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마시는 시간 - 그들이 사랑한 문장과 술
정인성 지음 / 나무나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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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고백하자면 <소설 마시는 시간>의 6분의 1정도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목차는 소설과 술을 엮어18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에 내가 읽어본 책은 6권(그중에 하나는 심지어 영화로만 봤던 캐롤), 술은 제대로 마셔본 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맛이 떠오르지 않았다. 버드와이저는 마셔보긴 했지만 1번 마셔본 이후로 다시는 마셔본적이 없어 맛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티니도 아마도 한번쯤 마셔봤겠지만 '술맛' 이외의 다른 맛은 떠오르지 않았다. 피나콜라다는 음료수로 코코넛 맛을 마셔본 것이 다이다.


그래서 아쉬웠다. 왜 내가 좋아하는 삿뽀로 실버컵이나 셀리스 화이트, 블랑 1664, 청하, 매화수를 마시는 소설 주인공은 없는지. 물론 이건 정인성님의 소설과 술의 취향이 나와 달라서이기도 하다. 싱글 몰트를 마셔보기는 했으나 향이 좋음 이상으로 빠져들지는 못한 것으로 보아, 아마 내 취향은 위스키가 아닐 것이다.


책을 읽으며 한번 마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술은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위대한 개츠비>의 민트 쥴렙. 아이스크림도 민트맛을 좋아하기에 스피어민트가 들어간 술에 끌렸다. 다만 알콜 도수가 높아 얼음에 녹여 마셔야 한다는 데서는 '한 번 마셔본 술'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나는 맛있는 술을 좋아하고, 빠르게 마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기나긴 이별>의 김렛. 상큼한 맛을 좋아해서 라임이 들어간 칵테일이 끌렸다. 첫 잔으로 마시기에 적합하다는 데서 침샘이 솟았다. 다만 하드보일드한 소설이라는 데서 기나긴 이별은 그다지 끌리지 않았는데, 김렛이 맛있다면 도전해볼 생각이 있다.


세 번째는 <개선문>의 칼바도스. 이 술은 순전히 인용된 소설의 문구 때문이다. "칼바도스를 마시고 싶어요. 제발 마개를 따요" 사과향의 풍미가 나는 브랜디와 비슷한 술. 사실 마셔보면 사과보다는 브랜디에서 느껴지는 플라스틱 맛이 강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하다. 그래도 나도 제발 마개를 따서 마셔보고 싶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술을 마실 수 있는 어른이 된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술을 마실 때마다 어른이 된 기분을 느낀다. 특히 소설 속에서 나오는 낯선 칵테일이나 위스키를 마시면 어른들만이 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기분이 든다. 조만간 책 바에서 어른의 기분을 느껴봐야지.


+ 덧 : 이 글을 쓰고 나서 책 바에서 세 개의 칵테일을 모두 마셔보았다.

아쉬웠던 것은 김렛, 민트 쥴렙은 나쁘지 않았고, 칼바도스는 아주 좋았다.

칼바도스 자체가 '사과주'인지라 사과향이 아주 강하게 났고, 입 안에 감도는 향이 최고였다.


참고로.. 이 책은 책 바의 메뉴판과 같은 성격을 띄므로, 반드시 책 바를 경험해 볼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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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 우리 시대, 연애하지 않는 젊은이들에 대한 심층 보고서
우시쿠보 메구미 지음, 서라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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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년간 무적의 솔로부대 이야기를 듣는다. 이들은 솔로로 돌아온 이들을 환영하고, 커플을 적군으로 간주한다. 물론 결혼한 사람은 적군의 민간인으로 지켜준다. 솔로부대는 커플부대를 적대시하지만, 될 수만 있다면 언제고 되고 싶어한다. 다만, 자신이 솔로부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적시한다. 바로 <연애,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인 것이다.


책에서는 연애를 하지 못하는 다양한 케이스를 이야기한다. 돈이 없는 젊은이들.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엔 너무 위험해진 사회. 남녀평등사회에서 기존의 연애관과 부딪치는 개념들, 결혼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 그리고 연애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산재함 등등


연애하지 않을 이유는 많은데 연애를 해야 할 이유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연애가 나에게, 우리에게 주는 이득이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연애를 할 것인가. 연애는 즐거운 것이라는데, 왜 이 책에 그 즐거움은 보이지 않을까. 이 책이 연애를 권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실패했노라고 당당히 말하겠다.


왜 사람들은 연애를 하고 싶어할까? 왜 연애를 해야한다고 생각할까? 왜 연애를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자신의 가치와 상관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연애를 하지 않는 것, 혹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어떤 인생의 관문을 지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책을 읽으며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에서 답을 찾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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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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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그 유명한 아이작 아시모프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영화 컨택트를 보고 감동을 받아 더 알고 싶은 마음만으로 택한 책이었다. 단편이라 금방 읽어볼 수는 있었지만, 각각의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을 풀어보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할 거리가 많을 것 같은 책이었다. 어떤 작품은 읽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 속에 물음표가 끝없이 생성되기도 했고(이해, 영으로 나누면, 일흔두 글자), 생소한 단어로 책에서 설명하는 장면이 선뜻 그려지지 않기도 했다(바빌론의 탑, 당신 인생의 이야기). 그동안 생각해왔던 내용이 이야기로 풀어져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작품도 있었다(당신 인생의 이야기, 지옥은 신의 부재,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모든 작품이 각자의 개성이 강해서 공통점 하나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는 느낌이 있었다. 모든 작품이 기존에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하는 듯했다. SF라고 해서 과학적인 내용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보겠다기보다는, 세상에는 이런 관점이 있는데 한번 들여다볼래? 하는 그런 이야기꾼의 속삭임 같은 작품들이었다. 

'바빌론의 탑'이라 하면 흔히 '언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끝까지 언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는 것이 사실상 반전이었다. 창작노트에서 테드 창은 바빌론의 탑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단다. 과연 그 의도대로 큐빗을 미터로 바꿔가며 머릿속에 그들의 삶을 담았는데, 덕분에 마치 내가 하늘 위해서 노을과 별을 보고 비 내리는 것을 보는 듯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깊이 상상하자 바빌론의 탑 자체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양파만 먹고 살 수 없다는 데서 1차, 그 높은 탑에서 화장실을 도대체 어떻게 사용했을까 생각하는 데서 2차로 바빌론의 탑 상상이 무너졌다. 

'이해'는 오히려 이해하기가 어려운 독자가 있어 완성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두 번 읽었는데도 마지막의 '이해' 공격은 어렴풋하게만 이해가 됐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에, 뉴런이 지나치게 활성화된 초인에게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생각을 하는 것은 그 어떤 공격보다 효과적인 게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이 작품을 이해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니면 판권이 팔려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니 <컨택트>처럼 영화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영으로 나누면'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산수가 싫어 수학을 포기했던 나에게 쥐약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다만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절망감은 조금 알 것 같았다. 르네에게는 거의 매트릭스 급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죽음을 생각할 만큼 힘들었던 이도,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이해'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보내는 속편 같기도 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영화와 함께 봐서 그런지 이야깃거리가 더 풍부한 작품인 것 같다. 먼저 언어를 매개체로 하고 있기에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미술사에서 언어가 발달하기 전과 이전의 작품은 표현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미술 역시 언어의 분절에 따라 단순화되었다는 것이다. 또 햅타포드의 음성을 분절하기 어려워하는 데서는 오래전에 봤던 <히어 앤 나우>라는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50살이 넘도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수술을 통해 소리를 듣게 되는 내용이었는데, 과도한 소리 정보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놀라웠다. 우리는 오래도록 필요한 소리와 필요 없는 소리를 구분하는 훈련을 해와서, 그 소리가 언어라는 것을 알지만 처음 소리를 듣는 그분들은 그 전에 불완전하게나마 언어를 사용했는데도 소리 구분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언어 외에도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텍스트였다.


'일흔두 글자'는 '영을 나누면'만큼이나 멘붕이 오게 만든 작품이었다. 골렘에 이름을 붙여 움직이게 만든다는 개념이 초반에 이해가 가지 않아 여러 번 읽어야 했다. 게다가 왜 일흔두 글자일까? 내가 읽으며 놓친 무엇이 있나? 한참을 읽었는데 다 읽고 나중에 찾아보니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신의 이름이 일흔두 글자로 되어 있으리라 추측한다고 한다. 초반에 명명학이라고 하는 과학에서 시작해서 이 제목이 의아했지만, 후반에는 마치 DNA를 새기는 것 같은 모습에서 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인간 복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슈(돈이 있고 권력 있는자들만이 복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 복제인간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 등)가 있어서 시간이 된다면 다시 자세히 읽어보고 싶다.

'인류 과학의 진화'는 매우 짧았지만, 학문과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풍자를 담은 작품이었다. 현생 인류는 더 이상 창조해내지 못하고, 메타인류가 이루어놓은 것들을 그저 해석하고 연구하는 데 그치고 만다. '메타인류가 이루어놓은 것'을 '자연'으로 바꿔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게다가 마지막에 어차피 메타인류는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라는 인류의 오만함까지도.

'지옥은 신의 부재'는 신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매우 재미있는 텍스트였다. 솔직히 이 작품을 SF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도 믿음과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테드 창이 창작노트에서 언급했던 '욥기'는 나도 어릴 적 읽고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한들 욥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죽은 그의 가족들은 도대체 무슨 죄이고, 믿음을 시험해서 통과했다고 이후에 다시 번창하게 해준들 그것이 그 믿음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 이해가지 않는 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닐의 신앙의 관점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물론 나에겐 사라가 없다는 점이 그와 다른 점이겠지만 말이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는 테드 창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한 작품이었다. 인간이 외모에 대해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라니! 나는 사실 성형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 물론 성형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고, 성형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존감 때문에 성형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외모로 많은 것을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보다 얼굴을 바꾸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무엇을 바꾸기보다는 교육을 통해 바꾸는 것이 좀 더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칼리에 대한 관점도 비슷한 것 같다. 칼리가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 있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쓰다 보니 교육 또한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주제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깊은 사유를 담고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은 단편집이었다. 하지만 두고두고 곱씹어볼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테드 창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서 번역된 것은 모두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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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 Dear 그림책
숀 탠 지음,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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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을 읽고 좋았던 작품은 <에릭>이었다. 왜 그림을 흑백으로 그렸는지 알 것 같은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에릭이 관심을 보였던 작은 물건들 위에 형형색색 아름답게 피어난 꽃, 그리고 그동안 감사했다는 작은 편지는 저절로 감동을 자아냈다.


다시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을 천천히 읽어보고 <에릭>이 더 좋아졌다. 에릭은 이해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가 있었지만 화자의 가족들은 에릭을 존중하며 배려했다. 에릭이 부엌 찬장을 좋아하자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찬장을 치워주었다. 차에 탈 때도 주머니 속이 아닌 좌석 하나에 안전벨트를 차고 앉게 했다. 줄을 서서 기다리거나,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던 에릭이 떠난 날의 마지막 식사 장면도 가족들의 배려가 드러난 부분이었다. 에릭은 씨앗을 좋아했다. 에릭이 처음 들고 온 짐은 땅콩,호두,도토리다. 관심을 보였던 작은 물건도 씨앗을 꽃을 피우기 위한 것들이었다. 그런 에릭을 위해 가족들이 준비한 최고의 식사는 땅콩 하나였던 것이다.


모든 작품이 다 마음에 와닿거나, 좋거나 하지는 않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그림과 글이 멋진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글만 읽어서는 내용을 알 수 없고, 그림만 봐서는 감동이 덜하다. 그러나 그림보다는 글 읽기에 익숙해서 여러번 봐야 그림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눈치챌 수 있다.


언젠가 다시 이 책을 열어볼 때는 또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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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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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원제와 다른 제목으로, 한국에서 붙인 이름이다. 때문에 이 책에는 '자본론'에 대한 이야기는 자세하게 다루고 있지 않으므로 그것을 기대하면서 보면 실망할 수 있다.


다만 시골에서 빵집을 운영하며 살아가는 저자의 삶에 대해 궁금하다면, 그에 대해 만족스러운 독서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이스트와 발효균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내용을 보면서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그건 이스트가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해서 머리도 좋고 일을 시켜도 잘 하지만, 무슨 일을 할 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지 모르는 사람같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발효균은 딱히 특출나게 일을 잘 하지는 않지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보면서 자신의 능력을 키웠고, 그동안 해왔던 다양한 경험이 하는 일에 스며들어 그 자신만의 장점으로 발휘되는 사람인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이스트같은 사람을 길러내고 쓰기 편해서 마음껏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발효균 같은 사람의 능력은 편차가 심해서, 정확한 길을 찾을 때까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빵은 뒷전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런 생각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분명 나는 이스트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발효균이 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실패하는 것은 너무 두려워서, 이상만을 좇아 뛰어들기엔 너무 늦었나 망설이기도 한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살아가는 다루마리의 삶이 부럽기도 하면서 너무나 멀어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발효균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발효균에 가까운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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