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말
김정란 지음 / 북스피어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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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광흥창역에 있던 범우사는 오래된 학교를 개조해서 출판사 건물로 사용했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운, 낡은 구조물이다. 외벽을 장식한 등나무 때문에 밤에는 늘 벌레가 들끓었다. 그 건물 옥탑에서 나는 『아발론 연대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책의 처음을 얘기하려면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발론 연대기』는 당초 아웃사이더 출판사에서 『아더 왕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아웃사이더는 홍세화 선생, 노혜경 시인, 박노자 교수, 진중권 선생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여 사회과학 성향의 잡지를 펴냈지만 사정이 좋지 않았는데 말미에 타개책으로 선택한 단행본이 『아더 왕 이야기』였다. 편집위원이던 김정란 시인이 기획과 번역을 맡았고 나는 편집을 담당했다. 

이 책은 아더 왕의 탄생부터 마지막 전투에서 그가 죽기까지, 아더 왕국에서 벌어졌던 원탁의 기사들의 모험을 연대기 형식으로 써내려간 '판타지 소설'이다. 비슷한 시기에 각광을 받던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처럼 켈트신화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책이 출간되었을 때 독자와 언론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출판사의 누적 적자는 임계점에 다다라 있었고 『아더 왕 이야기』만으로 키의 방향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대표의 일신상 문제까지 겹치며 출판사는 잠정 폐업했다. 이에 따라 총 8권으로 예정된 『아더 왕 이야기』도 4권에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깝다, 어떻게든 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을 가진 편집자와 번역자는 뜻있는 투자자의 도움을 받아 새롭게 책을 펴내기로 의견을 모았다. 북스피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북스피어 출판사의 첫 책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아발론 연대기』였다. 넉넉하지 않은 자본으로 시작한 출간 작업은 예상보다 지난했다. 

워드프로세서와 친하지 않았던 김정란 선생은 3320페이지, 그러니까 200자 원고지로 10,000매가 훌쩍 넘는 분량을 전부, 일일이, 하나하나, 이면지에 손으로 썼다. 『아발론 연대기』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연필로 번역한 이면지가 점점 쌓여 마침내 천장까지 가닿는 바람에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걸 타이핑하는 데만 꼬박 석 달이 필요했다. 여덟 권을 한꺼번에 펴내려니 편집은 물론 제작도 만만치 않았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작업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2005년 12월 19일. 그해 봄부터 여름, 가을을 거쳐 눈이 내리던 겨울까지 꼬박 일 년 가까이 이 책 하나만 붙잡고 있었던 셈이다. 떠올리니 아득하다.

그리고 올해 여름, 13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김정란 선생과 만난 점심식사 자리에서 그동안 모은 에세이 원고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상지대에서의 교수 생활을 마감하며 책으로 냈으면 싶은데 어떨까 하는 얘기를 듣자마자 북스피어에서 내자고 말씀드렸다. 제 손으로 잘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 라고. 필력이야 아웃사이더 출판사 시절부터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하여 <여자의 말>이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펴냅니다. 가, 갑자기 왜 시인의 에세이를? 하고 의아해하시는 형제자매님들은 서점에서 한 챕터만 읽어봐 주시길.

마포 김 사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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