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익숙해진 질문으로 가상과 실재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고전이 된 이 영화는 '현실/가상'이라는 세계의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합니다.
모피어스가 앤더슨을 만나 제시하는 선택지, 빨간약을 먹을 것인가, 파란 약을 먹을 것인가 사이의 선택지는 진실을 알 것인가, 모르는 척 넘어갈 것인가를 묻는 인신론적 질문인 동시에, 내가 존재한다면 나는 어디에서 존재하는가를 묻는 존재론적 질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존재하는, 존재해야만 하는 공간은 과연 어디일까요?
우리는 매트릭스에서 제기되는 실재와 가상의 문제와 보드리야르의 말하는 '시뮬라크르' 사이의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매트릭스에서 가상과 실재는 서로 다른 존재론적 지위를 가집니다. 가상의 세계, 즉 매트릭스 안의 세계는 진짜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로봇들이 인간을 착취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거짓 세계이며, 이 세계 속에서 '앤더슨'이라는 정체성은 다만 매트릭스 안에서 존재하는 것일 뿐 실재라는 존재론적 지위를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는 가상과 실재의 세계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는데 핵심이 있습니다.
매트릭스의 작가가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 그의 책이 등장하기도 하고, 주연배우인 키아누 리브스는 이 책을 영화 촬영 내내 들고 다니며 읽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매트릭스'와 '시뮬라크르'는 엄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의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가상의 세계와 실재의 세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가상의 세계로부터 실재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 전체가 가상의 세계이며, 이 가상의 세계 뒤편에 있는 실재의 세계란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실재와 가상을 구분할 때 정말로 구분되는 것은 실재와 가상이 아니라, 가상과 그 가상에 대한 가상이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