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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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이전에 존재하던 세계가 있다. 눈물의 따뜻한 감촉,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분노, 의미 없는 소리로 이루어진 중얼거림, 온몸을 녹여버릴 것 같은 대자연의 침묵, 생목이 치밀 때 입안에 감도는 씁쓸함 같은 것들. 그곳은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121)' 화엄의 세계다. 사물에 질서와 개념을 부여하는 추상화된 언어체계가 없었으므로 모든 존재는 거기 그냥 있는' 사물에 불과했다. 기쁨과 슬픔, 권태와 노여움, 너와 나, 인간의 이성과 감성은 따로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였다.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69)’이었고, ‘모국어에서 빛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69)’ 것처럼.






하지만 언어의 생성으로 말미암아 원초적 감각의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모든 언어는 하나의 세계관이며, 세계관은 복잡다단한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이다. 언어가 이렇듯 세계를 범주화하는 체계, 우열과 피아를 가리기 위한 도구로 기능하면서, 세계는 비로소 이름을 가진 존재와 감정들로 새롭게 태어났으며, 인간사는 온갖 거짓과 낭만, 불가사해한 욕망과 환희로 어지럽게 점철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분명히 두 귀로 언어를 들었지만, 두텁고 빽빽한 공기층 같은 침묵이 달팽이관과 두뇌 사이의 어딘가를 틀어막아주었다.발음을 위해 쓰였던 혀와 입술, 단단히 연필을 쥔 손의 기억 역시 그 먹먹한한 침묵에 싸여 더이상 만져지지 않았다. 더이상 그녀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말을 배우기 전, 아니, 생명을 얻기 전 같은, 뭉클뭉클한 솜처럼 시간의 흐름을 빨아들이는 침묵이 안팎으로 그녀의 몸을 에워쌌다.”

 

그리고 여기 언어를 잃어버린 쓸쓸한 여자가 있다. ‘그것'은 그녀가 열 일곱 살이 되던 해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그녀를 덮친다. 그녀는 굴하지 않고 악착같이 공부한 끝에 대학을 마치고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는다. 하지만 남편과의 이혼에 이은 양육권 소송 패소로 큰 충격을 받고, 급기야 다시 찾아온 실어증에 직장까지 그만둔다. 기댈 곳이 없어진 그녀는 어린시절 한글의 음운을 처음 접했을 때의 환희를 떠올리며 사설 아카데미의 희랍어 강의를 수강한다. 그녀는 뱃길마저 닿지 않는 소도(小島)였다. 가끔 찾아오는 딸과도 그녀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 없었다.

 

타인과 일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없게 된 그녀는 내면으로 한 없이 침잠한다. 더불어 주변의 사소한 사물들과 풍경들이 그녀 안으로 흘러들어와 또 다른 풍경으로 탄생한다. 내밀한 자신만의 정원에서 그녀는 한 없이 고독하고 순수하다. 누구도 말 걸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말 걸 필요성 없는 완전한 언어적 단절로 그녀는 예리하게 벼려진 감성의 촉수를 얻었다. 단조로운 일상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소리와 풍경들, 시시각각 떠오르는 꿈같은 상념들은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위무하고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이다. 명상에 젖은듯 고요하고, 꿈결을 거니는듯 몽환적인 서술이 지나친 감상이 때때로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호함은 의미가 명확하게 분절되지 않은 희랍어 그 자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히키코모리처럼 살아가는 그녀는 희랍어 강의를 들으며 한 남자와 만난다. 15살에 독일로 떠나 희랍어를 전공하고 서른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남자와 실어증과 이혼을 거쳐 고독한 돌싱으로 돌아온 두 여자. 이 둘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결핍이다. 남자는 시각을 점차 잃어가고, 여자는 언어를 상실하였다. 남자의 옛 연인은 37살의 나이로 요절했고,여자는 남편과 이혼한 뒤 양육권을 박탈당했다. 흔치 않은 종류의 결핍이 호출하는 묘한 동질성. 하지만 이 동질성은 언어를 통한 과거의 공유'가 아니라 남자의 일방적인 고백과 그것에 감응하는 여자의 내면을 거치며 탄생한다. 남자는 아카데미 지하에 넘어져 있던 자신을 부축해 집까지 데려다 준 여자에게 담담히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아직은 낯설지만 누군가를 특정한 잣대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줄 것 같은 한 여자가 눈 앞에 앉아 있다. 자신의 말을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붉게 생채기 난 말들이 끊임없이 나와 꼬리를 물고 그녀의 귀로 흘러들어간다. 여자는 그와 눈을 맞출 수도,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쳐줄 수도 없다. 홀로 견뎌내던 상처의 무게를 누군가와 나누는 일이 그녀에게 너무나 낯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지독하리만치 신산하고 외로웠던 과거를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여자는 자신의 고통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언어로 매개되지 않은 감정, 침묵의 소통을 통해 사랑이 이성과 논리를 단숨에 뛰어넘어 화살처럼 서로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자는 언어를 되찾는다.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191)” 부재와 결핍이 언어적 소통이 부재하는 일방적 말하기와 일방적 듣기로 충족되는 구도는 희랍어에 존재하는 제 3의 태로 성립하는, 고대 그리스 신화와 같은 시원적 사랑에 대한 희구이자 묘시인 것만 같다. 그 과정이 다소 모호한 이미지로 불분명하게 그려져 있기는 하지만.

 

영화 <밀양>에 이런 장면이 있다. 전도연이 딸을 죽인 유괴범을 면회갔을 때 유괴범이 자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고,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전도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은 그 사람을 결코 용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느이 자기 마음대로 그 살인마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한다. (대충 그런 내용인 걸로 기억한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개별적 고통, 그것을 거짓표정과 알량한 동정의 말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으며, 누구와도 타협 불가능한 문제란 게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조차 뛰어넘을 수 있는 제3의 관계라는 게 어쩌면 존재할 수 있을지도 모름을 한강은 이 한편의 소설처럼 긴 시, 시처럼 함축적인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문장이 내게 선물한 사랑의 가능성에서 오늘 밤 자유로이 유영하며 잠들고 싶다.

 

문학계의 젊은 마이스터로 불리는 한강의 역량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강의 문체는 구름의 흰빛을 한올한올 풀어내 펼쳐놓은 듯 부드럽고 사랑스럽지만, 그저 쓰다듬고 넘어가기엔 그 감촉이 예사롭지 않은, 그래서 자꾸만 이것의 정체가 뭘까, 하고 더 만지게 되는 매력이 있다. 혹자는 이 소설이 인물, 사건, 배경을 이끌고 가는 서사의 역동성이 부족하지 않나,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문체가 심히 시적이고 감상이 과잉으로 치닫고 있는 점이 오히려 인물의 심리 변화를 제대로 헤아리기 힘들게 하는 듯도 하다. 하지만 읽을수록 곱씹게 되는 이 아름다운 서술이 이 모든 걸 압도한다고 말한다면 과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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