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크라임 이판사판
덴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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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자는데 불을 켜서

2) 텔레비전 전원을 끄지 않아서

3) 휴대전화 잠금을 풀어주지 않아서

4) 맞아야 말을 들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

 

지난해에만 최소 138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살인미수까지 포함하면 568. 공식적으로 신고한 수치가 이 정도니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들은 왜 아내와 여자친구를 죽이거나 죽이려 했을까. 체포된 남자들이 경찰서에서 자백한 이유는 위와 같습니다. 잠자는 데 불을 켜서...

 

그들은, 자신이 남자라는 이유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당연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누리지 못했다 여겼을 때 여성을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들의 막무가내식 보복은 마치 천부인권을 행사하듯 약하고 만만한 여성을 상대로 너무도 쉽게 자행되었지요.

 

오랫동안 가정에는 폭력이 없을 것이라는, 가정은 휴식처라는 이데올로기와 맞서며 결국 여성이나 아이처럼 가족 안에서도 입장이 약한 사람에게 괴로움만 강요해 가는 꼴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라 주장해 왔던 작가 덴도 아라타가 이 소설 젠더 크라임을 쓴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일본에서 덴도 아라타가 주목받은 것은 1996. 그 해에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이후 과작임에도 발표하는 소설마다 평단의 찬사와 함께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지요. 무척이나 예리한 감각으로 세부를 들여다볼 줄 아는 작가라는 것이, 제가 덴도 아라타로부터 받은 첫 번째 인상이었습니다.

 

학교 폭력, 성범죄, 아동학대와 같은 사회 문제는 그 배경에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그것은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다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전적으로 가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며 결국 가족이 화목해지면 만사오케이일 거라는 식의 암묵적인 동의가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해 있었던 모양입니다.

 

괜찮아, 어쨌든 가족이니까, 아버지를 중심으로 질서가 잡히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여기저기 엇나가지만 않으면 평화롭고 안전해……, 와 같은 말만으로는, 결국 여성이나 아이처럼 가족 안에서도 입장이 약한 사람에게 괴로움만 강요해 가는 꼴이 되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라고, 어느 인터뷰에서 덴도 아라타는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피해자의 위치에 서서 예리한 감각으로 글을 써내려 갑니다. 예컨대 일본 문단 최대의 사건으로까지 불린 영원의 아이는 학대를 받아 깊은 상처를 입고, 자신을 최초부터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아이들이 주인공입니다. 작가는 열두 살 소녀에게 가해진 폭력과 같은 또래 두 소년이 겪어야 했던 학대를 추체험하는 정신적 작업을 3년에 걸쳐 지속했는데 훗날 솔직히 내가 죽는 게 먼저인가, 이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는 게 먼저인가,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한 바 있어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도는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애도하는 사람의 경우, 주인공 시즈토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는데 그녀의 내면을 쓸 때는 3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암시를 걸었다더군요. “그랬더니 실제로 배가 콕콕 쑤시고 아팠다. 큰일이다, 진짜 암에 걸렸나 보다, 라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두려웠다고 합니다.

 

덴도 아라타가 사회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남녀 차별과, 성차를 둘러싼 암묵적 양해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25년 전. 영원의 아이에서 아동학대를 소재로 글을 쓰던 중에, 사람을 학대하는 행위의 배후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였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젠더 문제에 대해 말해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언어화할 만큼의 기술도 없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던 모양이에요. 그 뒤로 꾸준히 젠더에 관한 책을 읽었고 어느 순간 갑자기 톱니바퀴가 돌아가더니 남성적 사고방식이 짙게 배어 있는 경찰 조직을 무대로 성범죄에 맞서는 작품의 얼개가 떠올랐다네요.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불법 촬영, 동의 없는 성행위, 전 연인의 스토커 행위, 불특정 여성을 노린 범죄를 수사하던 경시청의 마초경찰관이 성차가 만들어내는 세상의 불균형과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차별을 하나씩 발견해 간다는 내용입니다.


이 경찰관과 함께 스스로의 관점도 바뀌었다는 작가 덴도 아라타는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번 공고한 벽에 부딪쳤지만, 그때마다 세계는 한 번에 바뀌지 않으니까 작은 것부터 하나씩 바꾸자고 다짐했다더군요. 세계를 바꾸기는커녕 제 앞가림하기에 바쁜 저도 이 소설을 읽고 다짐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동의 없이 타인의 몸을 만지지 말고 성적인 말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말자. 그리고, 죽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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