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 - 탁재형 여행 산문집
탁재형 지음 / 김영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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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일상이
교차한 이야기를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완벽하게 아무것도 할 일이 없기 위해선 둘 중 하나가 필요하다.
무한대의 재산 또는 무한대의 용기.

 

여행을 가고 싶었다. 현실 앞에 놓인 일들이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 할 일들이라 좀처럼 의욕이 나지 않는다. 일상에서 벗어나 나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게 날 놓아주나. 여행을 가고 싶다고, 무작정 떠날 수 있는 재산도 없고, 무전여행이라도 상관없다며 배낭을 메고 떠날 용기가 난 없다. "버는 머리는 없이 쓰는 머리만 있고,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저자보다 더 겁쟁이인 난 어쩔 수 없이 여행 대신 여행서를 집어 들었다.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여행'을 말이다. 그 여정의 동반자로, 우중충한 날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우연히, 당신과 만나는 여행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할 줄 아는 누군가와 함께 떠났다.

 

자기의 주인이 된다는 것.
그것은 결국 자기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나를 위해 얼마큼의 시간을 어떤 속도로 쓸 것인지 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독특한 사람이다. 어떻게 이토록 본능에 충실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와 다른 욕망을 품은 사람이라 더 신기했다.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자유로운 생각이 여행지의 풍경을 다른 모습으로 그려내는 게 아닌가. 교과서 속 그림에 낙서를 했던 것처럼, 사진 속 풍경에 검은 사인펜으로 저자의 모습이 그려져 웃음이 나왔다. 아침에 비몽사몽으로 일어나 맥주를 공복에 마시며 오묘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나, 몇 번이나 여행 짐을 꾸리고 풀고를 반복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표정이나, 주린 배를 부여잡고 벽에 기대어 물끄러미 길가를 바라보는 초점 잃은 눈동자가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상상력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글을 읽다 보면 저자의 그런 모습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피식피식 웃게 된다. 아! 그의 행동이 재미있거나, 그의 여정 자체가 재미있는 건 아니다. 그가 여행에서 겪은 일들을 비틀어 생각하는 방식이 재미있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툭툭 이야기하는 게 흥미롭다. 심각한 상황을 덤덤하게, 걱정할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 주저할 이야기를 서슴없이. '일상과 닮아 있는 보통 할 수 있을 법한 방식'이 아닌 '여행'처럼 표현한다. 나라면 푸념으로 풀어놓았을 이야기들이 저자를 만나 이렇게나 유머러스하게 바뀔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여행기는 저자의 입장에선 지나온 행복이고 독자에겐 다가올 행복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난 저자의 아쉬움에서 설렘을 찾았다. 이미 지나온 추억을,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그때의 감정을 그리움으로 더듬는 저자의 글 속에서 말이다. 내가 다녀왔던 여행을 떠올릴 때도 즐겁지만, 다른 사람의 여행을 듣는 것도 참 설렌다. 왜 일까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 그건 내가 곧 떠날 수 있는 여행이라 그런 게 아닐까. 아직 내게 오지 않은 여행을 살펴보는 것이라 설렌다. 마치 새해보다 연말이 더 설레는 것처럼. 여행은 여정보다 그 여정에 다가가기 전이 더 두근거린다. 공항에서보다 공항 가기 전 날 침대 속이 더 행복한 것처럼.

 

수첩을 덮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가봤지만 기억나지 않는 장소들을 떠올린다.
만났지만 희미해져버린 사람들을 생각한다.
기록되지 않아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그러다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기록을 하지 않아 이젠 생각나지 않는 여행이 남긴 부재를 바라보는 글 속에서 여행이 남긴 그림자를 보았다. 잊을 수 없다고 굳게 믿었던 순간들이 기록물 없이 힘없이 사라질 수 있고, 그 뒤엔 감정만이 남는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의 현재를 받아들일 여유를 찾았다.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는 지금은 내일이 되면 어제가 되어 기억 속에서 잊힌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말이다. 진짜 행복해서 놓고 싶지 않은 기억이 흐릿해지듯, 진짜 힘들어서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는 기억도 공평하게 흐릿해진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너무나 충격적이고 강렬한 기억"은 영원히 기억 속에 남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렇게나 충격적이지도 강렬하지도 않다.

 

 

 

그렇게 해서 창피함과 시시함과 우스움과 행복함을 공평하게 나눠 가진 후에야, 그것은 모두의 '추억'이 된다. 맥락의 고갯길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었을 당신의 진짜 모습도 고개를 쳐든다.

 

『비가 오지 않으면 좋겠어』는 여행지에서 다시금 일상을 돌아오게 만드는 책이다. 여행지에서 떠오른 생각들은 결국 일상과 연결되어 있다. 잠시 잊고 싶은 마음에 떠난 현재는 여행지에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본능에 충실한 여행을 즐기다가도 저자 역시 이따금씩 현실로 돌아오곤 한다. 그리고 그 되돌아오는 길에 지금을 조금 더 즐길 수 있는 여유를 하나씩 마음 주머니에 담아준다. 여행지에서 사 들고 온 기념품처럼 마음에 차곡차곡 여유란 녀석이 쌓여간다. 따뜻하고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카라카스나, 서울이나,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라는 서글픈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 믿음직하다. 신기하게.


여행을 통해 여행이 아닌 일상을 이야기하는 저자와 즐겁게 지구 곳곳을 다니다 내 방 내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지금 당장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여행을 기다리며, 우선 이 책에서 잔뜩 들고 온 여유를 안고 오늘을 한결 여유롭게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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