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에 대한 추측
이승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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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가, 종교학자, 건축가, 배우가 한 자리에 모여 
전혀 건물로서의 용도를 살리지 않은 '미궁'이라는 건물은
대체 어떤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인지를 추론해 본다.
법률가는 미궁이 통치자의 권위와 두려움을 시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지어진 것으로 보고,
종교학자는 왕권에 신성함과 공포감을 부여하기 위한 건축물이라 보았다.
배우는 미노타우로스가 사실은 소 가면을 쓴 다이달로스였을지도 모른다는
흥미로운 추론을 내세우며, 
어쩌면 미궁은 파시파에와 다이달로스의 불륜 장소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데...
 
작가 자신이 가상의 작가를 만들어 그 작가가 쓴 책을 발견했다, 는 설정으로
사실성을 획득하는 게 놀라웠다.
그래서 이 소설이 픽션인 걸 알면서도 실제 작가가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한 소설처럼 느껴졌다.
또한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마치 내가 진실을 알고자 한 걸음씩 다가가는 탐험자가 된 것 같았다.
작가(서술자)는 가상의 작가가 쓴 책을 그대로 번역해서 옮겨놓지 않고,
독자를 위해 자신이 요약정리해주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것 또한 신선했다.
이왕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할 거면 그리스 희곡체 같은 걸 빌려서
각 인물의 대사를 맛깔나게 써 놓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요약정리라는 방법을 택하다니.
하지만 작가의 능력(?)을 생각해서도, 또 독자가 읽기 쉽도록 하는 점에서도
그런 표현방식이 좋았던 것 같다.
구구절절한 대사보다 대화의 핵심만 딱딱 요약한 것이 읽기 쉬우니까.

표제작인 <미궁에 대한 추측>이외에도 왕권, 종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철학적인 단편 소설들이 실려 있다.
이승우의 문체가 마음에 든다. 읽기 쉽고, 그러나 결코 가볍지는 않다.
많은 지식이 담겨 있지만, 잘난 척하지 않는 겸손한 문체가 맘에 든다.
그는 '왕', '주술사' 등의 권위자들과 그에 복종하는 이들 사이에 작용하는 심리를 파헤치는 데
특히 관심이 있는 듯 보인다. 그가 신학자라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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