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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플러 수용소
고호 지음 / 델피노 / 2020년 7월
평점 :
2024년의 어느 날, 전국 각지에서 남녀 열한 명이 동시에 증발하는 일이 발생한다. 증발한 11명의 남녀는 나이대도 모두 다르고 직업도 달랐다. 단 한가지의 공통점, 얼마전 자살한 여배우 고혜나에게 악성댓글을 달았다는 것만 빼 놓으면. 한편, 악플러들의 척결을 대통령 공약으로 내걸은 유재영은 악플러들의 행동교정을 위해 '악플러 수용소'를 설립하고, 대통령 직속기관인 수용소를 책임지는 심소장은 범죄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은 인물로 유명했다.
초등학교 2학년짜리 여자아이를 집단 성폭행한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 다섯이 모두 죽은 11호 소년원 사건의 책임자였던 심소장. 그는 심사등급 1등급이자 11명의 악플러를 수용소에 수감한다. 이후 익명의 토끼 마스크를 쓴 사내를 통해 기묘한 규칙을 전달하고, 수감자의 상호평가 댓글을 통해 추천을 많이 받은 순서대로 조기퇴소를 하는 게임을 시킨다. 수감생활 100일을 줄이기 위해 힘을 합친 수감자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조기퇴소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었다.
납치되어 끌려갔다는 책의 도입부를 보면서 이건 불법적인 느낌이 아닐까 했었다. 하지만 상상이 무색하게도 무려 정부기관하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그것도 악플 척결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11명의 남녀는 10대의 미성년자부터 자영업을 하며 자리잡은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29살의 사법고시생(폐지된 제도지만 소설의 극적효과를 위해 설정), 아들 둘과 딸 하나를 키우는 38살의 주부, 중학교 2학년인 15살의 미성년자, 27살의 간호조무사, 32살의 백수, 딸 하나가 있는 52살의 개인 자영업자. 책의 초반부에 소개된 것은 이렇게 6명이다. 나머지 5명은 딱히 이름도 나오지 않고 불의의 사건들로 인해 모두 사망한다. 일련의 과정을 겪으며 남은 6명은 힘을 합치기로 하고, 순서를 정해 100일의 수감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레드볼'을 받기로 합의하게 된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소설이 꽤 많이 진행된 것 같겠지만, 레드볼은 중반부터 조기퇴소자를 가려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때부터 소설의 긴장감이 더 높아지며 여배우 '고혜나'와 연관된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소설은 걸그룹의 막내였던 '고혜나'가 배우로 전향해 살아갔던 이야기와 수용소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된다. 그러니 실제로 수용소부분만 모아놓고 보자면 레드볼이 나온 건 중반보다 빠른 셈이다. 처음에 수용자들은 레드볼 자체를 희망으로 보고 갈망했지만, 조기퇴소자들의 운명을 보며 공포의 대상이자 폭탄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레드볼 자체가 징벌인 셈이었다. 소설이 진행되며 나오는 수감자들 각각의 레드볼 내용이 달라서 다음엔 또 무슨 방법으로 악플러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릴까 궁금하기도 했으나, 출소 이후 죄를 돌려받는 걸 보면 복잡미묘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온라인 상에서는 무서울 것이 없던 사람들이 현실에 온라인의 과오를 풀어놓으니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실제로도 일어나는 일이니까.
표지와 소개글 때문에 미스터리하고 굉장히 무거운 분위기를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는 아주 무겁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가벼운것도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처음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데 비해서 뒤쪽이 좀 아쉬웠다. 어쨌든 인물들의 악플이 너무 사실적이여서 씁쓸한 느낌이 많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인물에 대한 댓글창이 아예 없어지는 추세지만 온갖 루머와 악의적인 소문, 댓글들은 아직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으니까. 소설의 방향성이 복수는 복수로라는 식으로 진행되긴 했는데.. 없어지지 않는 악플러들을 어디까지 징벌해야할까 한번쯤 생각해보게 만들기도 했다.
보이는 것은 얼마든지 꾸며질 수 있으며, 들리는 것은 얼마든지 오염될 수 있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내달리면서 혜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제 안에는 독단과 선입견이 없었는지. - 230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