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를 우리라고 부를 때 : N번방 추적기와 우리의 이야기
추적단 불꽃 지음 / 이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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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 꼭 도착했다고 카톡 해!"


 어느샌가부터 친구들과 헤어질 때면 빠짐없이 하는 말이다. 내가 잠시 깜빡하더라도 누군가는 반드시 그렇게 인사를 해온다. 그리고 귀가한 뒤로는, 아직 단체채팅방에 도착했다는 말이 없는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올 때까지 쉬이 잠에 들지 못한다. 대학생때만 해도 이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런 인삿말을 처음으로 하게 된 것은 아마도 몇 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은 뒤였던 것 같기도 하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로 여기저기서 급속도로 젠더갈등에 불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각종 익명 커뮤니티 뿐만이 아니라 상호팔로 상태에서 유지되는 페이스북 등의 SNS에서도 이와 관련된 주제로 논쟁하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되었고. 원래는 없었던 것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그저 관심이 없어 몰랐던 것일 뿐인지, 어찌되었든 각종 화장실에서 불법촬영 카메라가 발견되며 여러 번 뉴스화 되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있는줄도 몰랐던 구멍인데, 한번 인지하게 된 뒤로는 공중화장실에 갈 때마다 늘 여기저기 뚫려있는 구멍들이 신경쓰인다.

 그리고 내 지갑에는, 친구가 벽에 뚫린 구멍을 막는데에 요긴하게 쓸 수 있다며 건네준 흰색의 원형 스티커가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어쩌다 이런 사회가 되어버린걸까. 한때는 인터넷의 지나친 발달이 문제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예전이라 해서 이런 일들이 없었겠는가. 물론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현대사회의 매체 확산 속도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빨라진 탓도, 그로 인해 자극적인 컨텐츠를 접하게 되는 연령층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도 무시 못 할 원인이기는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여성들의 인식 변화가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들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특정 사건의 기저에 깔린 혐오적 정서들에 대해 입을 열기 시작했기에 그간 곪아왔던 것들이 차츰차츰 도마 위로 오르게 된 것이라고.

 그랬기에 N번방 사건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수 있었고, 앞으로도 수없이 양산되었을지도 모를 피해자를 줄이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니 다행이다.


 딱 여기까지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누군가는 왜 그리 힘들게 인생을 사냐고 묻기도 한다. 왜 별것도 아닌 일을 예민하게 받아 들이냐고. 웃기는 말이다. 내가 불편하고 싶어서 불편한가. 여러 사회문제를 인지하고 불편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예민하게 구는 것'으로 여겨선 안 된다. 누군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일상이 다른 사람에게는 쟁취해야만 하는 것일수 있다. 나의 예민함이 사회를 좀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p.157


 N번방의 발견부터 불꽃의 두 사람이 걸어온 과정과, 느껴왔던 감정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이 책은 읽는 내내 내게 놀라움부끄러움, 그리고 분노등 굉장히 다양한 감정을 가져다 주었다.


 가장 먼저, 이 사건을 가장 먼저 인지하고, 사회에 알리고,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 하던 것이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린 두 명의 여대생이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전공, 논술, 시험.... 이들이 대학생임을 알리는 단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공모전을 위해 시작했던 취재에서 이런 끔찍한 실상을 목격했을 때, 나였으면 어떻게 대처했을까.

 아마 경찰에 신고하는 시도정도는 하려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후는 글쎄.... 이들처럼 사회적 이슈로 공론화 하고, 더 나아가 피해자들을 추적해나가며 적극적으로 돕고자 나서는 것은 지금의 나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걸 해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스러운데, 동시에 나를 부끄럽게 만든 것은 이들의 태도였다. 끝까지 피해자를 먼저 생각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모습들. 그 모습들을 보는데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나도, 그리고 우리나라 언론도, 가해자를 악마화하며 욕설을 퍼붓는 동안 그 뒷면에 숨어있을 피해자들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생각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같은 여성의 문제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나는 '남'이라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앞에서 잠시 강남역 살인사건, 그리고 불법촬영 카메라 이야기를 했다. 그때쯤 한창 페이스북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논쟁하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그 당시에 나를 가장 화나게 했던건 학교 후배가 썼던 글이었다.


 나는 여동생을 아끼고, 여동생과 사이도 좋은데, 왜 이런 나까지 싸잡아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하느냐 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의견에 설득을 하고, 보다 더 정제된 말로 반박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그 속에 섞여 논쟁하지는 않았지만, 그 무책임한 말이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그저 툭 던지듯이, 이런 글을 올렸던 기록이 남아있더라.


 다음 피해자는 내가 되는게 아닐까 불안에 떠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그저 일반화 당하는 현실에만 불쾌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이때만 해도 이런 생각을 했던 내가, 강남역 살인사건은 나에게 닥쳐오는 현실적인 위협으로 인식했던 내가, 왜 N번방 사태에 대해서는 그래지 못했을까. 이 책은, 그런 나에게 다시한번 경각심을 갖게 해주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한창 이슈화 되었을 때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조금씩 잊혀지고 있지만, N번방 사건은 아직 해결된 것이 아니기에. 성별을 떠나 한 '인간'이 착취당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함께 즐겼음에도 여전히 잡히지 못한 수많은 가해자들이 있고, 그나마 검거된 가해자들 또한 자신의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에서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받고 있다. 분명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러게 왜 원인을 제공해서...'라는 비난마저 듣고 있다. 그 사실이 나를 분노하게 했다.

 분노해서, 뭐가 바뀌냐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엔 나라는 사람 개인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적어도 기억할 수는 있으니까. 오늘부터는 언제까지고 기억하고, 관심을 갖고자 한다. 소리 낼 기회가 주어진다면 소리를 내야겠다. 이렇게 누군가가 몸을 불태우며 알리려 하고, 바로잡으려 하지 않아도, 죄질에 맞는 무거운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해지는 날이 올 때까지.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러 온다"

p.96

나는 '별 일 아닌 것'으로 치부하려고 애썼다. 그래야 내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나 자신에게 자꾸 묻게 된다. 내 탓인가? 이런 물음은 내 안에 남아있던 명백한 증거들까지 자근자근 짓밟고, 종국에는 나를 그냥 좀 예민한 여자애 정도로 자리매김해버린다.

p.115~116

그러니까 우리 사회가 먼저 선택해야 하는 것이 '누구를 보호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위법적인 수사 절차로 인한 인권침해를 막고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겠다, 이건 사실 말이 안 돼요. 일단은 여러 어려운 점이 있어도, '아동이나 청소년을 유인하는 모든 행위는 통제한다'는 법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거죠.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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