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의 것들 이판사판
고이케 마리코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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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는 (1) 역사와 전통의 ‘미스터리 베스트 10’에 대항해 만들어진 문학상으로 (2) 기성보다 신인들의 작품을 우선 눈여겨보며 (3) 추리뿐만 아니라 에스에프나 호러 장르의 소설도 두루 선발했는데 (4) 파격적이게도 여성작가와 남성작가의 작품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스터리계에서 여성작가는 말랑말랑한 작품만 쓰면 된다’는 분위기가 있었고 작가들도 그런 주박에 씌워져 있었습니다. 그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가 등장한 거예요. 이 상은 바깥쪽에서부터 ‘젠더의 벽 따위 이제 낡은 이야기지’ 하고 무너뜨려버렸다고 할까. 여성작가를 젠더에서 해방시켰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할을 한 문학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남성작가-순문학이 주류였던 일본 문학계의 판도가 점차 바뀌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여류작가라는 단어를 사어로 만들며 일약 중심 조류를 형성해 나갔던 여성작가들 (이를테면 기리노 나쓰오, 미야베 미유키, 오가와 요코) 중에 한 명이 고이케 마리코입니다.


대학에 다니며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했던 고이케 마리코의 첫 직장은 출판사였습니다. 소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하는 편이 좋겠다 싶어 입사했지만 만든 책은 『눈이 좋아지는 방법』 같은 실용서뿐. 결국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프리랜서 편집자로 본인이 만든 기획서를 들고 출판사를 전전합니다.


“그중 하나가 출판사에 근무하던 시절 여성작가들에게 의뢰하여 앤솔로지 형식으로 만들고 싶었던 에세이였어요. 그런데 의뢰를 부탁하기도 전에 출판사를 그만두게 되었지요. 이후 그 기획서를 출판사에 들고 갔더니 사장이 저보고 직접 써보라더군요. 작가로서 좋은 스타트가 될 수도 있겠다면서.”


그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꾼 고이케 마리코는 불과 2개월 만에 원고를 완성하여 『지적인 악녀의 권유』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출간합니다. 내용은,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 따위 무시하고 원하는 대로 살아라, 결혼 따위 필요 없다, 남자에게 휘둘리지 말자 등등. 1978년에 이런 내용의 책이 나왔다니 분위기가 어땠을지 조금쯤 짐작이 되시나요.


당시 언론은 무명 저자의 ‘당돌한’ 데뷔작을 크게 보도했는데 선정적인 제목의 기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책은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했지만 왜 아니겠냐는 듯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젊은 작가의 악녀 코스프레’ 같은 식의 비난이 따라붙었지요.


“온갖 TV 프로그램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하더군요. 인터뷰며 강연 요청도 줄을 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탤런트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TV 출연도 강연도 인터뷰도 전부 그만두었습니다. 그래도 악녀 고이케 마리코라는 허상은 몇 년 동안 끊임없이 저를 괴롭혔어요.”


원래 자신이 가고 싶었던 길로 돌아가는 데는 7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사이에 여러 나라의 번역소설을 다양하게 읽었고 특히 프랑스의 추리소설 작가인 카트린 아를레와 영국 미스터리 소설계의 거장인 루스 렌들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등장인물들 마음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하여 점차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고조되도록 만드는 데 능한 서스펜스 연출의 대가들이 쓴 소설을 읽으며 ‘이런 장르의 소설이라면 나도 쓸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합니다.


아마도 『지적인 악녀의 권유』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으니 순문학 쪽으로는 인정받기가 어려울 거라고 판단하여 상대적으로 진입장벽이 낮은 장르문학을 선택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리하여 소설가로 데뷔한 건 1985년. 이후 여러 편의 미스터리와 호러소설을 발표하고 1989년에는 한국에도 번역된 바 있는 『아내의 여자친구』로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지만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아니, 평가가 나빴다기보다 작가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겠죠.


“미스터리 팬들에게는 ‘깜짝 놀랄 만한 반전도 없고 너무 순문학적인 거 아니야’라는 얘기를 듣고, 순문학 독자들에게는 ‘그저그런 추리소설이잖아’라는 평가를 받다 보니 어느 쪽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고 할까요. 고민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또 전부 그만두고(웃음) 내가 쓰고 싶은 걸 쓰자고 생각했지요.”


그때 쓴 소설의 제목이 『사랑』, 연애 소설의 신경지를 열었다고 평가받은 이 작품으로 고이케 마리코는 일본 최고의 대중문학상인 나오키 상(1995년)을 수상합니다.


“내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을 비운 채로 썼습니다. 그 전까지는 소설을 쓰는 동안 괴로웠어요. 손으로 모래를 퍼올리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잖아요. 나는 흘러내리는 모래에 대해 쓰고 싶은데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손바닥 위에 남은 모래뿐이었다고 할까, 비유하자면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하지만 『사랑』을 썼을 때는, 이것으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을 만큼 만족스러웠습니다. 뜻하지 않게 나오키 상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 내가 좋아하는 작풍으로 뭐든 마음껏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실제로 고이케 마리코는 『사랑』을 발표한 이후로 픽션과 논픽션, 순문학과 장르문학, 미스터리와 로맨스를 가리지 않고 다채로운 작품을 썼고 대부분이 영상화되었으며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시마세 연애문학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도 받았지요.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분야는 호러, 그녀에게는 언젠가부터 ‘호러소설의 명수’라는 레테르가 붙기 시작했는데 문예평론가인 이케가미 후유키의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무섭지만 따스한 한편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되풀이하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에 대해 쓸 때는 고이케 마리코를 당할 자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지불식간에 공포를 예감케 하는 정교한 풍경 묘사, 풍부한 수사를 동반한 시적인 문체의 사용, 유미주의적 작풍, 단편에서 잘 드러나는 기교 너머의 섬세함은 여타의 호러소설들과 구분되는 고이케 마리코만의 특징이니까 이 부분을 눈여겨보며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에 대해 쓴 고이케 마리코의 소설은 『이형의 것들』 외에도 여럿 있지요. 부디 『이형의 것들』이 잘 팔려서 그의 소설들이 좀 더 활발히 한국에 소개되길. 아니, 북스피어에서 낼 테니까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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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상자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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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관절 왜 제목이 인내상자(堪忍箱)인가.

뚜껑을 열지 말고 참아야(인내해야) 한다,

결코 열어서는 안 되는 상자에 얽힌 이야기니까.


2

그에 발맞추어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마음속에 단단히 봉인해 두고 살아가는데.


3

그 비밀을 둘러싼 인간들의 사연은

처음 읽을 때는 애틋하지만, 다시 읽으면

마치 오꼬노미야키 위에 부처님 형상의

자국이 생긴 걸 목격한 것처럼 놀라게 됨.


4

왜냐면 지금까지의 미야베 미유키 소설 가운데

미회수 떡밥과 복선이 가장 많은 작품이거든요.

이걸 꿰어 맞추면 놀라움이 무서움으로 바뀝니다.


5

슬프고 애틋한데, 한편으로는 무서움...

일본에서는 이를 ‘인정호러’라고 하더군요.

다들 참 말도 잘 만들어 냄.


6

그건 그렇고,

이 정도 설명을 들으니 약간 설레시지요.


7

인간의 노화는 몸보다 감정이 먼저 시작된다고 합니다. 감정이 노화되면 매사에 짜증이 나고 뭘 해도 즐거운 기분이 줄어드는데다 만사가 귀찮아지게 마련이지요. 일종의 번아웃 같은 것. 하지만 감정의 노화는 ‘설렘(설레임 아님)’으로 막을 수 있습니다.


8

오랫동안 미야베 미유키 작가의 신작을 기다려 온 형제자매님. 제가 여러분의 노화를 살짝 늦춰드렸다는 걸 좀 기억해 주셔야 해요.


9

“누구에게나 숨기는 일이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이고, 두 가지가 있으면 세 가지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아. 세 가지가 있으면 더 많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지. 자, 오린 너는 이제 그만 자렴. 내가 여기에 있으면 아무리 무더워도 시원하게 잘 수 있을 테니 부채는 필요 없을 거야.” 이 대사를 살짝 인용해서 이렇게 얘기하고 싶네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 있으면 아무리 무더워도 시원하게 잘 수 있으니 부채는 필요 없지, 라고.


10

아참,

책의 말미에 있는 엽편 소설 분량의 편집자 후기는 반드시 본문의 읽기를 마친 후에 거들떠봐 주시길.


이상, 

그야말로 셀렘을 가득 담아 편집에 임했던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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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엔딩 크레딧 이판사판
안도 유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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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이 만들어지는 걸 보신 적 있으신지.

2

작가는 어느 날 편집자와 대화를 나누다가 깨닫습니다.

‘내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동안 전혀 몰랐구나.’

그리하여 3년여의 취재 끝에 소설을 완성.

3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인쇄소에 입사한 그는,

출판사 담당자와 만나 제작일정을 상의하고

제작공정을 관리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4

그 과정에서,

(1) 편집부와 인쇄 현장의 상반된 인식을 체감하고

(2) 작가와 디자이너의 무리한 요구에 이따금 좌절하며

(3) 사양 산업이 분명한 일에 대한 회의감도 느끼지만

시련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하지요.

5

책에도 영화와 같은 엔딩 크레딧이 있다면 기록해야 할,

책의 뒤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이 작품의 제목은 『책의 엔딩 크레딧』

6

출판 불황으로 술렁이는 업계의 그늘과

이를 돌파하고자 하는 베테랑들의 자부심을

잉크 냄새 나게 묘사했습니다.

7

이 작품을 읽는 내내 20년차 편집자인 저는

숱한 제작사고와 이런저런 갈등의 순간이 떠올라

가슴을 졸였다가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는데,

마지막에 이런 문장과 마주하고 무릎을 쳤습니다.

8

“책은 바이러스를 없애지 못한다. 책은 역병을 고치지 못한다. 그래도, 이 기나긴 비상사태 세상에도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사람의 마음을 공감해 준다느니 용기를 준다느니 하는 그런 의욕을 내려놓고 생각해 본다. 그렇다. 우리는 책이라는 필수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오늘도 새로운 책이 태어난다.”

9

마침 곧 ‘책의 날’이기도 하니

한번 거들떠봐 주시길.

10

아울러 북스피어에서 새 직원을 뽑았습니다.

이름은 마리, 한 마리 두 마리 할 때의 그 ‘마리’예요.

앞으로 마케팅을 담당할 예정이니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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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의 저편 이판사판
기리노 나쓰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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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생 성애소설을 써오던 작가가 어느 날 갑자기 문예윤리위원회라는 국가기관에 감금.


2

감금의 이유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소설을 쓰는 작가를 처벌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인데.


3

그렇다면 대관절 문예윤리위원회의 요구는 무엇인가. “음란, 폭력, 범죄, 체제 비판, 이런 것들은 앞으로 쓰면 안 됩니다. 작가들은 마음이 맑아지는 이야기, 아름다운 이야기만 쓰겠다고 맹세해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어요.”


4

저항하는 작가에게는 밥과 달랑 김치 하나뿐인 형편없는 식사가 지급되지만 위원회가 원하는 글을 쓰면 처우가 달라진다.


5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일몰의 저편>을 통해 집요하게 던지고 있는 질문은 ‘소설이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다는 판단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하는가’라는 것.


6

전후 맥락을 무시한 채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에서 나온 대사 하나만을 떼어내 “이건 여성 차별”, “저건 남성 혐오”라며 마치 작가가 실제로 여성을 차별하고 남성을 혐오한다는 식으로 트집을 잡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자 ‘이런 분위기에서는, 어떤 건 쓰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작가들에게 내면화될 것​!’이라는 문제의식이 생겨 집필했다고 한다.


7

위와 같은 흐름을 아무런 검증 없이 ‘논란’이라고 부추기는 미디어의 문제까지 포함하여 맹목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갈 ‘일본의 가까운 미래’를 형상화하며 작가 특유의 싸움꾼다운 면모를 보여주는데, 하여간 좀 대단.


8

‘그렇다면 다같이 절망을 맛봅시다’라는 듯한 결말 역시 기리노 나쓰오다웠다고 사료되는 바.


9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기리노 나쓰오 작가의 <아웃>을 읽었을 때 저는 그 어두운 스토리와 음습한 묘사에 기겁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이 작가의 작품은 모조리 읽었어요. 그러는 동안 한 번쯤 내 손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는데 운 좋게 <일몰의 저편>을 계약할 수 있었고 이번 작품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책 말미에 편집자 후기도 길게 써봤습니다. 시간 나실 때 슬슬 거들떠봐 주시길.


10

이상, <일몰의 저편> 간단정리, 였습니다.


서울을 떠나 새 사옥(?)의 첫 책이 기리노 나쓰오 작가여서 기쁜,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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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 박람강기 프로젝트 11
사라 파레츠키 지음, 김원희 옮김 / 북스피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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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범죄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팜므파탈 아니면, 살해당하는 피해자일까?


사라 파레츠키가 이런 의문을 가진 건 열아홉 살 무렵의 일입니다. 그때 처음으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빅슬립>을 읽고 기함했다는군요. <빅슬립>에서 카멘 스턴우드는 주변의 남자들을 성적인 유혹으로 부패시키는 팜므파탈로 등장하지요.


“범죄소설에서는 여성들이 범죄를 사주하려고 자기 몸을 이용했어요. 아니면 피해자였죠. 사악하지 않은 여성은 누군가의 가르침이 없으면 신발 끈조차 묶을 수 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더군요. 이 모든 요소를 사용한 최초의 책은 대실 해밋의 『몰타의 매』였습니다.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범죄를 저지르게 했던 브리지드 오쇼네지는 범죄소설에서 모든 여성 캐릭터의 모델처럼 되었지요.”


사라 파레츠키는 레이먼드 챈들러와 대실 해밋의 여성 묘사에 화가 나서, 소설과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꿀 범죄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파레츠키가 이야기를 구상한 시점부터 첫 번째 소설을 쓸 때까지는 대략 8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그 기간 동안 보험 마케팅 매니저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다고 합니다.


여성을 향한 끔찍한 폭력, 여성에게 고통을 주려는 욕망을 자각하며 싸워야 하는 캐릭터,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느끼던 여성들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립탐정 V. I. 워쇼스키가 태어난 것은 1982년입니다. 몇 년 후 한국에서는 <여형사 워쇼스키>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었는데, 비디오대여점깨나 들락거렸다면 기억하시겠죠. 캐서린 터너가 주연을 맡았던 바로 그 영화.


파레츠키가 단지 소설만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건 아닙니다. 1988년에는 미스터리와 범죄소설을 쓰(려)는 여성들을 지원하는 조직인 ‘시스터스 인 크라임’을 설립하여 자신이 꿈꾸었던 사회적 변화를 일으켰지요. 작가가 되는 건 남성만의 영역처럼 보였던 시절, 당연하다는 듯 차별적 대우를 받았던 여성 작가들에게 시스터스 인 크라임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2019년 4월 25일. 뉴욕에서 열린 에드거 앨런 포 시상식에서 사라 파레츠키는 19번째 워쇼스키 시리즈인 <쉘 게임>으로 수 그래프턴 기념상을 수상합니다. 이 소식은 ‘미국 미스터리 작가 협회가 사라 파레츠키를 예우하다’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으니 이건 역시 시대의 변화라고 할까요.


수 그래프턴과 사라 파레츠키는 서로를 알지 못한 상태로 같은 해에 나란히 전례가 없는 강한 여성 탐정을 각자의 작품에 등장시켰다는 인연이 있기 때문에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그래프턴의 뜻을 기리기 위해 만든 상의 첫 번째 수상자로 파레츠키가 선정된 것은 뜻 깊은 일이라 하겠습니다.


파레츠키가 가정에서 폭압당하는 아이였을 때부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까지의 여정, 남성 중심의 문학계에서 글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에 관해 서술한 책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이 출간되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가디언>과 했던 인터뷰에서 작가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말하기의 필요성으로 귀결됩니다. 공적 영역에서 여성을 위한 말하기는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 있죠. 예컨대 한 여성이 게임에 강간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 1만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강간하겠다고 위협합니다. 이게 바로 워쇼스키가 떠나지 않는 이유예요. 나처럼 나이든 여자에게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느낍니다”라고.


저도 우연히 <가디언>에 실린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고 원서를 검토하다가 <침묵의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 Writing in an Age of Silence>을 만들게 되었는데 챈들러나 해밋 같은 작가들에 대한 뒷담화가 잔뜩 나오니까 역시 재미있습니다. 편집자 후기에는 ‘시스터스 인 크라임’의 탄생부터 최근까지의 활약에 대해 적어보았습니다. 시간 나실 때 슬슬 거들떠봐 주시길.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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