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예찬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안인희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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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 열어준 세계로의 초대

 

 

 

 

 

매우 힘든 날이었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밤 열두시까지.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바쁜 하루였다. 정말 녹초처럼 몸이 내려앉은 듯한 날, 극심한 피로감에 휩싸인 날. 그런 날이었다.
그런데,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단지 몸이 고단해서가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화' 때문이었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날이 있지 않은가. 나의 기대와 상대의 기대가 서로 일치하지 않았을 때, 실망하게 되는 날. 그런 날이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마음까지 몹시 허기진 그런 날이었다. 내가 《땅의 예찬》을 만난 날은.

그렇다고 위로나 힐링이 필요해서 《땅의 예찬》을 읽은 건 아니었다. 가쁜 마음의 숨을 고르기 위해 책을 집어 들었다. 적당한 두께. 신비로운 삽화. 길지 않은 글. 그리고 철학가의 사색. 작은 기대를 걸어볼만했다. 불규칙한 마음의 호흡을 맞추기에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스쳤다.

 

누구든 정원에서 일하면 정원은 많은 것을 돌려준다.
내게는 존재와 시간을 준다.
불확실한 기다림, 꼭 필요한 참을성,
느린 성장이 특별한 시간감각을 불러온다.


마음과 생각이 저 멀리 앞서나가 그보다 조금 더딘 삶의 속도를 잃어가고 있던 나에게 《땅의 예찬》은 "속도"를 맞춰주는 '페이스메이커'였다.
'한병철'. 독일에서 활동하는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그는 남다른 통찰력으로 세상을 섬세하게 날카롭게 지극히 현실적으로 포착하곤 했다. 그의 글은 마음을 내려앉게 만드는 묵직한 힘이 있다. 《땅의 예찬》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은 맞는 것 같은데, 달랐다. 그의 문장에서 이렇게 아름다움을 수놓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걸 알았다. 3년 동안 가꾼 정원, 그 안에서 피고 진 모든 것을 눈으로 손으로 코로 입으로 또 때로는 생각으로 관찰했다. 그리고 그 뒤에 피어난 모든 것을 기록했다.

 

 

 

 

슈피어란 말은 글자 그대로는 작고 섬세한, 뾰족한 끝을 뜻한다. 스피라에라에 속한 꽃들은 모두가 이런 모양이다. 매우 작은 꽃들. 정원이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로 '슈피어' 같은 낱말을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 낱말들이 나의 세계를 넓혀주었다.


온 맘을 다해서 정원을 가꾸며 계절의 변화에 발맞추어 천천히 달라지는 풍경은 저자에게 남다른 생각을 불러온다. 그 생각은 산책하다 잠깐 본 '남의 정원'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다르다. 겨울에도 꽃이 피는 정원을 가꾸기 위해, 그는 부지런히 흙을 매만진 정원사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더 솔직하게, 철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한병철이기에 가능한 것들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떠오르는 책이었다. 3년 동안 장원을 가꾸면서 누군가에게 "이름 없는 풀", "이름 모를 꽃"이 하나하나 그와 만나 존재성을 가지게 된 걸 볼 수 있다.
이름을 가진다는 것, 낱말이 하나둘 나의 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이 지닌 의미가 무엇일까.
아직 난 "슈피어"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지 않았기에, "슈피어"가 한병철 저자의 마음을 어떻게 얼마나 넓혔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는 이름이, 말이, 단어가 나에게만 특별해지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 단어가 유달리 빛나 보이고, 마음의 틈을 벌리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걸 느껴본 적 있어서, 그의 글을 읽으며 "이런 것이 아닐까."하고 짐작해보았다.
그가 정원을 가꾸며 "슈피어"를 발견했던 건, 나에게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들이 탁 눈에 들어오는 것과 같다. 책을 읽지 않으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문장들이 이따금 나의 세계를 넓혀주었다. 다른 지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되기도 했고, 추억에 잠기게 만들기도 했고, 지금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도 했다. 책과 문장이 함께 공존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아마 그에게 "슈피어"는 함께 공존했던 순간이 쌓여 만든 무언가였을 것이다.
이렇게 그가 느낀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 낯설었던 문장들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저자의 글을 읽으면 나와 다른 세계를 살고 있고, 나와 다른 사유 체계를 가지고 있어 어렵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혹은 난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천천히 읽다 보면, 나도 느꼈던 것들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는 "정원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이다. 정원은 내가 멋대로 할 수 없는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모든 식물은 저만의 시간을 갖는다. 정원에서는 수많은 저만의 시간들이 교차한다."라고 했다. 자연 속에서 느끼는 시간은 우리가 달력을 넘기며 마주하는 시간과 사뭇 다르다. 그의 글 속에서도 그 시간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이유는 자연 속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제대로 다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 속에서 계절은 숫자로 나가오는 것들이다. 어느 달에 어떤 계절이라고 생각하거나 에어컨을 틀면 여름이고, 옷이 두꺼워지면 겨울이라고 느낀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는 매일매일 계절이 내 피부를 타고 전해진다. 그게 비록 작은 정원일지라도 말이다. 저자는 정원을 가꾸며 계절을 자신의 속도로 즐기는 꽃과 나무 풀들을 관찰한다. 그 시야를 타고 정원의 세계에 서서히 들어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책의 중후반부에 나오는 일기에서 그 모습이 돋보인다.

 

이미 깊은 가을. 대기는 몹시 서늘하다. 슬픔이 크다.

깊은 가을, 아니 거의 겨울이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차가운 비. 몹시 어둡고 축축하다. 해가 나온다 해도 제대로 밝아지지 않는다. 해는 광채를 낼 힘이 없다. 하늘에 붙은 맥 빠진 원반 같다.

 

의외로 가을과 겨울에 쓴 글들이 참 많다. 농사처럼 정원을 가꾸는 일도 겨울에는 쉬어가는 때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관찰이 빛을 발하는 계절은 겨울과 가을이다. 움직임이 가장 적은 때, 정원이 멈추었을 시간이라고 생각한 때. 그는 가장 섬세한 글로 그 시간을 남긴다. 얼음꽃에 눈과 마음을 내어주기도 하고, 가을날 지는 잎을 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끝과 마지막을 생각하지만, 자연의 속도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한 계절이 어떤 꽃에게는 시작일 수 있고 전성기일 수 있다고 들려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뒤에 오는 봄이 더욱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가을과 겨울과 대등한 계절감으로 다가올 수 있도록 만든다. 아니,  《땅의 예찬》에서만큼은 봄보다 가을과 겨울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서울은 아직 겨울 날씨. 초록은 없고 사방이 온통 잿빛 콘크리트다. 신령들이 사는 거룩한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피어난 영춘화를 보았다. 한겨울에 나무는 빛나는 노란색을 피웠다. 겨울에 꽃 피는 이 관목은 분명 산을 좋아한다.


서울을 말하는 구절마다 지금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날은 포근해졌지만, 아직 어떤 색감도 찾을 수 없는 고요한 모습이 그려졌다. 그런데, 저자의 문장들에서 강렬한 색채감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울긋불긋 아름다운 꽃을 표현하는 말들은 아름답지만, 강렬하지 않다. 그 화려함에 익숙해져서 굳이 표현하지 않은 걸까.
그런데 서울이 잿빛이라는 단어를 보자, 그의 정원에 놓인 색깔을 읽을 만큼 다양한 색을 떠올리기 힘든 내 모습이 보였다. 공원을 가도 잔디와 나무 몇 그루만 보아서 다른 빛깔을 본지 오래되었다. 꽃다발에 모여 있는 꽃은 많이 보았지만 땅 위에 놓여 있는 꽃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잿빛이라는 단어는 단번에 떠올랐다. 내게 익숙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정원에 대한 글을 읽었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정원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할 만큼 자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당장 정원을 가꿀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학교 교정에 있는 목련 나무가 보였다. 늘 그 자리에 있었는데, 꽃나무를 참 오랜만에 보았다. 하얗고 보랏빛 목련이 꽃을 피울 때가 기대되었다. 꼭 인왕산의 영춘화만 있는 건 아니다. 조용히 우리의 무관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빛깔을 내고 있는 존재들도 많이 있었다. 다만 내가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올봄에는 이 존재들을 가꾸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관찰하는 즐거움은 느껴보아야겠다.

 

 

 

 

이 책은 '행복한 나날에 대한 시론'이라고 불릴 수도 있으리라.
정원에서 일하고 싶다는 그리움을 자주 느낀다.
이때껏 이런 행복감을 알지 못했다.
이는 또한 매우 육체적인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땅의 예찬》을 읽고 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분석할지도 모른다. 그런 재주 없는 난, 책과 함께 마음의 호흡을 맞추었다.


천천히. 서서히.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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