웰은 반려견, 엄마, 캐럴라인 냅과 같은 친구들의 관계와 사랑에서 힘을 얻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며 자신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수년간 사람들은 소아마비 때문에 너무 화나지 않냐고 묻곤 했다. 처음 들었을 때도 참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고, 아직도 누군가 그렇게 물으면 놀란다. 이러한 반응만으로도 내가 소아마비를 삶의 한 조각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았거나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세월이 단 몇 개월에 불과하니, 말하자면 소아마비가 나의 기준점인 셈이다. 밀고 나가야만 했던 벽이다. 모두에겐 그런 벽이 하나씩 있다." 게일 콜드웰에게 소아마비는 예고 없이 불쑥 들어와 인생에 절망을 드리운 벽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신은, 나는 어떤 벽을 가지고 있을까? 밀고 나가야만 하는 나의 벽은 무엇인지, 게일 콜드웰이 살아온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나빴다가도 좋아지는, 쉽지 않은 삶들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무엇일지도 함께 고민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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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머시기 - 이어령의 말의 힘, 글의 힘, 책의 힘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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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머시기"세상에 단 한 권의 책이 있다면 우리에게 끝없이 속삭이고 끝없이 책을 읽게 만들고 쓰게 하는 큰 힘을 가진 책일 것입니다."라는 문장으로 문을 연다. 책을 읽고 나면 바로 이 책이야말로 우리가 끝없이 책을 읽고, 쓰게 하는 힘을 가진 책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진다. 책에는 언어, , , 책을 중심으로 한 이어령의 강연과 대담이 여러 편 담겨있다. 이어령 선생님의 강연과 대담을 직접 듣고 있는 것처럼, '이어령'이라는 세계에 빠진 듯이 몰입하여 읽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김소월의 <진달래꽃>와 시에 대한 이야기부터 우리말에 숨겨진 재미와 역사 혹은 경험들, 번역, 대학에서의 배움과 언어활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새롭고 재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었던 내용은 20145월 서울대학교 교수학습개발센터 글쓰기교실 초청 강연, <한국말의 힘>이다. 독서를 통해 무언가를 새롭게 느끼거나 깨닫고, 다짐하는 순간을 갖기 위해 책을 읽는 나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말과 글, 언어가 이토록 재미있고, 창조적이며 다채로울 수 있으며 이를 느끼기 위해 책을 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책이 전하는 이야기나 사건에 재미를 느꼈다면 이 책은 책과 글에 담긴 말과 언어의 힘, 재미를 맛보게 해 주었달까.

 

무척 만족스러울 때 "죽여준다"라는 감탄사를 쓰고, "앞으로는 죽어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생사결단이 아니라 '사생결단'이라는 말을 쓰는 습관에서 알 수 있듯 한국인은 '죽음'을 이용해 무언가를 강조하거나 극상의 긍정적임을 표현한다. '죽다'와 반대되는 대립항인 '살다''먹다'라는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난다. 또한 '사람''살다'에 암이 붙은 형태로 '사람'에는 '살자'라는 의미와 '생명'이라는 말이 들어있다. ''이라는 말에는 ''자와 ''도 있다. 이것만 봐도 한국말이 가진 재미, 창조성, 문화를 느낄 수 있다. , 살다, 사람, 살림 ··· 쉽게 보고, 듣고, 읽는 말과 언어를 곱씹어보게 된다. '사람'이라는 말에서 생생한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어령 선생이 전하는 말과 글과 책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언어를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곱씹어 생각하다보면 하나의 말과 언어가 굉장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 같아 벅차기도 하다.

 

이어령 선생은 언어를 소비하거나 뒤쫓아가는 사람이 되지 말고, 언어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말의 씨앗을 어떻게 가꿀 것인지 고민하고, 나의 언어를 가지고 언어를 만드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인생과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임을 강조한다. 나의 언어는 무엇일까, 나의 언어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간다는 것일까, 말의 씨앗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 고민하게 된다. 그러면서 문득 장기하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떠올랐다. 한글이 가진 특유의 운율과 특징을 기가 막히게 활용해 '장기하'라는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듯한 장기하의 노래, 구원같기도 하고 사랑같기도 한 '추앙'이라는 말로 현대인이 가질 법한 소외, 결핍, 공허함 등에 대한 극복을 나타낸 <나의 해방일지>에서 잘 가꿔진 말의 씨앗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기 전과 비교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등 말과 글을 경험하는 내 모습이 분명하게 바뀔 것 같다. 하나의 글, 하나의 문장, 하나의 말을 쓰더라도 혹은 한 권의 책, 한 장의 책을 읽더라도 말과 언어를 곱씹어보고,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 우리말이 가진 힘과 정서에 여운이 가득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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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주성철 지음 / 김영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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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철 기자의 홍콩영화 성지 순례기>라는 부제목을 단 책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약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 두께에 놀랐다. 저자가 홍콩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 얼마나 사랑하는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장국영, 양조위, 주성치, 장만옥 등 홍콩영화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이 영화에서 만나고 헤어지던 홍콩을 방문한 성지 순례기로 가득한 책에는 홍콩과 홍콩영화를 향한 주성철 영화평론가의 애정이 듬뿍 묻어있다. 애정이 묻어난 책 한 장 한 장을 넘기다보니 홍콩에 가본 적 없고, 홍콩영화에도 큰 흥미를 느끼지 않던 나였지만 문득 <중경삼림>에서 모든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던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 가서 주인공들이 느꼈을 감정을 느껴보고 싶어졌다. 홍콩영화에 문외한이지만 홍콩영화를 애정하는 저자가 들려주는 홍콩영화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책을 읽다보니 저자와 함께 홍콩을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나서 꽤나 즐거웠다. 오래전부터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나이와 자신의 나이가 같아지는 2022을 기다렸다는 말, 여러 홍콩 영화에 나왔던 공간을 직접 지도로 나타낸 'MTR 홍콩 영화 지도', 지역별로 홍콩 영화 속 인물들이 걷고, 보고, 먹던 공간들을 직접 방문한 여행기를 보면 저자가 진정한 홍콩 영화 덕후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엄청난 애정과 사랑, 이것에서 비롯된 열정이 느껴진다.

 

<아비장전>, <중경삼림>, <, > 등 홍콩 영화에서 주성치, 장국영, 양가위, 유덕화 등의 인물들이 있던 공간을 방문하며 저자는 그들이 느꼈을 감정, 가지고 있었을 고민이나 생각을 상상해보고 이것에 동참한다. 양가위가 사랑한 골드핀치 레스토랑, 장국영이 묵었던 마지막 객실인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장국영, 유덕화, 장만옥이 만나고 헤어지던 캐슬 로드, 영화 속 젊은이들이 다니던 홍콩대학 등의 공간에 직접 가보고, 영화 속 장면이나 대사를 되뇌며 홍콩과 홍콩영화를 온몸으로 느낀다. 스크린으로 접하던 영화 속 홍콩과 직접 방문하여 온몸으로 느낀 홍콩은 저자에게 더욱 풍부한 감정과 사유를 선물한다.

 

이 책에 드러난 것으로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상상해본다면 영화와 홍콩을 무척 애정한다는 것, 이것 하나는 아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영화를 사랑하고, 재미있어 하고, 영화와 홍콩에 열광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느껴지는 책이다. 홍콩과 홍콩영화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오히려 잘 모르기 때문에 앞으로 홍콩영화를 보거나 홍콩을 여행하다보면 저자가 열광하던 장국영, 장만옥, 양조위가 내 옆에서 생생하게 숨 쉬고, 손짓하고, 걸어다닐 것 같다. 영화, 홍콩영화 , 홍콩, 장국영 등.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고 동경하는 마음, 그래서 열광하게 되는 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책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홍콩영화를 너무나 사랑한 저자가 홍콩영화 성지 순례기를 썼듯 내가 무언가에 대한 성지 순례기를 쓴다면 뭘 쓰게 될까? 영화 성지 순례기를 쓴다면 나는 어디를 가고 싶은가? 일단 지금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갔던 레코드 가게, 서로에 대한 마음을 고백한 카페에 가고 싶다. 이들이 밤새 걸었던 비엔나의 곳곳을 밤새 걸어보고도 싶다. 애정하고, 열광하는 순수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지 느끼고, 나에게 그러한 마음이 있는지 확인하게 해 준 고마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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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협정과 파트타임 노동 - 일본 사회정책학회 학술상 수상작
김영 지음 /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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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접했을 때 이 책이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회 중 하나인 사회정책학회에서 외국인에게 수여한 첫 학술상이라는 것과 일본 노동시장 행위자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경험을 오랜 기간 동안 듣고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분석한 연구내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파트타임 노동시장과 이것에 영향을 미친 사회 제도 및 규범, 젠더 시스템에 대한 분석이 주된 연구내용이지만 우리나라의 노동시장과 젠더 이데올로기에 주는 시사점이 굉장히 크다.

 

파트타임 노동시장의 직무와 처우의 불균형이 안정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것은 행위자들의 다양한 행위전략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29) 어떤 현상이나 구조를 연구할 때 그것에 대한분석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을 경험하고, 그것과 맞닿아있는 사람들이 직접 하는이야기를 듣고, 분석하는 것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파트타임 노동시장의 행위자 전략과 상호 작용을 <주부 제도>, <주부협정>, <비공식 권력>으로 나누어 행위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분석한 이 연구는 연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감을 줄 것 같다.

 

<주부 제도>남성 생계부양자형 젠더 시스템 하에서 사적 가족 내의 역할과 지위여야 할 주부라는 역할과 지위를 사회적 지위로 만드는 제도의 다발이다.(31) 일본의 세금 제도, 사회보험 제도, 내부노동시장의 임금체계가 이러한 주부 제도를 구성한다. <주부협정>기혼여성의 일차적 책임은 가족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책임을 완수할 수 있도록 배려하면 고숙련 노동자에게 낮은 임금을 지불해도 괜찮다/합리적이다/어쩔 수 없다는 사고에 기초한 행위전략을 의미한다. 주부 제도와 주부협정은 파트타임 노동자 개인 주체들의 일상적인 대응 전략, 즉 비공식 권력을 형성하고 지속시킨다.

 

기혼 파트타임 노동자들은 남성 생계부양자형 젠더 시스템과 그에 따라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기혼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에 적응하는가하면 반대로 저항하고 권력과 규범을 무시하거나 비공식 규범을 발달시킨다. ‘파트타임 노동자혹은 주부라는 역할로 다양한 개인들을 획일적으로 집단화하지 않고, 이들이 하는 저항 행위에 주목하고 이것이 기존 규범에 어떠한 균열을 가져오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더 시스템을 비롯한 특정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시스템과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것을 전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틈은 무엇일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에서 일본 파트타임 노동시장이나 노동시장 구조를 분석한 내용보다 실제 파트타임 노동자들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들이 훨씬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주부 제도>에 대한 내용을 읽으며 남성 생계부양자를 기초로 한 각종 사회제도와 노동시장 구조와 권력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허무한지를 다시금 느꼈다. 높은 숙련의 노동을 제공할지라도 주부이기에 처우와 임금이 낮아지고, 이것에 체념하거나 마땅한 것이라 합리화하는 현실이 어이없고 답답하다. 남성 생계부양자형 젠더 관계와 사회 제도는 비단 일본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또한 여전히 남성은 생계부양자이며 여성은 생계부양자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젠더 관계와 각종 사회제도에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여성이 가족돌봄노동을 전담하는 것을 전제로 여성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것이 아니라, 젠더관계 자체를 바꾸어 성별분업을 타파하고 남성을 가족 안으로 들어오게 해, 여성과 남성이 가족도 사회도 함께 돌보는 것, 남성이든 여성이든 혼자 살더라도 아이를 기르면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일본재생의 길이며 진정한 노동방식 개혁이 될 것이다. 남성도 여성도 일과 가족을 양립하고, 지역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야말로 일본 사회에 미래와 희망을 돌이키는 길이 될 것이다.” 여전히 저출산문제를 논의할 때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양육에 대한 복지, 가정과 일에 대한 양립 등이 논의된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지만 결국 양육을 비롯한 가족 돌봄은 여성의 역할이며 여성에게 주어지는 이중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각종 복지와 제도가 움직여야한다는 수준에 불가하다. 위에 인용한 저자의 말처럼 각종 법, 제도, 규범에 스며들어 있는 젠더관계와 성별분업 이데올로기 자체를 타파하여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가족 돌봄과 일을 양립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노동문제, 성차별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혹은 연구를 하고 있거나 연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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