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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은의 가게
이서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평점 :
단 한 번이라도 마음 편한 직장을 가져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37살 여성 마은은 혼자 작은 카페를 차린다. 밤이 되어 가게 앞에 놓아둔 나무 간판을 안으로 들이고, 홀 전등을 끄고 텐트를 치면 마은의 가게는 마은의 집이 된다. 주위에서 가게에 비상벨을 꼭 달라는 말을 들으며 장사를 시작한 마은은 새벽마다 카페 안을 들여다보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난 일을 시작으로 나날이 더해지는 긴장감과 두려움, 자괴감을 안고 하루하루 카페 문을 열고 닫는다.
사는 게 원래 이런 건가. 나는 내 영역에 가만히 있고 싶은데 그런 나를 염탐하고 침범하고 무시하고. 그런 사람들한테 화가 나서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다가도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밤새 걱정하고. (···) 그게 여자 사장이 겪게 되는 소소한 문제일까. 억지로 소소한 문제로 치부하고 나는 좀 더 발전적인 문제에 골몰해야 하는 걸까. (p. 192)
마은의 엄마이자 울산에서 작은 반찬 가게를 하고 있는 지화 씨, 택시 기사로 일하고 부당한 일에 불같이 화를 내는 성격을 가진 마은의 이모 경화 씨, 마은의 가게 단골이자 여자 팀장 선례가 없는 회사 재경팀에서 만년 경리로 일하며 승진하고 싶어 하는 보영 씨, 마은이 같은 고시원에서 살면서 친해지게 된 정미 씨, 마은의 가게 근처에서 혼자 꽃집을 운영하고 있는 채영 씨와 마은과 같이 혼자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솔이 씨까지,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나 하나 먹고 살기에도 고단한 현실에서 이 여성들은 서로의 불안정한 상황과 불안한 마음을 나누지만 서로에게 함부로 조언을 하거나 상대가 겪은 일들을 캐묻지 않는다. 그저 상대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온전히 받아들이고, 조심히 서로의 내일을 지키려는 마음을 건넨다. 그렇게 주고받은 마음들은 서로에게 작은 변화를 일군다. 그리하여 이들의 모습은 연대가 sns에서나 볼 수 있는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서로 불안을 나누고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돌보는 존재가 곁에 있다는 걸 감각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나는 여성 자영업자들의 내밀한 세계를 처음으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은밀히 느끼던 두려움이 가시화되었을 때 도리어 안도감이 드는 건 왜일까. 우리는 한 송이 꽃 안에 솟아난 세 개의 암술처럼 머리를 맞대고서 도란도란 얘기했다. 결코 도란도란하지 않은 이야기를. 소름이 끼쳤던 순간과 소스라치게 놀랐던 일들에 대해. (p. 131)
“스스로 한계를 정하지만 마요. 당연히 이런 일을 당할 것이다, 그런 한계요.”
“여자라서.”
“맞아요. 여자라서 당할 것이다, 그런 마음이요.”
“불필요한 마음일까요?”
“선험적으로 품고 살아가는 건 하지 마요. 경험하지 않았는데 이미 경험한 것처럼 살지는 말라고요.” (p. 220)
여자가 장사하려면 사근사근하게 애교도 부려야한다는 말을 조언인 양 뱉고 지나가는 동네 홍반장 아저씨, 수시로 가게 앞에서 담배 피거나 주차하는 등 장사에 방해되는 일들로 골머리를 앓는 마은에게 남자 친구나 오빠, 남자들이 와서 따끔하게 말해야 다음부터 저러지 않을 거라는 말들, 장사하며 수시로 불쾌하고 폭력적인 일을 겪어도 계속 장사하기 위해 빨리 털어버리고 지나가려는 여성 자영업자들.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내가 마주쳤던 여성 주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도 마은과 같은 고민을 하며 가게 문을 열고 닫았을까, 어떤 마음으로 장사를 해오는 걸까. 혼자 장사하는 여성들에게 그들이 ‘여성’이라 겪는 위험하고 불안하고 불합리한 일들이 너무나도 많고 비일비재하다는 사실, 이 슬프고 화나는 사실들이 이 책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더 많이 말해지면 좋겠다.
언니는 스콘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끌어모으며 말했다.
“우리 꼭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 같지 않니?”
“무슨 영화?”
“그런 영화 없나? 여자들이 힘든 일을 겪고 난 다음 날 아침에 정갈하게 잘 차린 아침밥을 먹는 영화.” (p. 124)
그리고 마은의 가게가 저마다의 불안을 가진 여자들이 “힘든 일을 겪고 난 다음 날” 정성스레 내린 커피를 마시고 디저트를 먹는 공간으로 오래오래 문을 열길.
“늙는 게 나쁜 건가?”
“그건 아니지. 행복하지 않아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우리는 대화를 멈추었다. 행복하지 않아도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은 슬픈 일일까 기특한 일일까. (p. 119)
침범하지 않아야 하는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오로지 하나다. 그의 영역이라는 것.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몸이라는 것. (p.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