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은 번뇌의 씨앗이다.
무명초라 불리는 머리카락은 번뇌와 망상의 상징이다.
싯다르타는 출가를 결심한 뒤, '치렁치렁한 머리칼은 사문 생활에 들어가려는 나에게 적합하지 않다'라며 허리에 찬 보검을 뽑아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랐다.
삭발은 '머리카락과 함께 잡념도 끊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이다.
남자들은 군대에 입대하기 전 머리카락을 자르고,
수녀는 베일로 머리카락을 가리며,
이슬람 여성은 히잡, 차도르, 부르카 등으로 머리를 가려 여성의 상징을 거세한다.
친구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그가 좋아하는 긴 생머리를 똑단발로 잘랐다.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머리카락이다.
스님, 수녀, 군인, 이슬람 여성처럼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감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표현한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옷처럼 머리카락으로 신체를 치장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래서 '헤어웨어'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왕까지 나서서 사치 풍습을 금했다. 양반 가문에서도 복식의 사치를 금하는 것을 매우 중시했다.
하지만 사치가 쉽사리 잦아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 오면 여인들이 가체를 사기 위해 막대한 돈을 지불할 정도로 사치가 극심해졌다. 이에 영조와 정조 때는 가체의 사치를 금지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이어진다.
- 동서양의 금지령, 여성의 멋 내기를 금지하다. p206
1502년 연산군은 명령했다.
"공주를 위한 의례에 쓸 것이다.
그것 150개를 바쳐라."
신하들은 읍소했다.
"백성들의 머리카락이 남아나질 않습니다. 부디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것은 바로 가체였다.
가체는 본인의 머리카락에 다른 사람의 머리를 땋아 만든 '다리'를 엮어 머리에 두르는 장식을 말한다.
조선시대 왕비가 정해지면 왕이 왕비에게 명복과 가체를 마련해 주었다.
이로써 가체는 왕실 여인의 상징이 되었다.
가체의 크기가 곧 권력의 크기였다.
가체는 이를 동경한 양반 여인들 사이에서 대 유행하고, 궁궐 밖 모든 여성들에게까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온 백성의 혼수품으로 자리 잡아 신랑 측은 가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가체를 마련해야 했다.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드는 탓에 원래부터 고가였던 가체는 유행으로 수요가 급증하자 가격이 급등했다. 가체를 사려면 최소 60~70냥이 들었고,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다리라면 수백 냥은 족히 되었다. 한번 가체를 하는데 부인들은 몇 백금을 썼다. 당시 황소 1마리 값이 20냥인 것을 감안하면 양반들에게도 가체의 비용은 부담스러웠다.
누구나 쉽게 가질 수 없기에 가체의 크기와 높이는 곧 지위와 부의 상징이 되었고, 조선의 여인들은 약 5kg 무게의 가체를 두세 개씩 머리에 얹기도 했다.
실학자 이덕무는 "어느 부잣집의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가체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를 맞으러 갑자기 일어서다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라고 말했다.
결국 1756년, 영조는 가체 금지령을 선포한다.
그러나 여인들은 장옷 속에 숨기거나 별당 안에서 가체를 하는 등 포기하지 않았다.
영정조 시대의 가체 금지령은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19세기 이후 쪽머리의 정착과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