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환상문학전집 11
필립 K. 딕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상한 기분을 경험했다.
책을 눈과 머리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책에서 난 그 세 기관의 속도가 명확히  따로 놀고 있는 것을 경험했다.
굳이 등호로 표현하자면, 이런 느낌?

눈이 책의 글자를 따라가는 속도 >> 머리로 내용을 이해하는 속도 >>> 마음으로 글에 공감하는 속도

보통 책을 읽으면, 눈으로 글자를 읽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내용을 파악하고
재밌는지, 또는 슬픈지...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가를 이미 다 결정내 버리는데,
이 책을 보면서는 그렇지 않았다.
눈은 글자를 읽어내려가도, 머리로는 이전 페이지 내용도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상태이다.
특별히 공감이 가거나 감동적이라고 생각한 문장도 없으면서,
이상하게도 페이지는 술술 넘어간다. 신기하다.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책을 난 왜 이렇게 재밌게 읽었을까?



동물
사람들이 거의 살지 못할 정도로 황폐해진 지구가 있다.
거의 모두 다른 별로 이주했지만, 피치못할 사정으로 지구에 남아 살고 있는 인간들도 몇몇 있었으니...
지구에 사는 인간들은 ’진짜’ 동물들을 아주 소중히 여긴다. (가짜 기계 동물이 아니라) 
생명체가 흔치 않은 지구이기에, 사람들은 큰 돈이 생기면 꼭 동물을 사려고 한다.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는 인간보다 뛰어난 지력을 지녔지만, ’공감 능력’ 이 없어서 위험존재로 취급받는다.
공감 능력이 없다면 다른 생명체를 죽이는 데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안드로이드는 ’꿈을 꿀 수 있다’. 그들도 인간과 같이, 더 나은 생활을 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그들이 자신들의 주인인 인간을 죽이고, 폭동을 일으킬 수 있으므로. 

인간
’바운티 헌터’는 인간인 척 위장하고 살아가는 안드로이드를 사냥하는 직업을 칭하는 말이다.
’바운티 헌터’인 인간 릭 데카드는, 안드로이드를 하나씩 죽여나가면서 점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안드로이드가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심지어는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하면서 살아나가도
그저 ’안드로이드’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현실. 릭은 그런 현실에 의문을 품는다.


인간들이 공감 박스를 통해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자신이 인간임을 확인하는 ’마사교’라는 종교가 있다.
공감 박스에 나타나는 마사라는 노인은 돌을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언덕 위를 향한다.
인간들은 마사를 신으로 추앙한다. 
하지만 마사는 평범한 노인이며, 공감박스의 영상은 조작된 것임이 뒤늦게 밝혀지는데...


이 소설에 나타난 사회에서는, 인간 > 동물 > 안드로이드 순으로
생명의 가치가 매겨지는 듯하다.
모든 생명체의 위에 서 있는 건, 안드로이드를 만들고, 동물을 돌보는 - 바로 인간.
하지만 그런 인간들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걸 ’마사’라는 신을 통해서밖에 느낄 수 없다.
희망, 믿음, 공감... 이런 것이 없어서야,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구는 황폐해지고, 인구는 줄어든다.
희망은 사라진 지 오래요, 공감할 인간들도 찾기 힘들다.
결국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건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 것인가?

릭은 글 머릿부분에서는 자신의 전기양과 다른 이의 진짜 동물을 비교하며 절망했었다.
중반에서는 다양한 안드로이드를 만나면서
자신이 인간이 맞는지, 안드로이드는 인간이 아닌지를 헷갈려하기 시작한다.
마지막에 그는 결론을 내린다. 가짜 두꺼비에게도 생명은 있다, 고.
겉으로 보면 똑같은 생물인데, 굳이 본질을 생각하기 시작해봤자 허무해질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난 생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어떤 것도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살아갈 힘을 잃나 보다.
결국, 인간의 본질은 ’허무’라는 것 - 이것을 생각하면
인생의 어떤 노력이나 결실도 쓸모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절망의 다른 이름은 희망이듯이,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내가 아무리 공허하고 허무한, 가짜로만 가득한 장소에 있다고 해도
내가 진짜라고 믿으면 진짜인 것이고,
이 능력을 이용하면 아무리 황폐한 곳도 낙원으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진 ’믿음’이란 능력은 놀라운 것이다.
허무에서 행복을 만들어내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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