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BL] 눈가리기 [BL] 눈가리기 1
이미누 지음 / 시크노블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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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연령이 낮은 데다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오랫동안 학대에 노출된 탓에 자기 환상을 충족시켜 줄 '아빠'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슬프도록 순수한 심신 미약공 정윤과 학창시절 질 나쁜 남학생들에게 몹쓸 짓을 당한 트라우마로 자기 학대를 수없이 반복하며 살아 있는 시체처럼 지내온 해원.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정신이 망가진 주인공들이 서로의 존재로 위안 받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어둡고 피폐한 내용 때문에 취향 탈만 하지만 두 사람이 겪었던 끔찍한 일들을 디테일한 장면으로 보여주는 전개는 아니라서 감정 소모는 심하지 않은 편이다.


초반에는 살인범인지도 모를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온 해원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거기다 처음 보는 타인을 '아빠'로 착각하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사람을 애완동물처럼 사육하다니. 정윤만큼이나 정신이 망가져버린 해원의 캐릭터를 알고나서야 그의 비상식적인 행동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과거의 트라우마로 자기 학대를 반복하던 해원은 삶에 큰 미련도 없었기에 정윤이 위험한 살인범이라 해도 상관 없었을 테고, 동질감이 드는 상대에 대한 관심에서 나온 충동적인 행동이었을 것이다.


" 내가 조금 불안해 보였어? 아파서 그런 게 아니야.

여기가 망가져서 그런 것뿐이야. 너만큼이나."


정윤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을 알고는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홀로 세상과 맞서야 했던 자신의 모습을 겹쳐보며 맹목적일 만큼 순수한 정윤이 더 이상 상처를 받지 않고 원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지켜주고 싶었을 해원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인지 능력이 부족해 혼자 세상을 살아가기 힘든 정윤에게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다정한 '아빠'의 존재가 절실했고, 방부 처리 잘 해 놓은 시체와도 같았던 해원에게 정윤은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었으니 두 사람은 필수불가결의 공의존 관계였던 셈이다. 


' 괜찮아, 이제 나랑 살면 돼. 나는 널 버리지 않을게.

네 곁에서 없어지지 않을게. '


자기 불리한 것은 다 잊고 눈을 가린 채 살아가려는 정윤에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네 방식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해원이 말해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역시 스스로의 눈을 가리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 망가진 사람은 절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정윤의 선택을 이해했던 해원. 정상적인 모습은 아닐지라도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당사자들을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든다면 그들만의 방식대로 살아가길 선택한 두 사람을 비겁하다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 과거를 극복하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그런 건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나 하면 돼.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충분해. " 


" 병증 또는 장애란 건 말이지, 본인이 불편함과 불행함을 느껴야만 성립되는 거야. 특히 정신적인 측면이라면 더더욱."

" 애초에 그 미쳤다는 것도 네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 요컨대 문제는 이거야. 본인이 지금 상태에 만족하고, 충분히 행복을 느끼고, 본인의 장애를 보조할 수단이 있다면, 굳이 인간이 정상인으로서의 삶을 갈망해야만 할까. "


이미 한 번 망가진 사람은 절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과거의 해원이 그랬고 미래의 정윤 또한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망가진 모습 그대로 행복과 안식을 찾는 수밖에 없다. (중략)

망가진 사람끼리 서로를 끌어안고 따뜻함을 추구할 수 있다면, 이 애는 변하지 않아도 조금도 상관없다.

- 『눈가리기 』본문중에서 


비틀린 소유욕으로 인한 범죄를 정윤의 탓으로 돌리며 어설프게 자기 합리화하던 비겁한 서브공 때문에 열받기도 했다. 해원을 말마따나 스스로의 목적이 순수하다고 믿고 있을 뿐인 '상상 이상의 쓰레기'. 인지 능력이 부족한 정윤을 이용하려는 더러운 인간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그를 잘 이해하고 보호해 줄 능력을 갖춘 해원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정윤의 행복을 바라는 해원의 진심이 전해졌기에 '아빠'만을 찾던 정윤도 조금은 성장했을 것이고, 맹목적인 신뢰와 애정을 퍼붓는 정윤 덕에 해원도 따뜻한 감정을 되찾았으니 천생연분! 어쩌면 서로의 슬픔을 감당하지 못해 힘들 때도 있겠지만 함께 있는 한 두 사람은 괜찮을 것이다.


당신과 함께라면, 눈을 돌리지 않고

조금 더 많은 것들을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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