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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평점 :
‘나는 방 안에 들어가서,
죽은 남자를 찾았고,
그 사람과 대화했고,
그의 비밀을 끄집어냈다.‘
퀴어의 서사는 아직 낯설지만,소설속 두 남자의 이야기는 왜이렇게 철학적인건지. 마지막 장을 덮을때는 무언가 슬퍼지고 죽음의 도래앞에 선 이의 말과 행위에 먹먹하기까지 했다. 표지와 제목부터 묵직했던 책, 주인공 후안(너무도 위트있고 철학적인)과 네네(주인공 이름은 끝내 밝혀지지않고)로 불리는 두 남자의 만남은 그리스 철학자와 제자의 모습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팰릭스 후안의 집으로 네네가 찾아온다. 후안은 자신이 죽으면 팰릭스에 남아있는 자기방을 넘겨받으라고 한다. 그리고 한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프로젝트를 완성해 달라고 유언처럼 부탁한다. 네네는 후안과 지내며 그의 프로젝트의 비빌들을 하나씩 대화하듯 주고 받는다. ‘당신이 했던 말때문이 아니라 내 말을 듣던 방식 때문이예요. 바짝 귀를 기울였죠. 때로는 눈을 꼭 감고, 불편할 만큼 한참이나 그대로 있었죠. ‘ 그들은 한편의 영화이야기를 하듯이 , 동물들의 우화를 나누기도 하고 끊임없이 어떠한 자료를 토대로 그들의 끈덕진 기억들을 나누게 된다. 서로의 말을 듣는 그들의 태도와 행위가 위트하면서 너무 고급스러웠다.
후안이 프로켁트 자료로 네네에게 건네준 것들이 신비로웠다. 종이조각, 신문에서 잘라낸 기사들, 사진들, 손으로 쓴 메모들이 들어 있는 파일 폴더. 그리고 페이지 대부분을 시커멓게 칠해 지운 두꺼운 책 두 권. 이 책의 제목은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라는 제목으로 출간 된 연구서다. 이 책은 후안이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중간중간 지워진 짧은 시와 관찰들로 변해있었다. 저자는 1930년대, 퀴어 사회학자 잰 게이로 3백명이 넘는 동성애자를 상대로 그들의 삶과 욕망에 관한 증언들을 수집했다. 이 방대한 연구는 오로지 권위있는 남성 의사의 이름으로만 출판 할 수 있었다. 세상에 꺼내놓으려했던 이 증언들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암전들]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안은 죽음을 앞두고 자기 세대에서 완성할 수 없었던 이 기록물을 네네의 세대로 옮겨주고 싶은것이다.
’우리가 가진 이 책, 내가 찾아낸 모습 그대로 새까맣게 지워진 이 책이 더 좋아. 깨달음의 짧은 시들로 가득한 이 책 말이야. 책을 순서대로 읽는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어? 아무 페이지나 열어젖히면 그 속에 과거로부터 솟아오른 어떤 삶의 스케치가 끝없이 펼쳐지고, 그 하나하나가 등장한 인물이 그그복했거나 극복하지 못했음을 토로하는 단 하나의 증언인것을.’(p117) 책은 대부분 검은색 마커팬으로 죽죽 뒤덮혀 있고 남은 글자들은 무질서하게 공간이 벌어져있어 삭제된 텍스트만으로는 읽기조차 어려워보인다.( 삽화 참조) 그래도 후안은 퀴어의 정체성이 담긴 그 증언들을 그냥 어둠속으로 사라지게 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쓴 저자는 [암전들]은 허구라고 한다. 소설을 읽다보면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어디서부터 실제인물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책속에 들어가 있는 삽화나 사진을 보면 실제 인물같기도하고 서사는 있었을까싶은 허구같기도 하다.침묵을 강요받은 시대에 별종이라 불린 그들의 정체성을 연구한 이 자료는 이대로 사라지면 안될듯했다.
후안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너를 위해 여기까지 짊어지고 왔다.‘라고 말하며 거울을 가져다 달라고 한다. 네네는 유리가없는 텅빈 틀을 들어 보여준다.(그의 죽음의 모습을 보여줄 수 없는듯)후안은 ‘네가 얼굴이 되어다오’라고 말하며 거울틀을 들어 마지막 입맞춤을 한다. 네네는 모든 자료들을 모아 조금씩 책을 만들어 간다. 저자는 네네인듯 후안인듯 아니 잰 게이인듯 말한다.’ 모호한 것이 모조리 해소될 필요는 없다‘고. 암전들로 사사라지지 않는 그들의 연대가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모두의 영혼에 함께 응원을 보내고 싶다. 그저 살아낸 삶이 아름다운 삶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