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횔덜린의 광기 - 거주하는 삶의 연대기 1806~1843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7월
평점 :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시인의 광기>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껴서였다.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 외에 나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순전히 ‘광기‘라는 단어에 매혹되었고 시인의 광기로 점철된 후기의 ’거주’하는 삶이 흥미를 끌었다. 36년을 네카 강변의 탑에 거주한 시인, 누군가는 미쳤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미친시인이라고도 한다. 그의 후기의 삶을 재조명하며 광대하게 자료를 모은 작가 조로조 아감벤을 통해 횔덜린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아감벤은 코로나 펜데믹으로 인한 고립된 상황속에서 거의 1년간을 횔덜린과 살면서 그를 새롭게 찾기 시작했다. 힐덜린은 탑속에서 ’도서관 사서‘라고 불리는 데 집착하고 방문객들에게 ‘폐하‘, ‘각하‘,’전하’와 같은 칭호를 고집스레 사용하면서 은둔의 생활을 이어간다. 그는 거의 인간관계를 멀리하고 의례적인 인사말로 맞았다. 그가 온갖 경칭을 쓴다는 것은 ‘제발 저를 내버려두십시오’라는 뜻이었다. 작가는 이러한 횔덜린을 보며 ‘거주하는 삶’, ‘거주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재발견 한다. ’거주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거주한다는 것은 특정한 존재 양식을 반복적이고 강화된 방식으로 ’가지고 있는 삶‘, 즉 스스로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지는 삶이다. ‘습관적인 삶’은 자기 자신과 세계 전체와의 관계안에서 고유한 방식의 연속성과 응집성을 지닌 삶, 특별한 장소에 특별한 방식으로 거주하는 행위 자체에서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존재하게 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 오직 자기안에 거주할 뿐이다.
그는 17세부터 시를 썼다.(거의 천재적인 느낌)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하면서부터 성직자가 되기를 기도했고, 그는 잠시 성직자의 길을 가지만 끝내 돌아선다. 정신병원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들은 냉기가 돌정도로 너무나도 간결하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반어적인 마음이 들어있는듯 했다.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냉혹한 인간조차 자연스레 지배받는 법칙조차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쓰여있다.이 책에는 그의 전기는 자세히 기록되어있지 않다.그러나 가정의 불화, 사랑의 실패로 받은 고통은 후기의 그의 방대한 기록물들 속에 녹아있고, 그가 어떠한 삶을 살기를 원했는지를 보여준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횔덜린의 ’거주하는 삶‘의 연대기 서술이 특별하면서도 재미있게 읽혀졌다. 괴테와의 같은 시기의 연대기는 서로의 삶의 방향성을 여실히 대비시켜 보여준다. 괴테의 얘기를 전혀 하지않았다는 횔덜린의 이야기가 흥미로울만큼 서로의 삶의 길은 달랐다. 작가는 이 부분을 책장의 좌우로 왼쪽지면에는 괴테의 일기를 중심으로 하는 소유적 삶의 세계를 오른쪽 지면에는 횔덜린의 시적 거주자로서의 삶의 세계를 기록해서 그 둘의 삶을 대비시킨다. 이분법으로 나뉘다시피한 현 세대에서 우리가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넌지시 일러주는듯 했다.
아감벤은 횔덜린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그를 아는 후원자와 주변인들의 기록과 일기, 그리고 여러 메모들을 책속에 집어넣었다. 모든 세세한 기록물의 나열이 재미있게 읽혀진다. 더 재미있었던건 병원측에서 발행한 청구서 목록들이었다. 그 안에는 옷과 신발의 수선비, 뜨게양말가격, 실값, 코담배, 와인가격까지 한 조각도 버릴 수 없는 일상의 기록물들이 들어있다. 광기라는 시간속에서 그는 여전히 시를 썼고 피아노를 치고 산책을 즐겼다.그의 마지막 시로 여겨지는 부분과 마지막 기록물이 되는 그의 죽음의 기록을 읽어본다.
인간의 거주하는 삶이 저 멀리 사라져버리고
포도 넝쿨의 시간이 저 멀리서 빛날 때,
여름의 텅 빈 들판도 그곳에 함께 있고,
숲은 어두운 모습으로 나타나네.
-그의 마지막 시로 여겨지는 [전망]중에서
*프리드리히 횔덜린. 사서. 시인.
약 40년간 정신 이상 상태
출생일 및 나이: 1770년 3월 29일. 향년73세
사인: 폐질환
사망일: 6월7일 밤 10시 45분, 6월 10일 10시 안장
횔덜린의 삶이 실패로 보이는가? 우리는 삶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어야 될까? 이성/광기, 성공/실패, 공/사, 비극/희극. 같은 이분법적 사고들이 유연해지지 않는가? 힐덜린에게 ’거주하는 삶‘은 “ 인간은 이 지상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그의 명제처럼 ’시적인 삶‘이다.시적으로 거주하는 삶이란 우리가 주체적으로 구성하고 통제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고 구술되는 대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우리는 이 삶을 소유할 수 없으며, 단지 그 안에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아감벤은 사회전체의 광기에 비하면 횔덜린의 광기는 차라리 무해한 광기임을 보여준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거주하고 있는가? 지금’거주’의 자리는 어느정도로 무해하고 ‘시적일 수 있을까‘ 황폐해지는 정신의 세계에 또 하나의 큰 울림을 준다. 죽음직전까지 시를 놓지않고 폐허가 되는 정신속에서도 시를 썼던 시인의 ’거주‘가 끝없이 우주속에 이방인 같은 그의 존재가 현 시대의 살아가는 고독하고 쓸쓸한 존재들에게 깊은 위로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