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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선언문 ㅣ 프랑스 책벌레
이주영 지음 / 나비클럽 / 2022년 4월
평점 :
#여행선언문 #이주영작가 @nabiclub
📘역사는 가장 극적인 드라마다. 결론을 이미 알고 있는 드라마지만 전혀 싱겁지 않다. 결론을 절대 고칠 수 없는 실화이기 때문이다. 역사란 가장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해피엔딩은 ‘그땐 그랬군’ 하면서 흐뭇해진다. 새드엔딩이라 해도 크게 속상하지 않다.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이고 지금은 마무리되었으니까. 인류의 지나간 이야기, 역사에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25p.
📘예술가는 자비로운 인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성이 좋지 않은 예술가를 치켜세워 줄 아량이 내게는 없다는 말이다. 진정한 예술은 예술가의 진정성에서 나오며 진정성은 도덕적 인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138p.
📘서로 달라 낯선 것뿐인데 사람들은 왜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세상에는 다른 것보다 틀린 것이 더 많은데, 사람들은 틀린 것보다 다른 것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우리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143p.
📘에두아르가 생각하는 배려란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려면 냉정해져야 한다. 그 누군가와 내가 엉키지 않고 분리되어야 가능하다. 쿨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인간의 감성은 끈끈하게 엉키는 데서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쿨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144p.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것보다 자신, 가족, 민족처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더 집착하는 것 같다.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강한 집착이 요네하라 마리가 말하는 ‘본능’이 아닐까? 여러 외국에서 살아온 나는 점점 본능에 충실하게 된 것 같다. 172p.
📘사람들은 흔히 알아야면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몰라야 보이는 것들도 많다. 그것은 마치 이성과 감성의 차이와 비슷하다. 알고 보면 더 많이 볼 수 있어 지식이 늘어난다. 모르고 보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어 자신만의 시선으로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190p.
📘에두아르는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취미인 것 같다.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아무도 시키지 않는 짓을 자청해서 계획하고 무리하게 밀어붙이다 번번이 일을 그리치고 결과적으로 좋은 소리도 못 듣고 손해만 본 후에 혼자 성질을 내곤 한다. 235p.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은 상대를 믿는 것이다. 그런 믿음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마음도 치유해준다. 254p.
📘에두아르는 그렇게 여행을 통해서 온갖 모험을 하며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닐까. 부모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랑을 받았던 나의 자신감이 수동적인 자신감이라면 에두아르의 자신감은 혼자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든든함으로 가지게 된 능동적 자신감일 것이다. 279p.
📘파리 가르드리옹역에 도착했다.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 집에 돌아오기 딱 좋은 날씨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은 날이 궂을수록 좋다. 집에 들어가는 순간 더 행복해진다. 여행의 참맛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집에 들어가는 순간이다. 385p.
📝일타쌍피 가능한 고품격 여행 에세이! 여행과 에세이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를 살짝 뛰어넘은 책, 여행선언문.
여행+에세이+여행정보+인문학+유머+잔잔한 분노와 적절한 로맨스📚
작가와 ‘프랑스에서 온 비닐봉다리’ 에두아르가 함께 하는 여행은 그 자체로 인생탐구생활로 보인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여행은 우리의 삶의 여정과도 많이 닮아있다.
이 책은 분명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행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는 않다. 여행 자체를 찬양하지도 않는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작정 떠나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구는 것이 불편하다.) 작가는 여행 에세이를 쓰면서(?!) 자신은 결코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한다. 이렇게 솔직할 수가 있나. 나는 이런 종류의 솔직함을 가진 사람들을 좋아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긴 솔직함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나는 여행을 가고 싶어 하면서도 집을 나서는 순간, 빨리 집에 돌아오고 싶어 한다. 떠나기도 전에 예민해진 감각들이 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잠자리 바뀌면 불편해서 뒤척거리겠지? 우리가 없으면 집은 외롭지 않을까? 평소에는 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굳이 끄집어내서 무릎에 올려놓는 고약한 버릇이 여행과 함께 시작된다. 떠나기도 전에 소중해진 집과 멀어지며 시작되는 나의 여행, 도대체 여행을 왜 하는 걸까?
📘에두아르가 친구들을 왕창 불러 여행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혼자 정상 등반길에 올라 속을 썩이는 밉상짓을 안 했다면 맛보지 못했을 행복감이었다. 사는 맛이란 그렇게 일을 복잡하게 벌여야 맛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64p.
프랑스 샤모니를 소개하는 ‘이런 게 사람 사는 맛이지’에 나온 위의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온갖 멋진 여행지에서 본 것들을 제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저 문장이 참으로 아름답다.
에두아르와 함께 하는 여행은 너무 빡세 보인다. 함께 여행하다 보면 정말 열불이 날 것 같은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두아르와 작가가 함께 하는 여행에서는 ‘사는 맛’이 난다. 복잡한 일을 벌여야 맛볼 수 있는 그 맛을 위해 우리는 여행을 떠나고, 결국 돌아가기로 정해진 인생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 아닐까.
작가는 ‘이번 책을 쓰는 과정은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질문하는 과정이었다.(392p)’라고 했다. 질문들의 답을 작가가 내놓았을까? 궁금하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