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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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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가 발발한 직후 새로운 취미 활동이 유행했다. 이른바 ’차박’으로, SUV 등의 차량을 이용해 잠도 자고 캠핑을 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 간의 접촉을 최소화해야 하는 환경에서 대안 여가 활동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박 활동이 여가가 아닌 삶 그 자체가 된다면 어떠할까? 이 ‘노마드랜드’는 바로 차에서 먹고 살며, 파트타임이나 비정규직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취재한 책이다. 저자 제시카 브루더는 본인이 직접 노마드가 되어 약 3년간 그들과 부대끼며 생활하고, 또 취재하여 이 책을 완성하였다.

그렇다면 이 노마드 족들은 본인들이 좋아서, 혹은 원해서 차를 끌고 길에 나선 것일까? 그렇지 않다.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노마드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재산과 연금 등을 잃고, 그 뒤로 회복하지 못하여 비자발적으로 길로 쫓겨난 사람들이다. 이 노마드들은 도로로 쫓겨나기 전까지 누구보다도 건실했던 사람들이었다. 성실히 직장생활을 했고 저축도 꾸준히 하였으며, 신용등급도 우량했다. 단지 집값은 떨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직장에서 해고됐고, 저축은 날라갔으며, 최후의 보루였던 연금마저 사라졌다. 당연히 집 또한 담보 가치 하락으로 경매에 넘어갔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것이다. 그들에게 도로로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과거에 선례가 있었다.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한 후, 1930년 대 ‘하우스 트레일러’가 유행했다. 대공황 직후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 ‘후버빌’이라는 판자촌이 미국 곳곳에 생겼다. 그 와중에 자유를 좇는 이들은 “어디나 가고, 어디서나 멈추고, 세금과 집세에서 탈출한다”라는 구호 하에 이 하우스 트레일러에 열광했다. 노마드족들의 직속 선배인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하우스 트레일러족들은 경기가 회복되고 ‘모빌홈’이 보급되면서 기존의 주택으로 복귀했지만, 노마드 족들은 기존 주택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요원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경제가 “고용없는 성장”의 형태를 띄기 때문이다. 즉 노동시장에 탈락한 뒤 다시 복귀하는 것이 극히 어려우며, 이에 따라 안정된 소득이 뒷받침되지 않아 기존 주택 질서에 편입될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대부분의 노마드족들은 은퇴 연령을 넘긴 고령층이다.

이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은 주로 계절성 일자리이다. 예를 들어 캠핑 관리자 일을 한다든가, 성수기 직전에 ‘캠퍼포스’라고 불리는 아마존 물류센터에서 물건을 분류하고 옮기는 일 등을 한다. 계약 기간이 끝나면 쿨하게 헤어진다. 순수 육체노동으로서 고령의 노마드들이 하기에는 벅찬 일이지만, 대부분의 노마드들은 그러한 일자리라도 주어진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일을 하다가 몸이 아프거나 다쳐도, 타이레놀 등의 진통제를 먹으면서 버틴다. 그런 일자리에서도 밀려나면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존이 이렇게 비효율적인 노마드들을 고용하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고령층의 노동윤리를 들먹이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해서이다. 개인적으로 의도야 어찌됐든 기존 노동 시장에 편입될 수 없는 노마드들에게 이러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작년 코로나 사태 직후, 일자리를 잃거나 사업장을 접은 이들이 단기 일자리로 쿠팡 물류 센터에서 일을 하거나, 음식 배달일을 하면서 무사히 생계를 이어 나갔다. 한계에 몰린 이들에게 정규직이니 비정규직이니, 최저임금이니, 노동윤리니 다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당장 돈을 벌고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처럼 일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바야흐로 각자 도생의 시대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로 풀린 돈은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을 폭등시켰다. 그러던 와중, 작년 코로나 직후 다시 한번 엄청난 돈을 풀면서 주식과 부동산의 가격은 하늘 모르고 폭등 중이다. 이러한 자산을 가진 이들은 인류 역사상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삶을 맛보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자산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으며, 빈부격차 또한 굉장히 심각한 수준이다. 최근 ‘벼락거지’라는 말이 유행한다. 실제로 거지는 아니지만 자산이 폭등하는 와중에, 그러한 자산을 가지지 못한 이들 입장에서 갑작스럽게 격차가 커졌음을 비관적으로 자조하는 말이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어느 유럽 국가에서는 집에서 쫓겨난 이들이 강가에 배를 정박해 놓고 그 배에서 산다고 한다. 미국 또한 홈리스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또한 주거 비용이 급증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나라도 노마드족들이 생겨나지 않을까? 어느 순간 임계점에 다다라 경제 위기 같은 것이 닥치면, 오늘날 여가를 위한 ‘차박족’들이 추후에 생계를 위한 ‘노마드족’이 될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만만치 않다. 각자 대비해야 한다. 과거 미국의 노마드족들도 본인이 노마드족이 될 것이라고 생각 못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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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더 퍼거토리 1부 18권 (완결) 더 퍼거토리 1부 18
김경록 지음 / 뿔미디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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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역사 소설을 읽은 것은 'The man in the high castle'에 이어서 이번 작품이 두 번째이다. The man in the high castle이 나치가 연합군에 승전한 대체 역사물이라면, 이 작품은 고려 왕족 "왕현"이 밑바닥부터 시작하여 원나라를 넘어 천하를 제패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단순 대체 역사는 아니고 웜홀, 초고도화 된 AI 등 판타지적 배경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내용만 얼핏 듣고 나면 황당무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눈에서 뗄 수 없을 만큼 몰입도가 강하다. 마치 실제 역사 한 가운데 있는 것처럼 묘사가 생생하고, 작가의 소위 '글빨'도 훌륭하기 때문이다. 대체 역사물이기 때문에 등장 인물도 역사상 실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작가가 캐릭터마다 개성을 부여하여 다들 입체감이 넘친다. 개인적으로는 방국진이라는 캐릭터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실제 등장 인물들과 실제 발생했던 이벤트들을 개연성있게 재구성한 점은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로서, 작가의 사전 조사와 역사 공부가 탄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장편 소설을 읽다보면 군데 군데 지루해지는 지점도 있는데, 이 작품은 개인적으로 완독할 때까지 지루할 틈이 거의 없었다.


또한 에피소드 막바지마다 사진이나 지도 등의 참고 자료를 첨부하여 글만으로는 이해에 한계가 있는 점을 보완하였다. 이는 역사 공부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세계사 매니아라서 그런지 더욱 재미있었다. 게임 문명 시리즈의 소설화라고 할까나. 중고등학생의 역사 교육용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칭찬만 늘어놨으니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내용상 주인공의 행적이 특별한 위기도 없이 지나치게 탄탄대로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 점은 주인공의 배경상(스포일러인지 애매하지만 일단은 비공개) 어쩔 수 없는 점이라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갔는데, 에피소드 댓글(네이버s)에 다른 독자들은 이 부분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읽었는데, 간만에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었다. 작가 김경록의 다른 작품들도 궁금하고, 더 퍼거토리 2부도 읽어볼 의향이 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후회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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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무너졌는가
정병석 지음 / 시공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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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렸을 적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유독 역사책을 많이 읽었고, 고등학생 시절 양이 많아서 남들이 꺼리는 3역사(국사, 근현대사, 세계사)의 조합으로 수능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암울한 역사에 점점 흥미를 잃어버렸다. 세계사를 공부하면서 메이지 유신으로 환골탈태한 일본과 비교를 하면서(나 말고도 많을 것이다), “왜 우리는 일본처럼 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했는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다양한 독서와 일본사 공부를 통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닌, 그 기반이 오랜 기간 착실히 쌓이다가 페리 제독의 방문이라는 기폭제를 만나 폭발한 것임을 알기에 더 이상 조선과 단순 비교는 하지 않는다. 다만 일본이 내공을 착실히 쌓는 동안 조선은 정체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이 책은 경제학의 제도학파 관점에서 그것을 분석한다. 그동안 내가 막연하게 추측하고 인지하던 것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다.

이 책은 조선 사회를 다방면으로 ‘제도‘라는 관점에서 분석한다. 제도는 공식적 제도와 비공식적 제도로 분류되는데, 저자는 조선이 관습, 문화 등으로 대표되는 비공식적 제도가 지배하는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공식적인 제도보다도 훨씬 더 조선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사실 조선이 처음부터 극도로 교조화된 성리학에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 전기의 지배층이었던 훈구파 대신들은 부국강병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고, 나름대로 국력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 세력이 정계에 진출하고 정권을 잡으면서 조선은 극도로 보수화된 성리학 중심의 사회가 된다. 이들은 도덕정치, 왕도정치를 표방하며 법치나 부국강병의 도모를 패도의 정치이며, 덕이 부족한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에 처절하게 망가지는 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사림 세력은 지방의 향촌 사회를 지배하였으며, 원래 양반들만 따르면 되었던 자치규약인 향약을 양민에게도 지킬 것을 강요했다. 양민이 지켜야 하던 향약은 철저히 계급주의적이었으며, 양반계층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들로 점철되었다. 가령 우리가 농촌 공동체의 미덕으로 알고있는 ‘두레’도 양반들이 상민의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한 규약이었다.

이쯤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사실이 있는데, 조선은 총론만 강하고 각론이 약한 사회였다. 즉 ‘무엇을‘은 있는데 ‘어떻게‘가 없었다. 왕조 시작부터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지배층이 성리학이라는 단일 사상에 매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책의 디테일이나 실무가 매우 부실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부국강병의 가치를 포기했기 때문에 당연한 수순으로 백성 뿐만 아니라 관료, 정부까지 가난하였다. 이러한 결과, 관료와 지방의 하급 관리인 향리, 향촌 사회의 재지사족의 비리와 백성들에 대한 수탈이 엄청나게 심하였다. 전체 파이를 키우지 못하는 사회이니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였고, 봉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관료들은 비리의 유혹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조선은 착취 사회였다. 특히 향리들과 재지사족들의 폐단이 심했는데, 대동법 시행 전의 방납의 폐단이라던가, 세도 정치 시절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정)의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착취 시스템은 중앙 정부에서 지방 수령으로, 지방 수령에서 양민들로 단계별로 이루어졌다. 저자는 조선 사회가 성리학에 매몰되어 파이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호혜와 재분배‘ 시스템에만 몰두하였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국가나 국민이나 가난을 면치 못하였는데, 반대로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안정적일 수 있었다. 자원이 한정된 사회에서 정치 안정을 위해서는 필히 분배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라는 속담이 조선의 높은 평등의식을 잘 보여준다. 사회가 전반적으로 부패하고 백성은 배 곯아도 왕조의 정권 연장이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안정적이었으니 성공한 국가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언젠가 모 교수가 나와서 전세계에서 500년 유지된 왕조가 없다며 조선 왕조를 극찬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웃음만 나올 뿐이다.

조선 시대도, 일제강점기도 아픈 역사이지만 엄연한 우리 역사의 일부이다. 나는 공화국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우리나라가 성취한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역사는 우리가 교훈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다. 관습과 문화라는 비공식적 제도는 그 수명이 끈질겨서 오늘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엔 대한민국 시민이 있고, 조선인이 있다. 글로벌 시대에 유연한 사상을 갖추고 적응력을 길러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 시대에 아직도 조선인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조선인들이 정치권 같은, 국가를 움직이는 곳에 포진해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의 주류 정치권을 보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조선 사림의 환생이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우리만이 옳다는 독선에, 명분을 내세우지만 위선적으로 뒤에서 구린 짓은 다하고, 돈 뿌려서 환심 사고, 노노재팬 같은 철지난 반일몰이에... 그냥 조선 시대 사림 내지, 향촌 재지사족의 환생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 부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조선 후기 같은 결말로 빠지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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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통계학
찰스 윌런 지음, 김명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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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정석’에 이어서 찰스 윌런의 저서는 두 번째이다. 돈의 정석에서도 느꼈지만 찰스 윌런의 책의 특징은 내용이 굉장히 충실하고 교양서 이상의 깊이가 있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교양 수준을 기대하고 읽었는데 예상 외로 어려울 수도 있다. 특히나 이번 책은 통계학에 관한 책이다. 본인 또한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진학 후 경제학과 함께 통계학을 공부했지만 상당히 지루하고 난해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배경지식이 얕게나마 있는 나도차도 ‘벌거벗은 통계학’을 읽으면서 내용을 소화시키느라 쉽게 진도가 나가지 않고, 공부하는 마음가짐으로 읽어 나갔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본인은 이 책을 2회독했다. 완전히 2회독한 것은 아니고 중요한 곳에 인덱스를 붙여 놓은 곳만 골라서 다시 읽은 것인데, 2회독하니 내용이 전보다 이해가 훨씬 잘 되었다. 1회독 때의 문제는 중간에 핵심 내용을 잘 이해하지 않고 넘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핵심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니 후반부가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쓴 것만 보면 너무 겁을 준 것 같지만 이 책은 굉장히 잘 쓴 책이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통계학 교양서적 중 이 책만큼 충실하고 쉽게 풀어 쓴 책은 없을 것이다. 이 책만 잘 소화한다면 대학교 기초통계학 과목을 수강한 효과와 비슷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개인적으로 찰스 윌런의 책은 “좋은 약은 입에 쓰다” 라는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쉽지는 않지만 소화하고 나면 남는 것이 많다.

이 책에서 두 가지 핵심 내용을 말하자면 ‘중심극한정리’와 ‘회귀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중심극한정리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중심극한정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서 후반부도 헤맸다고 할 수 있다. 중심극한정리가 중요한 이유는 모든 통계적 추론의 밑바탕이기 때문이다. 표본평균, 표본오차, 표본평균은 모집단의 평균을 중심으로 정규분포를 이룬다는 사실 등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넘어가야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 모든 사회과학이 그렇듯이 기초를 건너뛰고 다음으로 진행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늘날 사회과학을 급격하게 발전시킨 회귀분석 또한 회귀계수의 유의성을 검정하기 위해 중심극한정리가 이용된다. 이 정도면 정말 통계학에서 중심극한정리라는 개념은 저자가 말하듯이 통계학의 슈퍼스타 르브론 제임스라 칭할 만하다.

한편 저자는 통계학이 굉장히 유용하면서도 위험한 도구라고 말한다. 회귀분석을 하면서도 통계적 계산과정보다 올바른 방정식을 세우는 과정이 중요하고, 무엇보다 이론적 기반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귀분석 자체는 그저 상관관계를 보여줄 뿐이다. 이것을 인과관계로 착각하면 지난 20년 간 미국 내 자폐증 증가와 중국의 국민소득 증가를 연관시킬 수 있다. 또한 우리나라 뉴스에도 많이 나오는 내용인데, 남녀 간 임금차별을 다룬 논문에 대해서도 저자는 소개한다. MBA 졸업 후 동기 간 남녀 임금 차이의 세 가지 주 원인은 ‘재학 중 받은 교육의 차이’, ‘커리어 단절’, ‘주당 근무 시간 차이’로 밝혀졌다. 흔히 생각하듯이 그저 성별을 나누어 임금을 차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엄밀한 과정을 거친 논문과는 다르게 현실에서는 raw data만을 가지고 대중과 여론을 선동하는 세력들이 있다. 가령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사랑하는 일부 기자들, 본인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일부 여성단체들, 남녀를 갈라치기 하여 표심을 잡기 위한 일부 정치인들 등등 말이다. 결론적으로 통계는 칼과 같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고, 흉기로 쓰일 수도 있다. 통계 자체는 죄가 없다. 저자가 말했듯이 연구자의 논리와 엄밀한 방법론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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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정석 - 인생의 격을 높이는 최소한의 교양
찰스 윌런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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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윌런 교수의 ‘돈의 정석’을 읽었다.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저자의 전작 ‘벌거벗은 통계학’이 꽤 입소문 난 책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벌거벗은 통계학은 건너뛰고 이 후속작을 먼저 읽게 되었지만 말이다. 우선 읽고 난 소감은 대만족이다. 디테일에 강점이 있는 양질의 책이다. 일단 명확히 할 것이 있는데, 이 책은 ‘돈’을 다루고 있지만 재테크 서적은 아니다. 원제는 ‘Naked Money’, 즉 벌거벗은 돈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데, 출판사에서 돈의 정석으로 작명함으로써 무언가 재테크 서적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판매량이 중요하므로 이해하고 넘어가자. 어차피 중요한 건 내용이고 이러한 양질의 책이 번역 출간된 것은 독자에게 좋은 일이다.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복수 전공했는데 전공자 입장에서 이 책을 평가할 때 상당히 고품질이다. 전공과목인 거시경제학, 화폐금융론, 국제금융론, 국제무역학 등을 포괄하는 교양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 경제학과에 진학하고 싶은 고등학생, 경제학과 재학생 등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초반에는 개인적으로 조금 지루한 감이 있었다. 가령 화폐의 기능, 신용 창조,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등등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나열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공자 입장에서 본 입장이고, 비전공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낯설게 느껴지고 쉽게 이해하고 넘어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공자 입장에서도 굉장히 흥미 있고 빠져들게 하는 파트가 있었는데, 바로 ‘금본위제’를 다룬 파트이다. 사실 그 동안 금본위제를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연동시킨 것이라고 단순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 책 덕분에 금본위제의 본질과 한계까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은 후 가장 큰 수확은 ‘금본위제’의 이해이다. 앞서 말했듯이 금본위제는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에 연동한 제도이다. 금본위제는 금이라는 희소한 원자재의 특성으로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1971년에 준금본위제라고 할 수 있는 브레턴우즈 체제가 막을 내릴 때까지 명맥을 이어왔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화폐의 가치가 그 어느 것에도 연동되지 않는, 오직 발행 주체의 신용에만 의지하여 살아가는 명목화폐 체제이다. 금본위제는 그 자체로 모순을 해결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즉, 두 나라 간 무역불균형으로 금이 한 곳으로 쏠리면, 금이 쏠린 나라에서 금리 하락(돈의 가치 하락), 물가 상승(무역에서 불리)이 일어나면서 금이 다른 나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나 산업이 고도화되고 엄청난 수요가 존재하는 현대 경제 사회에서 금본위제는 적합하지 않다. 이제까지 인류가 발굴한 금의 양은 대형 유조선 한 대로 다 채울 수 있는데, 현대 경제의 수요를 그 정도 금의 양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 경제 사회는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명목화폐로 돌아가는 체제이고, 이 명목화폐 체제는 금본위제의 단점은 제거하되 장점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금본위제로 돌아갈 유인이 전혀 없다. 가끔 금본위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정치인이나 학자들이 있는데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대중을 선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과거 인류는 이러한 금본위제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거의 종교적으로 추종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칠이 재무장관으로 일했던 영국의 사례가 있고, 그 유명한 1929년 대공황도 있다. 우선 영국은 1차 세계 대전을 치르는 동안 파운드의 가치가 하락하여 물가가 상당히 올라있는 상태였다.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처칠은 금본위제 체제에서의 강 파운드를 영국 제국의 자긍심으로 여겼으며, 이에 따라 파운드가 전쟁 전의 가치로 복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운드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서는 물가가 하락해야 했다. 즉, 처칠은 디플레이션 유도를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물가나 임금 등을 하락시키는 것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당시 저명한 경제학자인 케인즈가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칠은 그대로 정책을 강행한다. 케인즈가 예상한대로 강 파운드는 영국의 수출업체들이 경쟁에서 불리하게 만들었고, 영국의 석탄 광산업계는 한 달에 100만 파운드씩 적자를 냈다. 따라서 생산 비용을 낮추기 위해 임금 삭감을 추진하자 노조가 반발하여 직장 폐쇄가 잇따랐다. 이에 다른 업계 노조들도 동참하여 총파업이 일어나는 등 영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신용경색, 파산, 은행 부도가 발생했고, 1931년 영국은 6년 만에 금본위제를 포기했다. 갈리폴리 해전 이후 처칠의 가장 큰 정치적 오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공황을 말하자면 사건 자체가 워낙 유명하고, 그 발생 원인도 여러가지로 추론되며 많은 논쟁이 있다. 이 책은 바로 금본위제가 대공황의 핵심 원인이라고 말한다. 그 위기 초기에 미국은 금리가 높은 상태였는데 금의 유출을 우려한 미국 관리들이 금리를 내릴 생각이 없었다. 미국이 금리를 내리지 않으니 금본위제를 따르던 유럽 국가들도 금의 유출을 막고 고정환율을 지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금리를 올렸다. 즉, 위기가 번지고 있는데 금리를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정반대로 행동한 것이다. 이것이 평범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무너뜨린 대공황으로 진화한 이유이다. 이러한 대공황이 후에 파시즘을 발전시켜 나치와 히틀러를 탄생시켰고,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금본위제가 어쩌면 2차 세계 대전의 원흉인 것이다. 이는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먼델이 지적한 사항이다.

금본위제는 화폐의 발전 과정 상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제도였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과거의 유물로만 존재해야 하는 제도이다. 학부 때 금본위제에 대해서 배우긴 했지만 왜 별 생각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교과서도 그렇고, 교수님도 그렇고, 이 책처럼 자세히 설명을 해주지 않아서 였을까. 금본위제 말고도 유로존도 굉장히 흥미로운데 이것도 다루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썼다. 결론만 말하자면 유로존은 ‘최적 통화 이론’에 의거해 점점 분열될 수 밖에 없다. 시작부터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결혼 생활이라고 비유하면 적절할까 싶다. 유로존은 독일과 그리스의 갈등을 보듯이 그 자체로 모순점이 내재해 있다. 궁금하신 분들을 꼭 책을 구매해 읽어 보시길 바란다. 아무런 경제 배경 지식이 없다면 이 책을 약간은 읽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을 잘 소화해낸다면 경제학과 학부생 못지 않은 지식과 교양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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