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대로부터의 통신 - 금석문으로 한국 고대사 읽기
한국역사연구회고대사분과 엮음 / 푸른역사 / 2004년 1월
평점 :
고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료의 부족함에 치를 떠는 한편 가끔은 굉장히 디테일한 기록에 놀라기도 한다. 한 국가의 존재 여부가 논란이 되는 반면에 고대에 살았던 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인물의 생애는 굉장히 구체적 이다. 고대사에서의 이러한 밀도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대사라는 분야 자체가 자료가 워낙 없다보니 별별 자료를 다 찾아서 그걸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마치 역사가 아니라 범인을 찾아내는 탐정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역사에 접근해야 할 때가 있다. 최근 조선왕조실록을 공부하면서 그런걸 많이 느꼈다. 실록에 적혀있는 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왕의 심리를 추론해 보면서, 또 사관의 논평이나 가끔은 왜 이 말을 이 시점에 끼워 넣었을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자료가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그것만 가지고는 사실이 모두 눈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손가락 발가락을 동원하면 어쩌면 자료의 개수를 다 샐수 있을것 같은 고대사는 어떠하겠는가?
고대로부터의 통신 이 책은 분명 학술적인 내용을 다룬 역사서적 이지만 읽다보면 마치 추리소설 같은 느낌을 받는것은 앞에서 내가 말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고대사 연구자들의 연구성과와 연구과정이 적나라하게 적힌 책이기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나 역시도 금석문 판독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1. 신라왕족의 로맨tm 그 현장을 찾아서]와 안악 3호분을 다룬 [5. 역사의 블랙홀 동수묘지] 마지막으로 [10. 중원고구려비, 선돌에서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 였다.
[1. 신라왕족의 로맨스 그 현장을 찾아서] 이 부분은 천전리 각석에 관한 부분이다. 천전리 각석은 사실 단일 시대의 기록만 새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바위 상단부에는 청동기 시대의 사람들이 새겨넣은 각종 기하학적 문향이 있고, 하단부에는 6세기 무렵부터 9세기 무렵에 걸쳐 이 근처에 놀러온 왕족이나 승려, 화랑들이 새겨넣은 명문과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천전리 각석 중에서도 6세기 초에 새겨진 명문이다. 이 명문에는 신라의 유력 왕족인 갈문왕과 그와 사랑하는 사이였던 어사추여랑과의 로멘스가 새겨져 있다. 이 둘은 둘의 사랑이 한창 무르 익었을때 천전리로 나들이를 나와 이 명문을 새겼고 그 후 14년이 지난 뒤에 어사추여랑과 갈문왕은 둘다 죽고 갈문왕의 본처가 둘을 추억하면서 다시 한번 새긴 기록이 있다.
과거에 인물이라 죽은것은 당연할 텐데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명문을 보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가지 의아했던 것은 본처가 새겨 준 거라는데 지금이라면 불륜이겠지만 당시에는 일부 다처제가 당연한 것이었을 테니 그냥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라는 사람들은 마냥 감상적인 생각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사람인 것인지 이런 감동적인 명문에서 역사적 사실을 쪽쪽 뽑아내었다.
우선 갈문왕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은 갈문왕은 왕위계승이 유력한 가까운 왕족이 받는 칭호였다는 것인데. 천전리 각석의 갈문왕은 연구 결과 진흥왕의 아버지이자 법흥왕의 동생인 ‘사부지 갈문왕’ 이라는 사람이다. 거기에 14년 의 시차를 두고 새겨진 명문에 신라 왕을 칭하는 칭호가 변한것을 토대로 신라의 왕권이 6세기 초에 급속히 발전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우리가 교과서나 역사서적에서 볼 수 있는 6세기 초의 신라의 발전이라는 서술의 근거를 천전리 각석도 한발 보태고 있는 것이다.
[5. 역사의 블랙홀 동수묘지] 동수묘지가 왜 블랙홀인가? 처음엔 의아했으나 읽다보면 답이 나온다. 동수묘지가 만들어진 연대는 고맙게도 동수묘지에 명문이 새겨져 있기에 4세기 중반인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의 고구려의 무덤으로서는 만든 기법이나 벽화가 지나치게 발달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추측을 낳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동수묘지가 있는 황해도 부근은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4세기 중순에는 고구려 땅이긴 했으나 중심지는 못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교한 무덤이 존재하는 것은 여러 연구자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을 것이다.
일단 동수가 전연에서 망명하여 고구려에서도 중요한 지위를 맡았다는 점에서 그가 중국인으로서 중국인 장인을 불러서 무덤을 만들었다는 추론이 가능한데 이는 현재의 역사학계의 정설로 보인다. 하지만 난 굳이 중국인 기술자를 부르지 않아도 황해도에 불과 몇십년 전에 자리했었던 낙랑군의 기술자들을 흡수함으로서 고구려의 무덤제작 기술이나 벽화 제작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한게 아닐까 생각한다. 무덤 제작이라는게 가장 변화에 보수적인 것인지라 국내성에 자리잡은 기존 지배층들은 낙랑의 기술자로 무덤을 만드는 것을 선뜻 받아들이지는 못하였겠지만 동수와 같은 신흥 지배층, (더구나 중국에서 망명한) 들은 낙랑의 기술자를 활용해 무덤을 만들어 내는 것에 개방적이지 않았었나 생각한다.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고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10. 중원고구려비, 선돌에서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로] 중원고구려비는 잠시 나에게도 가르침을 주셨던 정영호 교수님이 발견한 것이라 하여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전국의 입석리를 다 뒤졌다’, ‘빨레판으로 쓰던걸 유심히 봤더니 중원고구려비더라’ ‘아니다 대장간에서 쓰던걸 발견한거다’ ‘전날 꿈을 꿨더라’ 라는 여러 루머가 있었는데, 입석리를 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원고구려비는 빨레판도 아니였고 대장간 기둥도 아니였고 민간신앙의 대상인 ‘선돌’로서 몇 대째 신성시된 돌이었다. 또 내가 정영호 교수님께 직접 물어봤는데 발견 전날에 꿈같은건 전혀 꾸시질 않았다고 하시면서 본인은 유적발굴 전날에 꿈꾼적은 전혀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몰랐던 사실을 안 것은 바로 중원고구려비가 장수왕이 아니라 문자명왕이 세웠다는 것이다. 하도 남하정책 = 장수왕 이라고 고등학교때부터 계속 배워왔기 때문에 고구려 남하의 결정적인 증거인 중원고구려비는 당연히 장수왕이 세웠을 거라도 생각했었도 또 그렇게 배웠던거 같은데 내용을 보니까 영락없이 문자명왕이 세운 비였다. 그리고 연표에서만 보았던 의문의 인물 ‘조다’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엄청나게 오래 산 장수왕과 그의 손자 문자명왕 사이에 있었던 장수왕이 조금만 덜 살았더라도 왕이되어 ‘조다왕’이 될 것 같았던 비운의 인물, 내가 고등학교 시절 쪼다 쪼다 거리며 이름이 왜 이모양이냐 했던 바로 그 ‘조다’ 인 것이다.
그 조다라는 인물이 중원고구려비를 근거로 역사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책의 내용이 맞다면 ‘조다’는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들인 모양이다. 장수왕은 꽤나 오래 살아서 후계구도에 대해서 생각을 해 놨을게 틀림없는데 ‘조다’는 문자명왕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태자 책봉이 못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교과서나 역사서적에 적힌 것은 공신력이 있기 때문에 무언가 대단한 근거가 있을꺼라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문제의 ‘조다’ 같은 경우에는 흐릿한 비문 속에서 드러난 짧은 두 글자가 근거에 전부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사실은 반대로 금석문의 중요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대인들이 당대에 만든 당대의 기록이기 때문에 달랑 두 글자도 함부로 여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서 현재의 기록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것인지, 우리가 보고 있는 신문이나 방송들이 나중에는 가장 신빙성 있는 자료가 될 것인데 과연 지금의 방송과 신문은 얼마나 신뢰감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가? 발행부수를 기준으로 미래에 이른바 조, 중, 동을 가장 신뢰감 있는 자료로 선정하여 역사를 재구성 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