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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살인 ㅣ 첩혈쌍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12월
평점 :
<간단정리>
1) 대학 졸업 후 운전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
2) 하지만 울트라극소심이라 강사 눈도 못 쳐다봄
3) 안 되겠다, 이걸 소설의 취재라 생각하자
4) 소설의 소재를 찾기 위해 강사에게 폭풍 질문
5) 덕분에 베스트드라이버가 됨
6) 한데 그동안 취재한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7) 회사에 출퇴근하는 동안 짬짬이 소설을 쓰기 시작
8) 세계 멸망에 관한 내용으로 6개월 만에 탈고
9) 에도가와 란포 상에 응모하여 수상하고 작가로 데뷔
제68회 에도가와 란포 상.
전혀 다른 작풍을 가진 5명의 심사위원(교고쿠 나츠히코, 아야츠지 유키토, 아라이 모토코, 시바타 요시키, 쓰기무라 료에)이 '만장일치'로 대상을 결정할 당시 수상자의 나이는 23세였는데 이것은 일본 문학계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습니다.
1955년부터 지금껏 70년 가까이 이어온 란포 상의 모든 수상자들 가운데 가장 어렸기 때문입니다.
상을 받은 직후, 아라키 아카네 작가는 다소 뜻밖의 고백을 합니다. 『세상 끝의 살인』이라는 소설의 모티브를 처음 떠올린 건 운전면허 교습소에서였다고 말이죠. 낯가림이 심해 운전 교습소에 가서 강사를 만나는 일이 항상 긴장되었는데 ‘소설의 취재’라고 생각하니 말문이 쉽게 트였다면서.
“낯가림이 심해 운전 교습소에 가서 강사를 만나는 일이 항상 힘들었는데 소설의 취재라고 생각하니 말문이 트이더라”는 얘기를 들으니 북스피어 출판사를 막 창업할 당시가 떠오르더군요. 이런저런 독자와의 만남이나 이벤트를 기획하며 고민이 깊었거든요. 저도 아카네 작가와 마찬가지로 낯가림이 심해서 말이죠.
며칠을 끙끙거린 끝에 ‘이건 (사람과의 만남이 아니라) 책을 만드는 작업의 일환이다’라고 생각했더니 마음이 어찌나 가벼워지던지. 이후의 전개는 제 몸 속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사회적 자아’가 맡아서 진행해 주었습니다. 무척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다만 제 경험이 시시한 에피소드로 장렬히 산화한 데 반해 아라키 아카네의 경험은 걸작의 구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큰 차이네요. 그렇다면 이제 ‘쌩초보 작가가 어떻게 이런 근사한 이야기를 구상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까요.
첫 번째 : 왜 지구 멸망인가
이왕 취재라고 여긴 김에 정말 소설로 써볼까 마음먹자마자 자연스레 운전학원 강사+수강생이라는 조합이 머리에 떠올랐겠지요. ‘운전학원 강사와 수강생 여성 2인조’가 살인사건에 휘말린다는 설정까지는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이 개입할 수밖에 없죠. 어떻게든 교사와 수강생이 주체적으로 수사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던 아라키 아카네는 인류를 멸망시키기로 합니다. 소행성과 지구의 충돌을 앞두고 경찰력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이라면, 두 사람의 독자적인 수사도 개연성을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 별이나 천문학에 관심이 많아서 한 번쯤 다뤄보고 싶었던 이야기였는데 단순히 머릿속으로만 구상하진 않았습니다. 지구 멸망에 관한 픽션과 논픽션, 각종 자료를 구해 몇 달간 닥치는 대로 읽으며 공부를 거듭했지요.
그중에서도 『세상 끝의 살인』이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벤 H. 윈터스 작가의 소설입니다. 『라스트 폴리스맨』에 그려진 세계는 소행성 충돌로 지구의 멸망까지 남은 시간이 반 년 남짓. 그런 상황에서 신참 형사가 살인사건에 착수하는 이야기예요.
_《소설 마루》 인터뷰 중
아카네가 영향을 받았다는 벤 H. 윈터스의 소설은 3부작으로 출간되었으며 각각 에드거 상(추리소설 부문)과 필립 K. 딕 상(SF 부문), 사이드와이즈 상(대체역사 부문)을 비롯하여 다수의 상을 받았습니다. 한국어판으로도 출간된 바 있으니 (지금은 절판이지만) 구해서 읽어보셔도 좋겠어요. 재미있으니까.
두 번째 : 왜 에도가와 란포 상인가
운전을 배우며 회사에 출퇴근하는 동안 짬짬이 소설을 쓰기 위해 이용한 건 스마트폰이었습니다. 그날그날 쓴 내용은 퇴근 후 집에서 컴퓨터로 옮겼다네요. 그런 식으로 플롯을 짜는 데 3개월, 집필에 3개월, 탈고하기까지는 대략 반 년가량이 걸렸다고 합니다.
새로운 수수께끼가 속속 등장해 지루할 틈이 없는 가운데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을 움직이는 이 극강의 미스터리를 쓰는 데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니 대단하지요. 이 정도면 공모전에 응모해도 괜찮지 않을까. 고민 끝에 에도가와 란포 상에 도전한 까닭은,
아라이 모토코 작가의 소설 『한 번 더 당신에게』가 저에게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곧 세상이 끝날 텐데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사람을 만나기 위해 여행하는 여성 캐릭터에 완전히 반하고 말았어요. 지구 멸망이라는 설정을 떠올린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했지요. 그 아라이 선생님이 심사위원이었기 때문에 주저 없이 란포 상에 작품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당신에게』를 읽고 작품을 구상, 『라스트 폴리스맨』을 읽고 플롯을 다듬었다, 는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텐데,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라스트 폴리스맨』보다 더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어요. 『라스트 폴리스맨』을 능가하지 않았다면 『세상 끝의 살인』 한국어판은 출간하지 않았겠지요.
이런 대형 신인을 ‘발굴’한 에도가와 란포 상의 심사위원들이 얼마나 뿌듯해했을지 조금쯤 짐작이 됩니다. 그중에서도 아야츠지 유키토와 아라이 모토코 작가는 수상작을 발표하며 청출어람 같은 각별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러한 각별함이 “초신성의 등장”, “역대 에도가와 란포 상 최고작”이라는 상찬으로 표현된 것일 텐데.
저도 심사위원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네요. 독자로서, 그리고 한국어판의 편집자로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세상 끝의 살인 한국어판 편집자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