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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평점 :
SF는 그 유명한 아이작 아시모프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영화 컨택트를 보고 감동을 받아 더 알고 싶은 마음만으로 택한 책이었다. 단편이라 금방 읽어볼 수는 있었지만, 각각의 작품이 담고 있는 내용을 풀어보자면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할 거리가 많을 것 같은 책이었다. 어떤 작품은 읽으면서 이해가 가지 않아 머리 속에 물음표가 끝없이 생성되기도 했고(이해, 영으로 나누면, 일흔두 글자), 생소한 단어로 책에서 설명하는 장면이 선뜻 그려지지 않기도 했다(바빌론의 탑, 당신 인생의 이야기). 그동안 생각해왔던 내용이 이야기로 풀어져서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작품도 있었다(당신 인생의 이야기, 지옥은 신의 부재,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모든 작품이 각자의 개성이 강해서 공통점 하나를 찾기는 쉽지 않다. 다만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는 느낌이 있었다. 모든 작품이 기존에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하는 듯했다. SF라고 해서 과학적인 내용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보겠다기보다는, 세상에는 이런 관점이 있는데 한번 들여다볼래? 하는 그런 이야기꾼의 속삭임 같은 작품들이었다.
'바빌론의 탑'이라 하면 흔히 '언어'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다. 끝까지 언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는 것이 사실상 반전이었다. 창작노트에서 테드 창은 바빌론의 탑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단다. 과연 그 의도대로 큐빗을 미터로 바꿔가며 머릿속에 그들의 삶을 담았는데, 덕분에 마치 내가 하늘 위해서 노을과 별을 보고 비 내리는 것을 보는 듯한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깊이 상상하자 바빌론의 탑 자체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양파만 먹고 살 수 없다는 데서 1차, 그 높은 탑에서 화장실을 도대체 어떻게 사용했을까 생각하는 데서 2차로 바빌론의 탑 상상이 무너졌다.
'이해'는 오히려 이해하기가 어려운 독자가 있어 완성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두 번 읽었는데도 마지막의 '이해' 공격은 어렴풋하게만 이해가 됐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에, 뉴런이 지나치게 활성화된 초인에게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생각을 하는 것은 그 어떤 공격보다 효과적인 게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이 작품을 이해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니면 판권이 팔려 영화로 만들어진다고 하니 <컨택트>처럼 영화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영으로 나누면'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산수가 싫어 수학을 포기했던 나에게 쥐약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다만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절망감은 조금 알 것 같았다. 르네에게는 거의 매트릭스 급의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죽음을 생각할 만큼 힘들었던 이도,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이해'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보내는 속편 같기도 했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영화와 함께 봐서 그런지 이야깃거리가 더 풍부한 작품인 것 같다. 먼저 언어를 매개체로 하고 있기에 언어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미술사에서 언어가 발달하기 전과 이전의 작품은 표현 자체가 다르다고 한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미술 역시 언어의 분절에 따라 단순화되었다는 것이다. 또 햅타포드의 음성을 분절하기 어려워하는 데서는 오래전에 봤던 <히어 앤 나우>라는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50살이 넘도록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 수술을 통해 소리를 듣게 되는 내용이었는데, 과도한 소리 정보 때문에 괴로워하는 게 놀라웠다. 우리는 오래도록 필요한 소리와 필요 없는 소리를 구분하는 훈련을 해와서, 그 소리가 언어라는 것을 알지만 처음 소리를 듣는 그분들은 그 전에 불완전하게나마 언어를 사용했는데도 소리 구분을 거의 할 수 없었다. 언어 외에도 결정론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는 텍스트였다.
'일흔두 글자'는 '영을 나누면'만큼이나 멘붕이 오게 만든 작품이었다. 골렘에 이름을 붙여 움직이게 만든다는 개념이 초반에 이해가 가지 않아 여러 번 읽어야 했다. 게다가 왜 일흔두 글자일까? 내가 읽으며 놓친 무엇이 있나? 한참을 읽었는데 다 읽고 나중에 찾아보니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신의 이름이 일흔두 글자로 되어 있으리라 추측한다고 한다. 초반에 명명학이라고 하는 과학에서 시작해서 이 제목이 의아했지만, 후반에는 마치 DNA를 새기는 것 같은 모습에서 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인간 복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슈(돈이 있고 권력 있는자들만이 복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 복제인간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 등)가 있어서 시간이 된다면 다시 자세히 읽어보고 싶다.
'인류 과학의 진화'는 매우 짧았지만, 학문과 연구에 대한 흥미로운 풍자를 담은 작품이었다. 현생 인류는 더 이상 창조해내지 못하고, 메타인류가 이루어놓은 것들을 그저 해석하고 연구하는 데 그치고 만다. '메타인류가 이루어놓은 것'을 '자연'으로 바꿔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 게다가 마지막에 어차피 메타인류는 인간이 만든 것일 뿐이라는 인류의 오만함까지도.
'지옥은 신의 부재'는 신앙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매우 재미있는 텍스트였다. 솔직히 이 작품을 SF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과학도 믿음과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테드 창이 창작노트에서 언급했던 '욥기'는 나도 어릴 적 읽고서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믿음이 중요한들 욥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죽은 그의 가족들은 도대체 무슨 죄이고, 믿음을 시험해서 통과했다고 이후에 다시 번창하게 해준들 그것이 그 믿음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 이해가지 않는 점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닐의 신앙의 관점에 가깝지 않은가 생각이 든다. 물론 나에겐 사라가 없다는 점이 그와 다른 점이겠지만 말이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는 테드 창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한 작품이었다. 인간이 외모에 대해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장치라니! 나는 사실 성형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 물론 성형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고, 성형을 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존감 때문에 성형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외모로 많은 것을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보다 얼굴을 바꾸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무엇을 바꾸기보다는 교육을 통해 바꾸는 것이 좀 더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칼리에 대한 관점도 비슷한 것 같다. 칼리가 주는 긍정적인 측면이 분명 있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그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쓰다 보니 교육 또한 인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역시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주제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깊은 사유를 담고 있어서 읽기가 쉽지 않은 단편집이었다. 하지만 두고두고 곱씹어볼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테드 창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서 번역된 것은 모두 찾아 읽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