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챕터
위니 리 지음, 송섬별 옮김 / 한길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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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외로움 끝에
'함께' 할 수 있기까지

 

 

 

 

 

글을 빠르게 읽는 것이, 글이 빠르게 읽힌다는 것이 마음을 먹먹하게 잠기게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원래 글을 빠르게 읽는 편인데, 이 책은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가속도가 붙어, 비비안의 내면으로, 조니의 내면으로 빠르게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책이었다. 《다크 챕터》를 읽으며 난, 마음이 먹먹하게 내려앉았다. 이 감정을 느낄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성폭행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이후 과정이 어느 정도 예측이 되었다. 이미 소설의 중요한 사건을 다 알고 읽는 건, 소설을 읽는 큰 의미 중 하나를 포기하고 읽는 것과 다름없지만, 그럼에도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해 책을 읽었다. 그래서 "프롤로그"를 읽을 때까지. 너무 쉽게 읽었다. 하지만 페이지가 넘어가면 넘어갈수록, 그 속도가 빨라졌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개가 빠진 수영장에 만들어진 급류를 탄 듯, 내 마음은 깊은 물속에 잠긴 것 같았다.

 

한동안 난, 책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을 조금 읽으려고 하면,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다.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책을 읽다 보면, 카톡이 울리며 나를 다시 책 속의 세상에서 빠져나오게 만드는 일이 생기곤 했다. 변명일 수 있지만, 3월은 새롭게 시작하는 일들이 많고, 만나게 된 사람들도 많았고, 덕분에 신경 써야 할 일들과 해야 할 일들이 내 삶을 팽팽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내가 책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이동하는 때인데, 아침 일찍 통학버스에 몸을 싣는 그때에 "프롤로그"까지 읽었던 《다크 챕터》를 다시 읽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피부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에 제목부터 어두운 이 책을 읽는 것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그건 내 기우에 불과했다. 오히려 아침 일찍 점점 밝게 떠오르는 태양과 잘 어울리는 책이었다. 비비안과 조니의 가장 어두웠던 과거를 이야기하지만, 그 과거 다음에 올 밝은 다음 장을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내 삶의 등고선에 예기치 못한 균열을 낸 그 틈새 저편을 건너다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까맣게 모른 채 저편을 건너다본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까맣게 모른 채 저편 삶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예전의 나 자신에게 소리 질러 경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의 이야기는 아일랜드의 넓은 언덕을 거니는 상상을 한 소녀의 꿈이 10여 년이 지나 무참히 무너져 버리는 사건을 다룬 이야기다. 구체적으로 하버드 대학 출신의 미국 상류층 여성으로 런던에서 성공한 영화 제작자로 화려한 삶을 살아가던 비비안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언덕에서 15살 이민자 소년에게 성폭행을 당한 이야기다. 간략하게,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살인 다음으로 잔혹한 범죄"인 성폭행을 한 이야기다. 이렇게 《다크 챕터》의 이야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다고? 단순하다는 말이 이토록 무섭고 어려운 의미였나?"라는 비비안의 반문처럼 참으로 무섭고 어려운 일들을 다루고 있다.

 

비비안에게 닥친 일들과 조니가 한 일들을 기사로 다룬다면, "성폭행 사건" 한 줄짜리 단신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다크 챕터》는 그 이야기 자체에 너무도 많은 고통, 슬픔, 두려움, 외로움, 초조함, 허망함 등이 담겨 있다는 것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성폭행 피해자로 비비안이 겪었을 모든 일들은 가히 충격적이다. 성폭행을 당하기 전, 당하는 과정, 그리고 그 직후, 그리고 경찰의 도움과 상담, 그리고 재판.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들 속에 얼마나 "모든 감정을 다 잃어버린 것만 같은" 비비안에게 더 감정을 잃어버리게 만드는지. 삶을 포기하고픈 충동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망각에 몸을 내맡겨버리고 언제까지나 그대로 현실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


성폭행을 당하고 난 뒤에 경찰과 병원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난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았다. 가해자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 피해자가 겪는 일들은 그 거대한 폭력에 비할 수 없지만 참으로 사람을 서럽게 만들고 있었다. 안정감을 잃어버린. 여느 사람들과 같은 그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성폭행을 당한 그 순간. 그리고 그 이후로 비비안의 생각과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정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겪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성폭행처럼 혹시 몰라서 에이즈 약을 먹으려는 그녀의 심경은 성폭행 피해자의 또 다른 고통을 보여준다. 사건 발행 후 72시간 내에 먹어야 하는데 3시간 넘겼다는 것으로 극한 두려움과 초조함을 느낀다. 감염을 막는 약을 삼키는 그녀의 행동에서 자신의 슬픔을 삼켜버리려 몸부림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이후에도 순간순간 그녀의 마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는 성폭행을 당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과 대비해 짙게 드리운다.

 


그들에게는 이 사건이 유희거리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건을 겪어내야 하는 당사자다.


재판과 이를 다루는 언론의 행태를 보며. 사회가 얼마나 성폭행 피해자에게 또 다른 폭력을 자행하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이 겪었어야 하는 모든 걸 말해야 하고, 그 말하는 과정이 세상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는 게 얼마나 큰마음의 수치심을 남기는지. 그리고 가해자를 보고 치미는 깊은 분노의 감정들. 혹시나 가해자가 무죄를 받을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과 이를 막기 위해 때로 계산적인 말과 눈물까지 흘려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는 생각들. 성폭력 그 자체만으로도 벅찰 텐데, 이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성폭행 사건을 보고 "유희거리"로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 사건을 겪어내야 했던 당사자의 심경을 헤아리려는 생각을 얼마나 했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생각이 혹시 폭력이 되지 않았는지, 사회란 보이지 않는 형태로 피해자를 짓누르지 않았는지 말이다.

 


이제는 바깥을 돌아다닐 수도 없고 사람들을 훔쳐볼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다. 매일 매시간 사람들이 이래라저래라 시켜낼 것이다.
기분 나쁜 것은 그 부분이다. 고정되는 것. 한자리에 박혀 있는 것.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 말이다.


어떤 이유로도 성폭력은 이해할 수 없다. 설사 15살의 소년이라고 하더라도. 설사 이민자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도. 설사 그가 사회에서 환대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설사 그가 잘못된 남녀 관계에 대한 생각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문화에 놓여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가해자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열기 위해 조니의 이야기를 비비안과 같은 분량으로 다루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배경을 알게 되더라도, 그가 비비안에게 가한 폭력은 결단코 용서받거나, 이해받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건, 세상에는 잘 알려지고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가 있는 한편으로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범죄자가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한 개인을 향해 항의를 퍼부을 수는 있겠지만 범죄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살아가는 다른 범죄자들도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성범죄가 일어나는 즉시 신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조니의 이야기를 길게 다룬 이유는 "성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한 사람의 삶을 이토록 잔혹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문화 그리고 그 저변을 고발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만을 몰아세우며 폭력의 본질을 놓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 조니가 자라온 환경 속에 얼마나 성폭력에 대한 무지가 만연했는지, 잘못된 성에 대한 이해가 사회에 불러올 일들에 대해  경고한다.

 

'혼자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라고 그녀는 라디오에서 말했다. 그런데도 지금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모든 사람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기를 쓰고 과거에 있었던 어두운 챕터들을 애써 숨기려 한다. 그러나 그 챕터들이 모두 모이면 책이 되고, 도서관 하나를 가득 메운다. 제 나름의 이야기를 가진 모든 사람은 여전히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어떤 곳을 잊으려 애쓴다.

 

이 소설은 《다크 챕터》다. 어두운 이야기다. 떠나고 싶지만 쉽사리 떠날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상에 홀로 있는 것 같던 비비안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친구들의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쉽지 않고, 극복했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스스로의 말과 달리 자신의 마음에 있는 솔직한 고백은 성폭행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한지 다시금 느끼게 한다.


그렇기에 홀로 고독하게 세상을 버틴다고 생각했던 비비안이 세상에 나와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앞으로의 내 모습, 언제나 그래 왔던 내 모습이다."라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은 건 큰 울림으로, 먹먹한 내 마음을 감싸왔다.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은 그 마음을 이기고.

 

"애초에 제 잘못이 아닌 일을 제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죠?"

 

라고 말하는 저자의 생각에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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