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 우리의 판단을 뒤흔드는 복음에 관하여 로완 윌리엄스 선집 (비아)
로완 윌리엄스 지음, 민경찬.손승우 옮김 / 비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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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의 심문 장면은 주의 깊게 보지 않고, 크게 생각해 본 적 없이 빠르게 넘어간 장면이다. 예수님의 심판은 중요하지 않게 느꼈고, 내 눈은 빠르게 십자가와 부활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엄중하며, 긴박하며,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심판대에 예수님이 서셨다. 저자는 우리에게 질문한다. 심판대에 누군가 세우는 사람이 될 것인지, 심판대에 서는 자가 될 것인지, 어느 편에 서 있는 지 긴박한 대답을 요구하며 묻는다. 그 질문에 나도 답을 해보게 된다.

내가 다른 이들로 하여금 무가치하게 여겨질 수도 있고, 어리석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나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가?
아니다. 나는 셈이 빠른 편이다. 적당한 태도를 취할 뿐 분명히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매일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와 부활, 그리스도의 구원 등 머리로 알고 습관화 된 지식과 종교성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니다. 쉽게 나의 행위에 만족하고, 쉽게 말로만 떠들어 버리는 것이 나다.

십자가에는 성역이 없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소외된 이들을 향하여 먼저 다가가셨다는 것이 반가운 이야기로 들리고 그 삶에 동참하고 싶은가?
아니다. 익숙한 관계에 머무르고, 포기하고 멀리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세상의 체제를 유지하는 폭력과 거짓의 방법을 거부하고, 창조주를 바라보고 그분의 왕국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다. 무언가 지켜내기 위해서 폭력과 거짓을 불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고, 예수 그리스도를 묵묵히 따라 살아가는 것이 미련하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나는 심판대에 서지 못하고 주저하며 많은 생각에 잠긴다. “대충 잘 살고 있으니 괜찮다.”고 여기던 잠잠한 연못에 파도가 일만한 큰 돌이 던져졌다. 나는 정말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가.

진정한 자유의 길은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길이다. 삶의 많은 상황들이 나를 심문해 올 때, 죽음을 불사한 그리스도와 많은 순교자들 처럼. 덤덤하게 ‘이 말’을 던질 수 잇는 나의 삶이 되도록 현실을 끌어 안고 그리스도 편에서 살아가고 싶다.

“저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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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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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여행을 다녀본 경험을 떠올리면 30여년의 삶을 살았지만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여행을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새로운 곳에 방문하고, 신문물을 접하는 것에 상당히 열려있는 편이다. ‘그러면 왜 여행을 안갔나요?’라고 묻는다면, 두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다.

먼저는 돈이 없었다. 여행은 돈이 많이 필요하다. 왕복 이동을 하면서 길에 돈을 뿌린다. 그리고 여행지에 가면 맛있는 것을 먹으며 몸에 돈을 뿌린다. 그리고 숙소에서 잠을 자야하기에 깨어있는 순간부터 자는 순간까지 돈이 필요한 것이 여행이다. 그런데, 그럴만한 돈이 없었다. 돈이 있어도 손이 떨려서 못 썼다.

두 번째 이유는 시간이 없었다. 돈이 생기게 되니 시간이 없다. 한 가지 일을 끝내면 다음 일들이 밀려온다. 처리해야 할 일들, 갑자기 끼어든 일들, 일을 하면서 꼬리물듯 딸려오는 여러 일들을 처리하다보면, 하루, 한 달, 일년이 금방 지나간다. 몰려오는 일들을 피해서 콧바람을 쐬는 것도 손이 떨려서 못했다.

그래서 많은 베스트셀러 책 중에 이 책을 골라서 사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여행을 많이 다닌 사람이 정의하는 여행은 어떤 의미인지가 궁금했다. 여행은 우리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

책을 보면서 가장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에서 데이비드 실즈는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내 인생과 나의 삶을 돌아보면, 안전하다고 느끼는 내 집, 내 공간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가장 편한 곳이지만, 가장 불편하고 숨이 막힌다. 그곳에 있으면 내가 받았던 고통들이 떠오른다. 그 사각형 공간 안에서 구석에 쭈그려서 울던 기억들. 벽에 파인 홈들. 나의 수치심이 떠오르는 공간. 그 공간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듯하다. “넌 원래 이런 사람이야. 그냥 이렇게 살아. 그게 너야.”

그 공간으로부터의 도피, 탈출이 필요하다. 그래야 그곳에서 다른 이로 살아갈 수 있다. 근래에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집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살았다. 고등학교 입학 이후에 가장 오랫동안 한 공간에서 살고 있다. 6년째 이곳에서 지내면서 이곳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공간에도, 나에게도 새로움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공간의 분리가 필요하다.

책을 보며 느낀 한 부분에 대한 딥한 생각을 나눈 것이다. 나의 현재의 상황을 책을 보면서 깨닫는다. 여행을 가야겠다. 어딘가로 말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잠시 분리되는 시간을 갖기로 다짐하게 된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의미로부터의 벗어나서, 이 의미들이 무엇인지 돌아볼 시간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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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깊은 샘 (반양장) - 고대 교회에서 현대까지 영성으로 읽는 기독교 역사
제럴드 L. 싯처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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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피조세계를 향한,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러브레터를 적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영성의 깊은 샘’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러브레터가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순전하고 진실되고 뜨거운 사랑의 모습들을 만났다. 드러나는 모습은 다양하다. 수도원 생활을 하기도 하고, 이 복음을 전하려고 자신의 삶을 바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목적으로 자신의 온 삶을 내어 맡겼다.

책의 많은 부분들이 도전이 되고 좋았지만 그래서 이 책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말하는 결론 부분이 좋았다. 우리는 ‘과정’을 살아가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 우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과거의 모습이 공존한 채로 살아간다. 그렇기에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한 발짝 한 걸음에는 실패의 흔적들이 많다. 우리의 연약함과 과거의 본성이 우리를 붙잡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과정을 살아가는 지친 마음에 격려를 해준다. 믿음의 옛 선배들의 삶도 실패로 얼룩진 듯 보이지만,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지향점이 있었기에 그들은 점차 변화되었고, 자신을 넘어 다른 이들의 삶을 세우는 자로 살았다. 그렇기에 우리도 충분히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17세기 수도사 로렌스 형제를 통해서 삶의 지혜를 얻는다. “우리의 성화는 우리의 일을 바꾸는 데 달려 있지 않고, 대개는 자신을 위해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 하는가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 가는 가장 탁월한 방법은... 일상적 일을 하되, 인간을 기쁘게 하려는 시각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일상을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매일의 순종의 삶이 ‘지금, 여기’의 우리의 삶을 역사의 현장이 되게 할 것이다.

책을 펼치면서 닫은 후에도 계속해서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나는 어떤 삶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갈 것인가?’ 나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되기를 원한다. 매일 그분의 사랑을 향유하고, 모두가 그 사랑을 누릴 수 있도록, 나의 삶을 드리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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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인 ‘하나님은 누구를 사랑하실까?’. 두 돼지 로먼과 시드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행위로 사람을 평가하고, 평가 받는 것이 뿌리 깊게 남아 있다. 어릴 적부터 우리에게 학습된 가정과 학교, 친구 관계 안에서 주어진 많은 경험들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지 않을까. 그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알지만 모르는 것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그런 우리에게, 그리고 어린 친구들에게, 두 돼지 이야기는 충분히 좋은 이야기이다. 아이가 생긴다면 아이가 사랑하는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이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되새기고 싶다. 아침부터 뒹굴다가 엄청나게 심한 피로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던 나, 깨어서도 이것저것 하다 또 다시 잠든 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 사랑으로, 오늘도 충실히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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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과 천국 - 세상을 뒤집은 골로새서 다시 읽기
브라이언 왈쉬 & 실비아 키이즈마트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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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매 해마다 하는 다짐을 또 해버렸다. 그저 막연한 다짐으로 남을 수 있었던 상황에서 중희와 대화하다가 둘이서 책모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 기억한다. 첫 날에 기분 좋은 뽕을. 모든 책을 다 읽고 씹어먹을 수 있을 거 같았던 그 날을 말이다. 그렇게 결정된 책은 ‘제국과 천국’이다. 절대 스스로는 읽기로 작정하지 않을 책이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책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두 나라의 대립이 어떤 식으로 그려질지 궁금하기도 했다.

‘제국과 천국’은 골로새서를 토대로 이야기한다. 우리의 눈이 가리워져서 쉽게 알 수 없지만, 로마의 제국과 같이 우리 사회에서도 포스트모더니티의 힘을 얻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커져가는 세계적 자본주의 제국이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형태가 없는 제국에 속해서 제국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내가 가진 것이 나의 가치를 드러내는 것처럼 말하는 시대이다.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분에 넘치는 사치를 하는 시대이다. 그것에 쉽게 투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존재감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티 사회에서 인간은 하나의 진리나 명제, 체제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탈’을 꿈꾸고 실행한다. 그러나 ‘탈’이 있다면 ‘입’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거대 서사(Meta-narrative)에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할지 몰라서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간다.

아무튼. 기독교가 어떻게 제국에 눈이 먼 사람을 깨울 수 있을까.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거대 서사에 자신을 맡겨 살아갈 수 있을까. 골로새서를 통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의 제국으로부터 ‘탈’하여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거대 서사에 자신의 삶을 걸었는지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참 진리를 맛보았다. 참 진리는 어떤 명제나 글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로 구현된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을 통해서 참 진리를 맛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사는 교회가 있는가. 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을 보았거나 그렇게 살고자 분투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이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 그리고 직접 보고 경험하는 기독교 공동체는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만 사랑받고자 하고,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것을 움켜쥐려 애쓴다. 적당히 개인 신앙생활을 하고자 대형교회로 쏠리고 있고, 돈에 눈이 멀어 세습을 강행하는 교회들도 많다. 성적인 타락으로 실망감과 분노를 사는 목회자들과 교회 안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 하나님은 좋은데 교회는 싫은 ‘가나안 성도’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가 놓친 것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를 깨닫지 못했고, 그것이 교회 안에 어떤 식으로 녹아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보지만, 말씀이 우리를 온전히 사로잡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책을 보며 회개하게 된다. 나는 세상에 관심이 크지 않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이면 그만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세상을 벗어나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받고 있음에도 세상을 보지 않았다. 말씀에 푹 잠겨서 우리의 상상력이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게 하고, 세상의 흐름을 분별하여서, 세상과는 다른 어떤 구체적인 삶을 살아갈지를 계속 고민하고 살아가야겠다. 세상의 풍조와 말씀이 말하는 지혜를 보는 눈과 보고 꿈꾸는대로 실제 살아가는 부지런한 손발이 필요하다.


> 18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 19 피조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 20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 21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 22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23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8-25 (새번역)

깨어져 울부짖는 창조세계에 대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이 부어지기를 소망해본다. 그리스도 안에서 제국으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 안에 속하여 세상에 다름을,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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