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 불청객 카르페디엠 26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김재희 옮김 / 양철북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만약 자기 집에 교환학생으로 온 애가 가족들과 융화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행동을 한다면 참아내기 힘들 것이다. 예의도 없고 가족들의 생활에 불편을 준다면 당장 자기네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게 보통 사람들의 행동일 것이다. 그런데도 이 모든 걸 참아내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작위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니 도입부에서 구구절절 에발트 미터마가 자기 엄마와 아빠 그리고 누나에 대해 늘어놓을 때 작품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의 장치들이었다. 에발트의 엄마와 아빠가 재피터 같은 괴물을 껴안아주고 품어줄 수 있는 이유들을 미리 암시하고 있는 장치였다.

자식의 성적에 연연하고 성적을 올리기 위해 극성인 엄마, 자식의 교육 문제 때문에 자신의 생활이 간섭 받는 게 싫어 부인의 교육 방식에 무조건 적으로 찬성을 보내는 아빠. 이런 부모를 서운하게 생각하는 자녀들. 평화로워 보이는 가정 내에 적지 않는 갈등들이 내재해 있다. 그들은 서로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옭아매면서 서운한 감정들을 느끼지만 아무도 그걸 드러내놓고 표출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적나라하게 재피터가 표출을 한다.

장치는 아주 잘 돼 있다. 교환학생으로 온 재피터는 영국인이다. 평온한 오스트리아 가정에 와서 분란을 일으키는데 여기서 문화적 차이를 통해 인간들 내에 형성돼 있는 벽을 자연스럽게 부각시켜준다. 이해할 수 없는 재피터의 행동을 재피터 개인의 잘못으로 지적하지 않고 영국인이기 때문이라는 다소 모호한 형태로 약화시키면서 결국은 휴머니티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도록 디딤돌을 놓아간다.

이 작품에서 에발트의 부모는 훌륭한 부모이다.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는 성인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아로 지적할 수 있는 재피터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 부딪치면서 돌파구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부모들 중에 과연 에발트의 부모처럼 부모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솔직히 나도 자녀를 키운 부모지만 에발트의 부모처럼 자격이 충분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우선 나만 같아도 재피터 같은 아이를 본다면 회피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적인 인간을 회피하지 않고 사랑으로 치유해 주는 에발트의 엄마와 아빠를 보면서 문화의 성숙과 부모의 자격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교육에 대해서도. 문제적인 인간과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함께 살아야 한다.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은 지구로 한정 돼 있기 때문에 문제인물도 우리와 함께 다른 행성이 아닌 지구에서 부대끼며 살아가야한다.

그렇다면 재피터처럼 문제아인 아이들을 껴안아주고 마음속의 벽을 허물어 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되는 것이다. 에발트의 부모님을 그걸 알고 있기에 재피터에게 자신의 자식들처럼 진정한 사랑을 쏟아준다. 작가는 아마도 이 작품을 통해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우리가 재피터 같은 인물을 따돌리고, 손가락질 하고 문제아라고 낙인찍기는 쉽지만 에발트의 부모님처럼 치유해 주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 작품에서 겉 스토리 라인은 재피터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으로 나오지만 속 스토리라인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재피터의 행동을 통해 그를 껴안아 주면서 에발트네 가족 사이에 쌓여있는 갈등이 해결 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이해하게 되고, 자식들은 부모의 사랑을 체감하면서 이 동화는 각기 인물들 사이에 그물망처럼 형성됐던 갈등이 해결되면서 끝이 난다.

뇌스틀링거의 작품은 단순하게 쓰이지 않고 다층의 의미망을 형성해 놓았다. 때문에 수많은 의미망을 찾아내어 연결했을 때 감동의 파고는 극에 달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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