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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리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물 네살이나 위인, 누누(유모) 라고 불리는 엄마 친구와 스물 네살이나 아래인, 소년이었을 때부터 알던 셰리의 관계를 처음부터 마음 속 깊이 이해하고 동의하기는 어려웠지만 사랑의 시작과 종말까지의 감정선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둘 사이의 사랑의 끝의 원인은 나이의 차이도, 셰리의 결혼도 아니었던 것 같다. 셰리의 결혼 후 도망치듯 떠난 레아의 여행도, 그 여행으로 인한 셰리의 방황도 아니었다. 재회 후 레아가 셰리에게, '네가 내 사랑, 소중한 사랑이라는 걸, 일평생 단 한 번뿐인 사랑이라는 걸' 고백하는 순간 파국으로 달려간다. 사랑의 절정에서 나온 고백은 셰리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이었을 테고 미래를 계획하는 레아의 말이 뒤이어질 수록 그들의 빛나는 사랑은 빛을 잃어 갈 뿐이었다.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라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싶었다.
1920년 출간된 소설이지만 백년 사이의 시간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파격적이고 인물간의 감정이 섬세하게 표현된 소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늙음을 자각하고 마음의 허무를 메우기 위해 '카드, 와인, 브리지게임 칠판, 뜨개바늘, 집안의 구멍을 메울 온갖 장식품과 괴물을-늙은 여자를- 수습하는데 필요한 온갖 것들을 사러 가자'고 한 레아가 바로 그 뒤 여성성과 젊음을 부여잡는 것과도 같이 '무수한 드레스와 실내가운을 사고 발톱, 손톱 관리사, 안마사를 집으로 부르는' 장면은 왠지 현대인인 나와 별다를 게 없어보였다.
표지의 사진에서 느껴진 것과도 같은 갈증같은 갈망도 레아가 자신을 본문에서 '여자 흡혈귀'라고 칭하는 것과도 너무 잘 어울렸다. 소설에서 계속 수려한 외모가 나오고 묘사되는 건 셰리일 지라도, 마지막에 뇌리에 남은 것은 사진에서처럼 레아의 푸르고 텅빈 두 눈일 것 같다. 정말 강렬한 소설, 강렬한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