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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풍경 - 유근택, 그림을 말하다
유근택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처음엔 산이 산인 줄 몰랐습니다. 단지 준에 의한 구성과 여백을 보았을 따름이었습니다. 두번째 본 것은 실재하는 대상을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세번째는 내가 바로 그 산을 '여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산과 나무의 모양새가 아니라 나의 감정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에너지의 산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이 빛에 의해 움직이는 점과 꿈틀거리는 선의 구조적 공간 속으로 산길처럼 '여행'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로소 그것이 하나의 리듬처럼 산길로 화면 속으로 '여행'하려 합니다.
"오십 세에 꽤 괜찮다 싶은 그림을 몇 점 그렸으나 칠십 세 이전에 그린 것은 모두 가치가 없다. (중략) 백십 세가 되어서야 내가 그리는 모든 선과 점들에 삶이 스며들 때 나의 마지막 목표는 완성될 것이다."
"나는 그린다 - 고로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 - 고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사라진다 - 고로 아름답다"
‘먹’이라는 것.
그것은 아무런 사상도 정신도 알지 못한다.
먹은 다만 하나의 물질이다.
다루는 사람에 의해 그 빛이 다르게 변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힘의 방향을 찾는 일이다.
… ‘응집’의 형태로 힘의 형태와 공간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림은 하나의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점을 확보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선을 확보하는 일일 수도 있다.
… 내부에서 생성된 ‘리얼리즘’의 바탕에
서야 할 것이다.
‘형식’이란 바로 ‘나’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나’와 ‘자연’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삶의 전통과 연결된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습성화된 그림을 싫어하고 동시에 두려워한다.
화가가 담는 자연은 항상 진지한 숨소리처럼
끝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 위에서 소멸하고 생성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나를 확인하고 싶다.
지난날 시골집의 장독대와
뒷산 대나무 숲과의 관계항으로부터,
인공을 마치 '자연의 구조'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환원의 구조'를
일상과 삶에서 극대화시켜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있다.
종이와 먹은 그 자연주의적 '순응'과
'환원의 구조'를
지극히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의 관심은 내가 체험하는 '사물'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순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시간적인 '사건'과 현상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을 고증하고 기록화된
혹은 문자화된 '시간'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사물 -> 사물과의 싸움
손 -> 눈과 감정과의 싸움
... 예술 -> 나와 사물과의 싸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밟는 일이다.
자신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과정이다.
나는 나의 작업이 가장 인간적인 질서로 남겨지길 바란다.
그것이 드러내는 형식이 어떤 모습이든지 관계없이,
그것이 '나'로부터 파생된 감동과 호흡, 시간 위에 발생하는 사건에 주목한다.
내가 체험한 정서를 고스란히 화면에 끌어들이는 작업,
즉 대상으로부터 다가오는 힘과 정서에 모든 초점을 기울인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모필소묘'는 대상을 읽어나가는
혹은 대상을 나의 구조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
사물은 함부로 자신의 구조를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오감을 열고, 가장 밑으로 침잠해 들어갔을 때만이 구조와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만나는 지점이 내 작업의 시작이 된다.
나의 '일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의 '일상'이란 우리에게 발생하는 표피적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 숨 쉬는,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다.
... 우리는
그 적막함 가운데
잠시 멈춰 서 있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