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990년대에는 정치, 이념 등의 거대 담론 대신
소비문화, 대중문화, 영상문화가 주는 쾌락과 환상이 국민들의 눈을 현혹시켰다. 
위정자들은 정치, 이념 대립, 노동의 힘겨움과 같은 것들로부터  
국민들의 관심을 멀어지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거기서 태어난 것이 바로 '프로야구'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학생들이 강제로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던 시대를 포함한다.
‘나’는 머릿속에 이념을 세뇌당하며, 자기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도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단지 경쟁과 승리, 최고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나’에게 유일한 꿈과 희망이 되어 주는 것은 프로야구,  
그 중에서도 삼미의 야구팀이었다.


그러나 어린 ‘나’의 꿈과 희망은 삼미의 연달은 패배로 인해 무참히 꺾여 버린다.
알고 보니 ‘프로야구’라는 이름의 대중문화도 현실 못지않은 비참한 세계였다.
프로야구의 세계에서 삼미를 좋아하는 것은 고통이었다.
마치 부르주아가 질 높은 예술을 소비하여 자신의 권력을 뽐내듯,
야구팬들은 강한 팀의 팬이 되는 행위를 통해 우월감을 맛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약한 야구팀인 삼미의 팬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나’에겐 그것이 다행이었다.
인간이 오아시스의 물에 중독된다는 것은 대중문화의 포로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팀에선 야구를 잘 하는 것뿐 아니라, 돈을 많이 버는 것 또한 목적이다.
야구선수가 광고모델 일을 하는 이면에는 야구와 소비문화의 결탁이 숨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야구선수와 여자 탤런트의 결합은 어떻겠는가. 성(性)까지 야구에 연루된 것이다.
대중문화는 소비와 쾌락의 환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일종의 눈속임이다.
국민들의 눈을 끄는, 프로야구를 둘러싼 이슈들은
타인보다 뛰어난 ‘체력’, ‘재력’, ‘미모’가 권력이 되는 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하니 ‘나’는 현실에서도, 대중문화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인간이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박민규는 ‘팬클럽’이라는 이름의 ‘하위문화’에서 그 답을 찾았다.
인간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 노력을 한다면 그것은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노력은 삶을 긍정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팬클럽의 마음과도 같다.
인간은 슈퍼스타처럼 살기보다, 팬클럽처럼 살아야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슈퍼스타는 다른 선수와 경쟁하랴, CF를 찍어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들으랴,
오르락내리락하는 연봉을 보며 가슴 졸이랴, 언론의 장난감이 되어 가슴아파하랴…
아무튼 마음 편할 날이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팬클럽은 어떤가.  
팬클럽이 하는 일은 그 대상을 ‘좋아하기’라든지 ‘흉내 내기’, ‘연구하기’ 밖에 없다.
그 세계는 돈도 권력도 성(性)도 연루되지 않는 순수한 애정의 세계다.
프로 선수들이 야구를 통해 뭘 얻으려 하는 것과는 달리, 팬클럽은 뭔가를 얻으려는 욕심이 없다.
오로지 ‘사랑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팬클럽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기업체의 슈퍼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그 때보다,
팬클럽으로서 야구를 할 때 더욱 행복을 느낀다.
인간이 자발적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는 때는 뭔가를 사랑하고 있을 때이다.


‘나’는 자신보다 잘난 이들에게 허리를 굽혀야 했던 아버지를 흉내 내지 않는다.
그는 어설픈 야구팀 삼미 슈퍼스타즈를 어설픈 방법으로 흉내 내는 키치의 정신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훌륭한 것을 흉내 낸 작품은
원작보다 싸구려처럼 보이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반면,
저급한 것을 흉내 낸 작품은 원작보다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원작이 아무리 저급해도 팬클럽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빛나 보이니  
win-win이라 해야 좋겠다.
삼류가 삼류를 모방함으로써 다 같이 승리한다는 것.
그것은 일류만을 추구하는 시대를 향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제시하는 새로운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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