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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BL] 언어의 거리
선명 / 시크노블 / 2017년 10월
평점 :
판매중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독특한 설정의 책인데 작은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두 소년의 순수하고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를 담아내어 예쁜 동화 한편을 읽은 느낌. 자극적인 장면이나 19금 베드신을 배제한 소프트 BL이라 입문용으로 추천할 만한 책이다. 사랑에 대한 판타지적 설정도 흥미롭고 갈등구조가 단순한 빠른 전개라 몰입해서 금방 읽을 수 있었지만, 잔잔한 분위기라 심심하다 느끼는 분들도 있을 듯하다.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보다 친구들에 대한 우정과 의리가 우선이었던 멋진 친구 정민이 좋았던 책.
출판사의 책 소개글은 그저 사랑의 은유적 묘사이라 여겼기에 초반 책 속의 세계관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초반부터 사랑에 대한 독특한 세계관 설정을 설명해줬더라면 더 좋았을뻔했다. 목소리와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책 속에서 벌어진 여러 현상에 대한 의문은 해소되지 못했고, 아이러니하게 그런 불친절함은 책을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목소리가 말이 사랑의 절대적인 법칙이 되는 세상인데,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여태까지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없었다.
오직 소리로서 들리는 목소리가, 말만이 절대적인 기준이었다.
언어가 우리의 거리를 벌린다.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단지 말이냐, 수어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사람들은 그 둘이 아닌 다른 것들, 글이나 구화나 표정 같은 것으로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무수하다. 말이라는 건 그냥, 언어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까 고작. 고작 언어일 뿐이다.
고작 목소리 따위.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떻게 목소리를 냈는지, 그 내용이나 방법이 아니라 단지 그 존재의 여부일 뿐인데.
고작 그따위 것들이 사랑을 혼동하게 한다. 사랑을 부정하게 한다.
생각해보면 책 속처럼 말을 잃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세상에서도 '언어'는 절대적인 법칙 인지도 모른다. 고백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도 그 사랑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지 끊임없이 여러 형태의 '언어'로 확인받기를 원하니까. 언어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고, 거짓으로 꾸며낼 가능성이 있음에도 사랑 확인에 있어 언어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 언어의 거리 >는 명쾌하지 않는 기준에 연연하여 서로에게 소홀하지 말고, 가장 중요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메시지인지도.
법칙에서의 사랑의 기준은 명쾌할지 몰라도,
사랑은 결코 명쾌한 게 아니었다.
모든 게 명쾌하기를 바랐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부친이 군인이라 발령지에 따라 함께 옮겨 다녀야 해서 이사가 잦았던 하윤. 새로 이사 간 강원도의 시골 마을에서 만난 이웃집 소년 영림에게 자꾸만 시선이 간다. 운명처럼 같은 반 짝꿍이 되었고 명랑하고 붙임성 좋은 영림과 그의 절친 정민 덕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삼총사가 되어 어울려 다닌다. 늘 세명이서 붙어 다니지만 하윤의 온 신경은 영림에게 집중되었고, 그 감정의 정체를 자각할 무렵 확인 사살처럼 어느 날 갑자기 영림에게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특정 상대에게만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공개적인 고백과도 같았다. 문제는 사랑에 빠진 상대가 같은 반 친구고, 남자라는 것이다.
지구에서 말을 잃는다는 것은 곧 사랑을 뜻했다.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상대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세계.
사랑을 말할 수 없기에 마음을 숨길 수 없는 아이러니.
사회통념상 쉽게 용인되지 못하는 동성애. 하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웃팅과 다름없는 커밍아웃 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영림에 대한 사랑을 숨기기로 한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영림조차 동성의 사랑 고백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어 두려운 하윤. 한편, 영림은 어느 날 갑자기 말 한마디 없이 자리까지 바꾸면서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하윤의 냉담한 태도에 상처받는다. 절친인 정민의 위로에도 채워지지 하윤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져 우울한 영림.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이후에도 두 소년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영림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하윤에 비해 사랑의 절대적인 기준을 말과 목소리로 판단하는 영림으로 인해 둘 사이에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서 갈등을 겪게 된다. 어린 나이라 무섭고 두려웠을 텐데 고정관념의 틀을 깨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신들의 소중한 사랑을 지켜내려 노력한 영림과 하윤이 기특하고 예뻤다.
처음으로 사랑하게 된 상대가 하필이면 같은 반 남학생이었기에 더 서툴고 혼란스러웠던 영림과 하윤. 그들의 사랑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고, 아직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어린 주인공들이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부딪혀 겪게 될 수많은 시련과 갈등이 걱정되기도 했다. 쉽지는 않겠지만 행복하게 잘 살았을 거라 믿고 싶은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영림과 하윤도 그들의 예쁜 사랑을 앞으로도 계속 잘 지켜 나갈 거라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