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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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에라자드가 풀어 놓은 이야기는 기대로 가득한 고치처럼 술탄을 감싸고, 결국 그 안에서 그는 조금은 덜 잔혹한 사람이 되어 나온다. ... 그 안에는 욕망에 대한, 속임수와 마법에 대한, 변신과 시험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살구 더미는 매우 풍성해 보이리라 기대했지만, 사실은 늘 불안을 던져 주었다. 그 자리를 지날 때마다 썩어버린 것들을 적게는 열 개에서 많게는 20~30개까지 골라내야 했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존경의 마음 대신 신중한 눈길이 필요했다. 그 살구 더미는 이제는 더이상 어머니가 살지 않는 그 집에 있던 어머니의 나무에서, 새로운 소란이 한바탕 시작되려던 여름에 따온 것이었다.


살구가 오기 두 해 전 여름, 어머니가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길을 잃고, 본인의 집 안에서 갇히고, 여러 차례 응급 상황에 빠져 내게 구해 달라거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전화하는 일들이 생겼다.



사람들은 알츠하이머 병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왕성한 정신으로 지식을 쌓아 가는 반면, 인생의 반대쪽 끝에 있는 이 단계에서는 그 지식들이 해체된다. 얻는 것과 잃는 것인 만큼, 두 단계는 다르다. 나는 어머니가 뜯어지는 책 같다고 생각했다. 책장이 날아가고, 문단이 뭉개지고, 단어가 흘러내려 흩어지고, 종이는 순수한 흰색으로 되돌아간다. 가까운 기억이 먼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은 더해지지는 않는 뒤에서부터 지워지는 책. 어머니의 말에서 단어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텅 빈 자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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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와 함께 걷다 - 평화의 눈길로 돌아본 한국 현대사
한홍구 지음 / 검둥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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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


광복회 등 독립운동 단체가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전쟁과여성 인권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을 격이 맞지 않는다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순국선열을 기리는 서대문 독립공원 내에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들의 수난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건립되는 것은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닐까? 저렇게 고통 받고 있는 동포들을 해방시킨 것보다 더 절절한 독립운동의 이유가 있었을까?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아픔이 아니라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가부장적이고 몰인권적인 태도야말로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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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데미안 클래식 보물창고 15
헤르만 헤세 지음, 이옥용 옮김 / 보물창고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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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속에서 왈칵 치솟는 그 어떤 것,

나는 오로지 그것을 따라 살려고 애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왜 그토록 어려웠던 것일까?

 

 

세계의 현상들은 딱 한 번만 교차할 뿐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삶을 살면서 자연의 의지를 실현하는 한 경이롭고 주목을 받아 마땅하다.

 

내 이야기는 더는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무의미와 혼란, 광기와 꿈의 맛이 난다.

 

인간 개개인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요, 하나의 길로 가려는 시도요, 하나의 오솔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전적으로 완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어떤 이는 막연하게, 또 어떤 이는 명료하게 각자 자신의 능력껏 노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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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풍경 - 유근택, 그림을 말하다
유근택 지음 / 북노마드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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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엔 산이 산인 줄 몰랐습니다. 단지 준에 의한 구성과 여백을 보았을 따름이었습니다. 두번째 본 것은 실재하는 대상을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세번째는 내가 바로 그 산을 '여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산과 나무의 모양새가 아니라 나의 감정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에너지의 산이 가져다주는 아름다움이 빛에 의해 움직이는 점과 꿈틀거리는 선의 구조적 공간 속으로 산길처럼 '여행'하는 일이었습니다. 비로소 그것이 하나의 리듬처럼 산길로 화면 속으로 '여행'하려 합니다.


"오십 세에 꽤 괜찮다 싶은 그림을 몇 점 그렸으나 칠십 세 이전에 그린 것은 모두 가치가 없다. (중략) 백십 세가 되어서야 내가 그리는 모든 선과 점들에 삶이 스며들 때 나의 마지막 목표는 완성될 것이다."


"나는 그린다 - 고로 존재한다.

나는 존재한다 - 고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사라진다 - 고로 아름답다"




‘먹’이라는 것.

그것은 아무런 사상도 정신도 알지 못한다.

먹은 다만 하나의 물질이다.

다루는 사람에 의해 그 빛이 다르게 변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힘의 방향을 찾는 일이다.

… ‘응집’의 형태로 힘의 형태와 공간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림은 하나의 공간을 찾아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는 점을 확보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선을 확보하는 일일 수도 있다.

… 내부에서 생성된 ‘리얼리즘’의 바탕에 

서야 할 것이다.


‘형식’이란 바로 ‘나’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나’와 ‘자연’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삶의 전통과 연결된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습성화된 그림을 싫어하고 동시에 두려워한다.
화가가 담는 자연은 항상 진지한 숨소리처럼
끝없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시간' 위에서 소멸하고 생성하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나를 확인하고 싶다.

지난날 시골집의 장독대와

뒷산 대나무 숲과의 관계항으로부터,

인공을 마치 '자연의 구조'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환원의 구조'를

일상과 삶에서 극대화시켜 드러낼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 있다.

종이와 먹은 그 자연주의적 '순응'과

'환원의 구조'를

지극히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요즘 나의 관심은 내가 체험하는 '사물'에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며 순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시간적인 '사건'과 현상이라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을 고증하고 기록화된

혹은 문자화된 '시간'을 의미하는 건 아닐 것이다.


사물 -> 사물과의 싸움

손 -> 눈과 감정과의 싸움

... 예술 -> 나와 사물과의 싸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이름을 밟는 일이다.

자신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과정이다.


나는 나의 작업이 가장 인간적인 질서로 남겨지길 바란다.

그것이 드러내는 형식이 어떤 모습이든지 관계없이,

그것이 '나'로부터 파생된 감동과 호흡, 시간 위에 발생하는 사건에 주목한다.

내가 체험한 정서를 고스란히 화면에 끌어들이는 작업,

즉 대상으로부터 다가오는 힘과 정서에 모든 초점을 기울인다.

그런 점에서 나에게 '모필소묘'는 대상을 읽어나가는

혹은 대상을 나의 구조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 매우 중요하다.

사물은 함부로 자신의 구조를 드러내지 않는다.

내가 오감을 열고, 가장 밑으로 침잠해 들어갔을 때만이 구조와 만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만나는 지점이 내 작업의 시작이 된다.

나의 '일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때의 '일상'이란 우리에게 발생하는 표피적인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살아 숨 쉬는,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다.



... 우리는

그 적막함 가운데

잠시 멈춰 서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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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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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결정타는 왼손으로 이루어진다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린다



아이들은 건축, 정원일 혹은 가사일, 재단이나 목공일에서 생기는 폐기물에 끌린다. 바로 이 폐기물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작품을 모방하기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아이들은 이로서 자신들의 사물세계, 즉 커다란 세계 안에 있는 작은 세계를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낸다. 



결코 가난과 평화협정을 맺어서는 안 된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가해진 모든 굴욕에 대해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이 더 이상 원한의 내리막길이 아니라 반란의 오르막길을 닦게 되는 그날까지 자기 자신을 단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극도로 두렵고 어두운 운명적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매일, 아니 매시간 신문의 논쟁거리로서 그럴싸한 온갖 원인과 결과를 들어 분석되는 데 그친다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예속하고 있는 저 어두운 힘들을 그 안에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사정이 이런 한 아무런 희망도 없다.



모든 사물은 서로 섞이고 혼탁해지는 부단한 과정 속에서 그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어, 고유한 것 대신에 이중적인 것이 그 안에 자리잡게 된다. 마찬가지로 도시도 그렇다. 마음의 평정과 자신감을 주는 대도시의 힘은 창조적 작업을 하는 사람을 자신의 구역 안에 보호하면서, 그가 눈을 들어 지평선을 바라볼 때조차 원초적 자연의 힘을 느끼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한 대도시에도 도처에 구멍이 뚫리고 그 안으로 시골이 잠입해 들어온다. 대도시의 틈으로 들어오는 것은 자연 풍경이 아니라 자유로운 자연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측면, 경작지, 포장도로, 혹은 전율하는 네온사인의 붉은 불빛 띠에 의해서도 더 이상 가려지지 않는 밤하늘이다. 심지어 번화가에서도 불안감은 도시인을 완전히 불투명하고 아주 섬뜩한 상황으로 몰아간다. 



누군가를 아무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람을 제대로 안다.


카르투지오 패랭이꽃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항상 외롭게 보인다.


선인장 꽃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했으면서 옳다고 우길 때 기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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