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은 23.5˚ 별의 기울어짐 때문에 생겨난다.
사계절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사계절은 엄마의 품처럼 넉넉하다.
돌아오는 계절 따라 우리의 추억도 쌓여간다.
이 책 '나는 첫 문장을 기다렸다'의 목차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시간의 흐름 끝에 계절이 있다.
계절의 흐름과 상관없이 문장의 꽃은 만개한다.
내 기억으로부터 온 것들과, 지금의 나와,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들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면서 시를 만드는 것을 지켜본다.
- 봄. 시인의 일 p23
작가는 시인이다.
책은 시인이 펴낸 '산문집'이다.
시인은 제주 애월읍 장전리에 살고 있다고 한다.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은 곳에 살고 있어 그런지,
책은 단단하고 변화무쌍하며 여리다.
작가는 근래에 작은 터를 얻어 틈틈이 풀을 뽑거나 돌을 캐내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지렁이를 만나면 부드러운 흙으로 다시 덮어준다고 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티베트에서의 7년'이 떠올랐다.
호기심 많은 달라이 라마는 하러에게 깊은 호감을 보이면서 극장 설계를 부탁하지만,
지렁이 한 마리의 생명까지 염려하는 티베트인들의 종교적 심성이 공사를 더디게 했다.
시인과 스님은 닮은 구석이 있다.
시집을 읽는 일은 과일나무에서 햇과일을 따서 먹는 일과 같은 희열이 있다.
한 편 한 편의 시에 실린 그이의 고유하고 특별한 마음과,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산뜻한 생각을 읽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 여름. p 83
어릴 적 부모님께서 조그맣게 포도밭을 가꾸셨다.
포도밭은 우리집의 유일한 재산이자 소득원이었다.
알알이 포도송이가 굵어지면 한 개 따서 입안으로 넣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수학이 끝난 후, 상품가치가 없는 것만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탓인지 나는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작가는 시집을 읽는 일이 '과일나무에서 햇과일을 따서 먹는 일'에 비유했다.
예전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가슴속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던 그것은 아마 '희열'이었나 보다.
포도송이에 담긴 추억. 어릴 적 기쁨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세사가 난마처럼 얽혀 있지만 이러한 잠깐의 시간에서 평온을 찾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숨을 돌릴 것인가.
마치 평원에 서 있는 것처럼 나는 가끔씩 풍성한 가을 햇빛 속에 서 있곤 한다.
- 가을. 가을 빛이 쌓여간다. p154
가을은 풍요로움의 계절이다.
햇빛마저 풍성하다.
우리는 모든 것이 충만한 이 때.
잠깐 멈춰 한숨 돌려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고
그 안에서 휴식과 평온과 느림을 되찾아야 한다.
순간순간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의식한다면 삶을 사는 동안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모든 시간은 바뀐다. 이동한다.
겨울의 혹한도 봄바람에 밀려날 것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시들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살펴볼 일이다.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다.
- 겨울. p 207
겨울 하면 '하얀 눈'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구름 속 먼지에 붙은 작은 얼음 알갱이가 사람들 사이로 내려온다.
그 순간 차들도 사람들도 느려진다.
빨간 머리 앤에서 아버지를 여읜 길버트의 손에 눈물처럼 흐르는 눈.
손의 온기 때문에 단 몇 초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눈송이는 사실, 똑같은 것이 한 개도 없다.
눈은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사람과 마찬가지로 제각각 다르다.
겨울은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명을 품고 있다. 눈이 녹은 자리에 다시 봄이 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